41. 계승 ( 4 )
2층의 문을 열자 은빛의 풍경이 두 사람을 반겼다.
유리알처럼 맑은 눈이 쏟아지는 광장의 풍경이었다. 동그란 포석이 달팽이 껍질 무늬를 그리며 저 멀리까지 뻗어나갔고, 고깔처럼 뾰족한 지붕은 눈에 덮여 시리게 빛났다.
건물들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오밀조밀하게 맞붙어서 광장을 감싸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먹구름에 덮여 우중충했다. 이따금씩 열리는 구름의 틈새로, 자그마한 눈송이와 엷은 햇살이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여긴?'
사부작, 한 걸음 내딛으며 아이는 선주에게 말을 건넸다. 이번 환상도 선주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눈이 옅게 깔려 파랗게 빛나는 지면을 걸으며, 아이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여긴 어디죠?"
'어디일 것 같나.'
선주의 대답에선 말하기 싫은 기색이 느껴졌다. 아이는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무언가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듯, 깃발과 화환, 장식 촛대 따위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단상 위에 놓인 커다란 탁자 위에는 갖가지 음식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채였다. 다가가서 사과 한 개를 집어든 아이는, 코를 찌르는 냄새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시큼한 피냄새였다. 사과를 내려놓고 식탁보를 걷어올린 아이는 곧 그 냄새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시체."
그건 시체였다. 화려한 정복을 입은 채로, 등을 깊게 베여 죽은 마술사가 식탁 밑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이윽고 멀리서 다나의 비명이 들려왔다. 주변을 뒤지던 다나 역시 비슷한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눈에 덮인 시체였다. 이번 것은, 율사복을 입고 있었다. 눈과 이런저런 장애물에 덮여 잘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이 화사한 광장은 온통 시체로 가득했다.
"당신 짓이죠?"
'근거는?'
"칼자국을 보면 알죠."
대답하기 싫은 기색이라는 건, 뒤집어 말하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시체의 등짝에 휑하니 남은 칼자국은 어떻게 보아도 레바테인이 남긴 것이었다. 발뺌할 수 없어진 선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게 목 베여 사라진 놈들이, 뭉쳐서 나라를 세우려 한 적이 있었다. 제국처럼 말이야. 여긴 그 놈들이 야합의 증거를 만들려 모였던 곳이다.'
"야합의 증거? 말을 신기하게 하는군요. 당신답지 않게."
다나를 일으켜 세우고, 현장을 더 살피던 아이는 곧 '야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체가 안고 있던 물건 때문이었다. 그건 수첩이었다. 주례사를 가득 적은 수첩. 아무래도 이 율사는, 주례를 서기 위해 이런 복장으로 여기 찾아온 모양이었다.
"결혼 준비?"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발견한 시체들은 모두 결혼식의 하객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널려 있던 깃발도, 또 음식도, 예식의 준비라고 하면 그럴듯한 구석이 있었다. 난장판이 된 거리를 가로지르며, 아이는 그릇에 놓인 사과 하나를 집어 베어물고 말했다.
"야합이라면, 이 자들이 결혼으로 동맹이라도 맺으려고 했다는 건가요?"
'글쎄. 그렇겠지.'
"아까 보니 율사의 시체도 있던데요. 그 사람이랑은 이미 헤어졌던 건가요?"
'뭐, 그렇지.'
거의 스무고개하듯 억지로 정보를 모으면서 아이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다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조심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곧 커다란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신전이라고 할까, 교회라고 할까.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종교적 색채가 느껴지는 커다란 건물이 광장의 끝에 주인처럼 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타원 수십 개를 덧대 만든 장미창은, 군데군데 피가 묻어서 붉은 빛을 여과했다. 거대한 아치문 앞에는, 창을 움켜쥔 채 한쪽 무릎을 꿇은 동상 두 개가 지키듯이 놓여 있었다.
"이 안에서 스승님의 마력 비슷한 게 느껴져요."
말을 꺼낸 것은 다나였다. 아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굳이 그 말이 아니더라도, 이 환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이 교회일 것이라는 느낌은 온 몸으로 전해져오고 있었다. 정갈하게 깔린 일곱 단의 계단을 올라서, 두 사람은 함께 문고리를 잡고 열어젖혔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지러뜨리며, 교회의 내부가 두 사람 앞에 펼쳐졌다.
"여기가 아마도 결혼식 장소였던 모양이군요."
아이는 눈썹을 떨며 그렇게 말했다. 문을 열자마자, 시큼하고 비릿한 피냄새가 해일처럼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겨우살이며 비단, 흰 꽃 따위로 잔뜩 치장한 교회의 내부는 피에 잠겨 있었다. 하객들의 피였다. 아마도 선주가 이 자리에 참석한 하객들을 이 꼴로 만든 모양이었다. 길따란 의자와 기둥마다 목 베여 쓰러진 마술사의 시체가 즐비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핏물 때문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읍."
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던 다나가, 현기증을 느낀 듯 코를 막고 몸을 숙였다. 아이는 황급히 어깨를 두르며 다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아요?"
"그냥, 그냥 피냄새를 너무 맡아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아요. 괜찮아요."
가냘프게 웃으며 다나는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힘을 합쳐서 교회 내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꽤나 오랫동안 진전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먹구름이 조금 개이고, 정오의 햇살이 장미창을 비스듬히 꿰뚫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발견한 것은 없었다.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손수건으로 아이의 머리에 묻은 피를 닦아주던 다나는, 툭 중얼거렸다.
"어디에도 신랑과 신부의 시체가 없군요."
이곳이 결혼식의 현장이라면, 분명 그 주역은 신랑과 신부일 터였다. 하지만 이 교회에 널린 시체 사이에서 그 둘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깨끗한 의자에 털썩 앉은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다 선주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알고 있죠?"
'뭘 말이냐.'
"이 결혼식에 대해서.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행방에 대해서."
아이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방금 질문이, 지금까지 없었을 정도로 선주를 뒤흔들었던 모양이었다. 가슴에 손을 올려 그 떨림을 억누르고, 아이는 가능한 한 차갑게 말했다.
"여기 평생 갇혀 있다가 늙어 죽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면, 알려주시죠."
'참 대단한 협박이구나.'
비꼬는 투였지만 거절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선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신랑의 행방을 들려주었다.
'이 시점에서, 신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거다. 신랑은 쥐새끼처럼 도망쳐 숨었지. 블뢰유의 혼은 아마 그 놈이 움켜쥐고 있을 거다.'
"쥐새끼... 그런가요."
'하객 전부의 목숨을 바쳐 시간을 끌고, 그 틈에 감쪽같이 숨었던 거다. 나도 꽤나 헤맸었지. 그 길은 우연히 찾았다. 저기 저 동상, 보이나?'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 선주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교회의 가장 높은 곳, 건반 악기가 놓인 단상 옆에는 커다란 동상 하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정문에서 보았던 동상과 같은 것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커다란 마상창을 들고 있던 정문의 것과는 다르게 빈 손이라는 점 뿐이었다. 아이는 천천히 그 동상을 향해 걸어갔다.
'무기를 잃은 기사가 살아 있는 건 이상하지, 안 그런가?'
"그럴...지도."
'저 놈의 등을 칼로 꿰뚫어 보거라.'
그 말을 마치고 선주는 사라졌다. 침을 삼키고, 아이는 천천히 동상의 뒤로 걸어갔다. 동상은 장미창으로부터 햇살이 가장 쨍하게 내리쬐는 곳에 놓여 있었다. 동상의 너른 등판 위에서 햇살이 무지갯빛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아이는 천갈궁을 뽑아들고, 단숨에 깊이 찔러넣었다.
"뭐, 뭐 하는..."
다나의 질문이 나온 것과 동시였다. 우르릉, 소리가 울리며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요?"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나는 물었다. 방금 전까지 제단이 놓여 있던 곳이 옆으로 움직여서, 상상하지도 못한 구멍이 드러났다. 내려갈 수 있도록 사다리가 걸쳐 있는 구멍이었다. 휙 몸을 던져 사다리에 발을 걸치고, 아이는 짧게 대답했다.
"어떤 형한테 들은 말이 있어서요."
'네가 왜 네 형이냐.'
"그럼 동생 할래요?"
'나 참.'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다리는 깊은 지하까지 이어져 있었다. 턱, 차가운 돌바닥을 확인하고 내려앉은 아이는, 두 손을 모아 다나에게 소리쳤다.
"내려와도 좋아요! 안전합니다!"
그 말에 주저하던 다나는, 사다리에 발을 딛고 조심조심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올 때였다.
"아!"
짧은 비명이 울렸다. 다나가 발을 헛디뎌서,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내지른 소리였다. 아이는 얼른 팔을 내뻗어 떨어지는 다나를 두 손으로 받아냈다. 다행히도 헛손질하지 않고 부드럽게 받아낼 수 있었다. 양 팔 가득 부드러운 촉감이 번져왔다.
"후, 하. 후우... 고마워요."
품에 안긴 채로, 다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배시시 웃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나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면서, 아이는 물었다.
"정말로 몸은 괜찮은 거겠죠?"
들었던 경고 때문이었다. 블뢰유의 혼은 다나가 계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라서, 죽거나 운이 좋더라도 불구가 될 거라고, 레고르는 말했다. 방금 사다리를 놓친 것도 그 조각의 일부를 받아들인 후유증이 아닐까, 사실 두통이나 현기증 따위에 시달리는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다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냥 신발이 젖어 있어서 미끄러진 거에요. 걱정할 필요 전혀 없어요. 자, 가죠."
횃불에 불을 붙여 길을 밝히고, 다나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아이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그 흔들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복도는 좁고 어두웠다. 또 비밀스럽고 음산했다. 복도 전체에 길게 깔린 붉은 카펫의 양 옆으로, 장식용의 갑옷이 사열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수하게 서 있었다.
광원이라고는 다나가 움켜쥔 횃불 한 자루 뿐이었다. 두 사람이 발소리를 내며 걸어갈 때마다, 은빛 갑옷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볼록하게 왜곡되어 비쳤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었다.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복도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긴장도 느슨해졌다.
'조심해라.'
"예?"
위험을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선주였다. 선주의 짧은 말과 동시에, 습격은 시작됐다. 텅 빈줄 알았던 갑옷 하나가 움직여 창을 찔러간 것이었다. 노리는 것은 다나의 무방비한 등이었다.
"멈춰!"
스하악, 창대가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다나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횃불은 벽과 천장에 어지러운 그림자를 뿌렸다. 싸움이 시작된 것은 그와 동시였다. 수십 개의 갑옷이, 덜그럭거리며 두 사람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은빛의 갑옷면에선 당황한 두 사람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진 채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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