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41화 (241/279)

41. 계승 ( 8 )

다음 목소리는 키벨레의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이치에 닿지 않아 혼란스럽다만, 네 말을 종합하면 말이지. 이 녀석은 네 옛 연인이란 말이지?"

아이는 멀고 먼 기억을 더듬었다. 먼 엣날, 림의 신전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기억이었다. 에단도, 키벨레도 아니라면, 소거법으로 저 자는 멜렉이 틀림없었다. 탑 전체에 메아리치는 그 목소리는 기묘했다. 분명히 달콤한 음색인데도, 그 끝울림에는 기분 나쁜 여운이 찐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인 블뢰유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 미친 놈은, 스스로를 마술사를 죽이는 사도라고 자칭하는 놈이고 말이다."

"자칭이 아니에요."

"아니겠지. 그러니 문제가 되는 거고."

심사가 불편한 듯 멜렉은 거슬리는 어조로 말을 끝냈다. 건너편에 있던 키벨레가 그 말을 받았다.

"일전에 있던 여러 참사들의 주범은 모두 이 놈이다. 사상이야 어쨌건 힘은 의심할 수 없지. 이 놈은 위험하다. 종잡을 수 없어서 더욱 더 그렇고. 그래서."

키벨레는 지팡이로 수면을 두들기며 말을 이어갔다.

"연인 관계였던 네가 이 녀석을 어떻게든 구슬려서 계약을 시켰다고 들었다.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 네가 구상하는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곘다는 계약. 틀림없겠지."

"예."

"그럼 왜 이 꼴이 된 건가."

블뢰유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길다란 속눈썹조차 하얗게 세어 있었다. 희미한 촛불이 비추는 그녀의 안색은 초췌하도록 파리해 보였다.

어떤 일을 겪으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걸까, 불과 몇 시간 전에 어린 시절의 그녀를 보았기에 그 안색은 더욱 더 흐리게 느껴졌다. 잠시 목을 가다듬던 그녀는 긴 설명을 시작했다. 다나와 아이는 2층에서 보았던 기억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그 놈은, 양 제국을 다 부숴서 균형을 맞추겠다고 나섰단 말인가?"

멜렉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리고 그 놈은 이미 우리의 나라를 쳐부쉈지. 그러니 계약 위반으로 심장이 멈추지 않으려면, 놈은 남은 제국마저도 박살내서 균형을 맞추어야만 한다는 소리군?"

블뢰유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터무니없군, 터무니없어. 멜렉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이야기를 정리한 것은 에단이었다.

"즉 저 녀석은 살아있기 위해서 끝없이 마술사를 죽여야만 하는 몸이라는 뜻이구나. 거기에 아나테마라서, 운명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힘마저 가지고 있지. 저 녀석은 인간 모양의 재앙이다. 네가 이토록 철저하게 안배한 세계의 존속이 위협받는다면, 그 원인은 저 놈밖에 없을 것이다."

예지의 샘은 미친 듯 출렁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세상을 비추던 그 수면은 대신 한 남자를 비추었다. 짚단처럼 사람을 베어넘기며, 새까맣게 불탄 세상 위를 걷는 남자. 그건 선주였다. 네가 만든 재앙을 똑바로 보라는 듯, 에단의 손짓에 따라 그 광경은 더욱 더 깊고 선명해져갔다. 하지만 여전히 블뢰유는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책은 있나."

"예."

추궁 같은 물음이었다.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포개고, 블뢰유는 똑똑히 말했다.

"제가 그 사람을 당신의 신전으로 불러들이겠습니다. 그럼, 당신의 힘으로 그 사람을 역사에서 지워지게 해 주세요."

"뭐?"

멜렉이 당황한 듯 반문했다. 블뢰유는 계속 말했다.

"아나테마라서, 또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운명을 망가뜨릴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존재를 역사에서 폐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역사에서 그 사람을 지워버린다면, 그 사람도 더 이상 이 고정된 운명을 바꿀 수 없게 될 겁니다."

"아니, 내 말은."

에단은 정말로 당황한 듯 말했다.

"왜 그렇게 번거롭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느냐는 거다."

"번거롭다면."

"왜 그냥 죽여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냐?"

블뢰유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유인하고, 우리가 힘을 합쳐 놈을 죽이는 것. 그게 더 이치에 닿는 안전한 해결법이 아닐까?"

그리고 온 몸에 엄습하는 감촉 때문에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저 편에 있던 에단이 홀연히 곁에 나타나 두 팔로 어깨를 휘감고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까지 정말 잘 해왔단다.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해서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던 이 세계에,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선물했어. 나라를 만들고, 권위를 만들고, 균형을 만들어서, 결국 질서를 만들었다. 보렴."

에단의 손짓을 따라 샘 위에 또 다른 환상이 펼쳐졌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선주가 죽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무너진 건물이 형상을 되찾고, 불이 꺼져갔다. 그렇게 되돌린 도시의 풍경은 너무나 정갈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라달라리아 본인이 세상에 내려온다 하더라도 이렇게 잘 해내지는 못했을 거야. 그런데,"

에단이 손짓하자, 다시 빠르게 시간이 지나가며 호수 위에 비친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그 모든 몰락을 등지고, 피와 상처로 얼룩진 선주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 흉험한 눈빛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단 늑대의 것처럼 보였다.

"왜 마지막에 이런 짓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구나."

에단의 얼굴은 이 회상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 새까만 혓바닥이 블뢰유의 귀 근처에서 일렁이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블뢰유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 동안, 아이는 조용히 이 탑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흐름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지금의 륜처럼, 저 시절의 성녀는 세계의 멸망을 보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그 노력의 결과로 세계의 운명은 지켜졌다. 이 예지의 샘에서 확인한 운명은 그랬다.

그러나 아이도 알고 있듯이, 아나테마, 그리고 성좌는 그 정해진 운명을 뒤바꿀 수가 있었다. 블뢰유가 지켜낸 미래는 이따금씩 뒤흔들리며 위협받았고, 그 원인은 선주였다.

그래서 블뢰유는 선주를 배신했고, 역사에서 잊혀지게 만들어 운명을 지키려 했다... 거기까지는 아이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던 내막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환상은 좀 더 복잡한 내막을 비추고 있었다. 에단은 원래 선주의 죽음을 요구했던 것 같았다.

"옛 연인이니까, 그래, 죽이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한 번만이다. 한 번만 더 큰 결단을 내려주었으면 하는구나. 유인해다오. 우리가 힘을 합쳐 그 한 많은 숨을 거두어주마. 그 녀석도 고마워할 게야."

"아니오. 거부합니다."

"응?"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에단의 목소리는 당혹으로 물들었다. 블뢰유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을 붙잡아 떼어내고, 무언가를 쥐어주며 말했다. 분명한 목소리였다.

"거절합니다. 계약해주세요. 죽이지 않고, 역사에서 지우기만 하겠다고."

블뢰유가 건네준 것은 동전이었다. 파계 율사의 계약을 주선하는, 양면이 모두 앞면인 동전. 블뢰유는 두 손으로 에단의 손가락을 붙잡아 동전을 꼭 쥐어주고는,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이 계약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 사람을 유인하지 않겠어요."

노성이 터져나왔다. 건너편의 멜렉에게서 나온 고함이었다. 잠시 사방은 다툼과 싸움으로 어지러워졌다. 가라앉힌 것은 에단이었다. 동전을 세게 움켜쥐고, 간신히 평정을 유지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

"이기고 싶어요."

"이긴다고? 무엇에게."

"운명에게요."

에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줄였다. 블뢰유는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그 얼굴은 희미한 웃음을 베어물고 있었다.

"그 사람이 그랬거든요. 자신의 삶에서 좋은 일 같은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 말이 진실인 채로 두고 싶지 않아요. 입증하고 싶어요. 그 사람이 틀렸다는 걸."

분명하게 마무리지었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 반드시,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걸."

블뢰유는 말을 마치고 다시 다소곳이 무릎에 손을 가져갔다. 입술은 엷어졌고, 머리색도 희미해졌고, 인상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고집센 표정에선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 늑대가 가득하던 숲에서 억지를 부리며 따라갈 때, 그 때 짓던 표정이었다. 생각하려는 듯 에단은 입을 다물었다. 반론은 키벨레의 입에서부터 나왔다.

"뭐가 달라진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군. 네 말대로라면 말이야, 어차피 그 놈은 제국의 마술사를 전부 쳐죽이기 전까지는 쉴 수 없는 몸 아닌가. 그 계약을 주선한 장본인이 너고 말이야."

그 말대로였다. 이 세 주신들이 선주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선주는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는 한 가미온과의 계약으로 죽게 될 예정이었다.

"설마 이제 와서, 제국 전체와 그 놈 하나의 목숨을 바꾸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닐 텐데..."

일부러 비웃으면서, 키벨레는 블뢰유의 표정을 탐색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울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의혹에 가득 차서 블뢰유를 샅샅이 살피던 키벨레는, 갑자기 안색을 굳혔다. 어떤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너, 설마..."

이 긴 대화가 오갈 동안, 단 한 번도, 블뢰유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눈이 멀기라도 한 것처럼.

"금기에 손을 댔나?"

"예."

블뢰유는 어딘가 뿌듯해보이는 표정으로 답했다.

"대대로 계승할 수 있도록, 제 혼을 잘라내어 물화했습니다. 지금 이 몸은 텅 빈 껍데기나 다름없어요. 남은 건 그 사람과 나눴던 계약뿐이지요. 계약은 파계 율사의 생명으로 보증하는 것이니, 이 몸이 죽으면 그 계약은 끝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혼을 잘라내는 것. 마술에 무지한 아이였지만,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이 멀어버린 것도, 피부가 부서져버릴 것처럼 얇아진 것도 그 여파인 듯싶었다.

"죽을 생각인 거냐? 그 놈한테? 죽어서 그 같잖은 놈을 살리겠다고?"

"이미 돌이킬 수 없어요.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블뢰유는 이미 돌아갈 길을 모두 끊어놓고 이 곳에 왔다. 그 말에 키벨레는 입을 다물었다. 설득을 포기한 것이었다. 아직도 애타게 설득을 해 보려는 자는 에단뿐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네가 애타게 바라던 것들... 세계의 존속, 질서, 균형. 대가 없이 얻을 수는 없지 않겠니. 딱 그 녀석의 목숨 하나만 저울대에서 내려놓으면, 모두 지켜낼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느냐?"

뺨을 쓰다듬으며 에단은 말했다. 샘의 환상이 일렁거리며 다양한 모습을 비추었다. 하지만 블뢰유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냥요."

"네 이 결정 때문에 네 후손이 죽어도?"

"그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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