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40화 (240/279)

41. 계승 ( 7 )

3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환상은 익숙한 것이었다.

달빛이 쏟아져내리는 너른 풀밭이었다. 무릎까지 자란 이름모를 풀들은 하얗게 물들어서, 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연회색 비석 위로 그림자를 뿌렸다.

무질서하게 널린 비석들 사이로 난 길은 조금만 주의를 놓치면 넘어질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아이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버려진 들판 한 가운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탑 하나가 우뚝 솟아서, 이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깊은 밤인 듯 보름달은 지평을 가득 메울 정도로 가까웠다. 탑의 유리창마다 달빛이 스며 창백하게 빛났다.

멍하니 길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은 세 갈래 길 앞에서 멈추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탑을, 그리고 탑 위에 포개진 달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쏟아진 달빛이 아이의 옆얼굴을 파르스름한 흰 빛으로 어루만졌다.

'혹시 길을 묻고 싶은 거라면, 난 모른다. 이번에는 나와 무관계한 기억인 듯 싶군.'

선주는 먼저 선수를 쳤다. 정말로 모르는 풍경이었고, 이번에도 자신을 귀찮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아이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성큼성큼 길을 골라 걸어나갔다. 길을 알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다나가 발걸음을 옮긴 것도 그와 동시였다. 사실, 지금 아이의 귀에는 선주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이 곳은, 아이가, 그리고 다나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아지프의 본탑.

아지프의 총본산이자, 나하트의 본거지였던 곳이었다. 어려서 아지프의 실험체로 취급받던 시절, 아이도 다나도 이 곳에 여러 번 들린 적이 있었다. 길을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탑에 가까워질수록 기억은 더 확연해졌다. 문 앞에 다다른 아이는 문설주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게 왜 여기에?"

자세히 보니 조금 달랐다. 세부적인 장식이 아지프의 탑에서 보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아무래도 천 년 전에는 다른 탑이었던 것을, 아지프가 손에 넣어 지금처럼 개조했던 모양이었다. 다나가 먼저 문에 손을 댔다. 문은 뿌리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겨 있는 모양이군.'

선주의 말이 무색하게, 다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문에 붙어 있는 원판을 돌려 잠금을 풀었다. 우르릉, 큰 소리를 울리며 문은 벽 속으로 사라져갔다.

다나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방법을 알았냐는 질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감사를 전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갈 뿐이었다. 굳이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탑 안에는 불씨 하나 없었지만 대낮처럼 환했다. 수많은 창으로 달빛이 들이쳐서, 내부를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천천히 사방을 경계하면서, 달빛과 달빛 사이를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레 나아갔다. 이번 환상에서도 습격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나아가도 습격은 없었다. 더 의외의 물건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나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이건..."

"예지의 샘."

아이가 말을 받았다. 다나는 깜짝 놀라서 아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곁눈질 하나 하지 않고, 말라붙은 샘의 밑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탑의 1층 전체를 메울 듯 커다랗게 펼쳐져 있는 이 샘을 분명히 아이는 알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샘의 밑바닥을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옛날 아지프의 탑 1층에는 미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영험한 샘이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나하트의 도주, 그것이 있기 직전에, 나하트는 이 샘에 들러 미래를 점쳐 보았었다.

그래서 자신이 실험체에게 칼을 찔려 죽는 미래를 보았고, 운명에 저항하고자 점을 쳤고, 추적을 막기 위해서 이 샘을 영영 이용하지 못하도록 부숴 버렸다.

그러나 지금 여기, 천 년 전의 기억에는, 아직 그 샘이 부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돌을 던져 샘의 깊이를 재어 보았다. 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메마른 바닥과 충돌해 부딪혀 소리를 냈다. 그다지 깊지 않은 듯했다. 이 정도 높이면, 충분히 몸을 던져볼 법 했다. 판단이 서자마자 아이는 샘의 밑바닥으로 뛰어내렸고, 깔끔하게 착지했다.

"아마 여기에 혼이 있을 겁니다! 내려오세요!"

내려간 아이는 두 팔을 벌려 위에 남아 있는 다나에게 소리쳤다. 아이의 목소리는 탑의 이곳 저곳에 부딪히며 메아리쳤다. 그 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고 있던 다나는 훌쩍 뛰어내렸다. 아까 한 번 해 봐서 익은 것인지 이번에는 문제 없이 품에 착지할 수 있었다. 두 팔 가득 다나를 받아낸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내려놓으려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야야..."

"어디 아픈가요?"

"발목을, 조금 삔 것 같아요..."

다나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품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발목을 매만지는 그녀는, 정말로 다친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업히는 편이 낫겠군요."

"그럴까요?"

다나는 기다렸다는 듯 밝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선주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거짓말이다. 방금 낙하에서 충돌 같은 건 없었다.'

"알아요."

아이는 주섬주섬 자세를 바꾸며 짧게 대답했다. 선주의 말대로 방금 충돌은 없었다. 그래도 아이는 그래도 다나를 업고 이동하고 싶었다. 품에 닿은 다나의 온 몸이 놀랄 정도로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혼을 흡수한 부작용으로 열이 올라서, 현기증이 나 움직이기 벅찼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하기 싫어서 엉뚱한 핑계를 댄 게 틀림 없었다.

'그럼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거냐.'

걱정시키고, 부담을 주기 싫어서겠죠. 조용히 하세요. 아이가 속으로 강하게 생각했지만, 선주는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니, 응?"

아이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을 생각이었던 다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녹색 눈이 땡그래질 정도였다. 정석적인 자세로 업는 대신, 사냥감이라도 잡은 것처럼 어깨에 대충 걸쳐멨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이렇게 말고 제대로 업으면 안 되는 거에요?"

다나는 가볍게 발버둥을 치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힘을 쭉 뺐다.

"만에 하나라도 습격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뒤를 지켜봐주세요."

검을 쓰기에도 이 자세가 더 편해 보였다. 설득하려고 했던 다나는, 이내 포기한 채 아이의 한쪽 팔에 몸을 맡겼다.

달빛조차 잘 닿지 않는 샘의 밑바닥은 어두컴컴했다. 아이의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커먼 어둠 속을 낭만 하나 없는 자세로 한참이나 걸어나갔다. 그냥 내려달라고 할까, 위아래로 흔들리며 한참 망설이던 다나가 드디어 입을 벌렸을 때였다. 아이는 우뚝 멈춰서더니 조심스레 다나를 내려 놓았다.

"어떻게 알고..."

"여기가 목적지인 것 같습니다."

마음을 읽어서가 아니라, 그냥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려준 모양이었다. 다나는 휙 뒤돌아서서 아이가 말하는 그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샘의 정중앙에, 아직 말라붙지 않은 물웅덩이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 웅덩이의 한 가운데에 금빛의 무언가가 남아서, 사방에 은은한 빛을 뿌려댔다. 성녀의 혼, 그 마지막 조각이 틀림 없었다.

"함께 들어가죠. 깊을지도 모르니, 제가 먼저 앞장설게요."

아이는 먼저 웅덩이에 발을 내딛으며, 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은 다나는 조심스레 치마를 걷어올리고 웅덩이 속으로 발을 옮겼다.

작아 보였던 웅덩이는 꽤나 깊었다. 혼이 빛나는 중앙 가까이에 도달하자, 허리께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였다.

말라붙고 남은 물이 이 정도니, 원래는 얼마나 거대한 규모의 샘이었던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느새 물은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다나가 더 나아가기 힘들어 곤란해할때, 아이가 자신을 번쩍 들어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상은 그냥 걷긴 힘들겠어요. 이렇게 가죠."

어쩐지 부끄러워서 대답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다나는 가냘프게 몸을 말고,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다나는 아이의 품에 몸을 기댄 채로 호수의 정중앙에 도착했다.

눈 앞에서 성녀의 혼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는 호수의 밑바닥이 이 주변에서만 환해서, 다나와 아이의 얼굴이 수면에 금빛으로 물들어 비쳤다.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다나는 그 혼에 손을 내뻗었다. 손과 맞닿은 혼은 크게 요동치면서,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에 물에 젖은 다나의 긴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릴 정도였다.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다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꽉 껴안았다.

1층에서, 또 2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혼의 요동침 뒤로 기억의 세계가 드러났다. 두 사람은, 그리고 아이의 몸 속에서 웅크린 선주는 그 기억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성녀, 제국을 세운 파계 율사의, 괴로운 기억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기억을.

그러나 이번 기억은 뭔가 달랐다. 분명히 괴로운 기억이 비추어져야 할 텐데, 드러난 것은 영 딴판이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이 연이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녁놀 아래서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보리밭, 화사한 푸른 지붕의 풍차 위로 줄지어 날아가는 하얀 새 떼들, 정갈한 분수에서 손을 맞잡은 채 입을 맞추는 연인들, 따사로운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떼와 한가한 듯 엎드려 하품하는 목양견... 세 사람은 아연한 채, 끝없이 이어지는 평화로운 세계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이따금씩, 그 풍경이 둥근 파문을 그리며 흔들렸던 것이다.

"축하한다. 해냈구나."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풍경이 멀어지며 몇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 후에야 깨달았다. 이것은 실제의 풍경이 아니었다. 미래를 비추는 예지의 샘, 그 위에 그려지고 있던 풍경이었다. 성녀가 이 샘에서 보았던 것을, 접사하듯 다시 보았던 것이었다. 성녀 블뢰유, 그녀는 일전보다도 초췌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샘 앞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천 년 후의 미래다. 네가 해낸 거야. 우리의 나라가 무너졌을 때에는 끝난 줄 알았건만... 어떻게 제국 내부의 세력들을 꿰어 맞춰서, 나름의 균형을 만들어내고야 말았구나. 네 공이다. 천 년 후에도, 세계는 파멸하지 않고 이렇듯 아름답게 유지되고 있을 게다."

무릎에 손을 포개고 앉아 있는 성녀에게, 샘 저편의 누군가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언뜻 듣기에는 어머니의 그것처럼 자애로우면서도, 꺼림칙한 끝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이는 이런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몇 번 듣지 못한 것이지만, 잊을 리가 없었다. 에단. 이것은 레고르의 옆에 붙어 있는 신, 금기의 에단의 목소리가 틀림 없었다.

"그 다음에는 우리들의 나라를 재건하기만 하면, 평화는 항구해질 수 있다. 오오, 네가 우리의 보증인이 되어주기로 했지. 두 마술의 제국은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이 풍경을 언제까지고 지켜낼 테야."

어째서일까, 에단, 그리고 에단과 힘을 합쳤던 두 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블뢰유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군."

좀 더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왼쪽에서부터 울려 퍼진 것이었다. 샘의 동서남북에는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어서, 세 주신과 블뢰유는 그 의자에 앉아서 미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왼쪽의 의자 뒤에는 천칭 형상의 동상이 서 있었다. 천칭, 아이의 머릿속을 어떤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잊혀진 신, 단죄의 키벨레의 상징물이 천칭이라고 했다. 지금 블뢰유에게 말을 거는 저 자는, 키벨레가 틀림 없었다.

"신의 사도, 또는 7위계에 도달한 자는 이 운명을 부숴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 평화로운 미래를 부수기 위해 날뛰는 미친 개가 한 마리 있다는 것, 잊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키벨레가 지팡이를 들어 수면을 내리쳤다. 그러자 목가적이었던 풍경이 파문을 따라 지워지고, 다른 형상이 물 위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타서 무너지는 성채의 풍경이었다. 목조 건물들이 화재를 견디지 못하고 줄지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들려왔다. 그 참상의 한 가운데를, 한 남자가 저벅저벅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또한 아는 얼굴이었다. 그건 선주였다.

"이 자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게 아니다."

아이는 흉통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선주가 전에 없을 정도로 격동하고 있었다.

선주는 여기에 모인 세 주신을 모두 목쳤지만, 마지막에 성녀에게 배신을 당해 영영 잊혀지는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즉, 이 기억은, 그 이전의 기억.

성녀가 선주를 배신할 것을 모의할 때의 기억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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