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계승 ( 9 )
어떻게든 샘의 환상을 다루어 블뢰유를 설득하려던 에단은 무언가를 깨닫고 침음성을 흘렸다. 눈이 멀어 있다면, 이 모든 환상이 보일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이 결정 때문에 세계의 존속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야."
"괜찮습니다."
"저 남자도 너를 비열한 배신자로 기억할 거다. 널 원망할 거야. 그래도?"
블뢰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밀랍처럼 하얗기만 하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지금까지 중 가장 긴 침묵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여전했다.
"그냥, 그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초대의 성녀는 말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실만은 뼈저리게 이해했다. 에단은 한숨을 내쉬며 동전을 던졌다. 계약을 수락하겠다는 뜻이었다.
"이해할 수 없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겠지. 좋아, 받아들였다."
쨍, 동전이 손가락과 부딪는 금속음이 크게 울려퍼졌다. 손등에 착지하는 동전을 마지막으로, 이 장소의 풍경은 마구 구겨 찢어버린 수채화처럼 눈 앞에서 사라져갔다.
혼 너머로 비춰보이는 풍경 뿐만 아니라, 아이와 다나가 있는 장소 전체가 일렁이며 다른 장소로 바뀌고 있었다.
탑을 이루던 벽이 무너지고, 샘의 물이 치솟으며 두 사람을 덮쳤다. 다나는 품에 안긴 채로 아이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눈을 질끈 감고 기다렸다. 눈을 떴을 때, 풍경은 이미 변해 있었다. 그건 텅 빈 동굴 속이었다.
"윽."
아이는 갑자기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신음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들끓는 느낌이었다. 선주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이 텅 빈 동굴을 보고, 선주는 전에 없이 격동하고 있었다. 다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든 아이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성녀 블뢰유. 동굴의 끝에 그녀가 있었다. 벽을 등지고 단출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꿈꾸듯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 표정은 너무나 평온해보였다. 아이는 천천히 그 사람을 향해 발을 옮겼다. 의자 위의 천장만이 뻥 뚫려서,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빛이 닿는 곳은 그곳 뿐이었다. 빛 속으로, 블뢰유의 앞으로 다가간 아이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구멍 너머로 조각나 비치는 하늘은 야속하도록 맑고 푸르렀다. 다나도 조심스레 아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식물처럼, 빛을 받고 서 있었다.
"이것도 분명히 환상이겠죠."
아이는 선주에게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아이는 천천히 천갈궁을 뽑아들었다. 이 환상을 끝맺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반응이 돌아왔다. 가슴 언저리, 아까 선주가 어루만졌던 흉터가 있던 그곳에서, 무언가가 검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뭘...뭘 하려고."
다나가 눈이 동그래져서 아이에게 물었다. 마치 적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아이가 검을 양 손으로 붙잡고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먼 엣날에 림에게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잊혀질 것이라며 들려주었던 말이었다. 선주는 자신의 연인을 죽였다고 했다. 죽기 싫다고 거부하던 검을, 림이 붙잡아 억지로 심장에 꽂아넣었다고 했다. 그럼, 이 환상을 끝내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도 명확했다.
'하지 마라.'
"이건 그냥 기억일 뿐이에요."
이 꼴이 되기 전에, 굶기라도 한 것인가. 비쩍 말라 옷이 흘러내려 드러난 블뢰유의 쇄골을 바라보면서,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원히 이 환상 속에 갖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 마.'
그 가슴팍에 칼끝을 노리자, 선주는 더욱 더 크게 경고했다. 다나도 그 목소리를 들은 듯 놀란 눈으로 이 쪽을 쳐다보았다. 팔뚝과 어깨 근처가 저릿저릿했다. 심호흡을 하고, 아이는 검을 높게 쳐들었다.
'하지 마, 이런 빌어 쳐먹을!'
"윽!"
아이의 팔뚝 가득 힘줄이 떠올랐다. 무언가가 몸 속에서 팔을 잡아채는 기분이었다. 옛날, 나사렘에서처럼, 선주가 몸의 통제권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블뢰유의 심장을 노리고 치켜든 검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도움을, 이걸 끝내도록 도와주세요!"
아이의 목 전체에 힘줄이 떠올라 있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검은 무늬가 그 힘줄을 타고 기어올라서 뺨에 난해한 무늬를 그렸다. 눈치 빠른 다나는 아이의 목적을 이해하고 뒤에서 팔을 붙잡았다. 그 이상한 힘겨루기는 몇 분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림은 착잡한 듯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에 떠 있었다.
덜커덩, 결국 결론은 났다. 선주는 두 사람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고, 검은 심장에 꽂히고 말았다. 그러자 큰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부서졌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레버였다. 그와 동시에 승강기는 두 사람을 태운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자빠진 다나는 바닥에 쓰러져 색색 숨을 내쉬었다.
"다행, 이네요. 끝, 마쳐서..."
이 탑에 흩어져 있던 혼은 이것으로 전부 갈무리했다. 지금 이 승강기는 단테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도 끝난 셈이었다. 다나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성녀의 혼을 흡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힘을 다 썼기 때문인지, 현기증이 나고 시야가 혼탁해서 굉장히 어지러웠다. 자신에게로 황급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뻗는 손도 보였다. 일으켜주려나보다, 그렇게 생각한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윽!"
하지만 그 손길은, 다나가 생각했던 것처럼 다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손은 멱살을 잡아채고 뒤흔들었다.
"웃기지 마!"
"아, 아이 씨?"
비로소 시야를 회복한 다나는, 눈 앞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히 아이지만, 아이가 아니었다. 백은을 녹인 것 같았던 은발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몸 전체에서 거무튀튀한 마력이 파도처럼 흘러넘치고 있었다. 선주였다. 이성을 잃은 선주가, 결국 몸의 통제권을 가로채고 폭주하고 있던 것이었다.
"배신한게, 그래, 전부 날 위해서였다는 거냐? 일부러 뒈졌다는 거냐?"
"그만, 그만..."
다나는 숨을 쉬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율사복의 일부가 찌직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너무나 흥분한 탓에, 선주는 지금 다나와 블뢰유를 구분하지 못하고 감정을 토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나도 묻고 싶어,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목을 붙잡힌 채로, 두 손으로 그 팔뚝을 더듬으면서, 다나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은 압박감이 붙잡힌 멱살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건... 아마도,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개소리는 집어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랬으니까..."
견디다 못한 율사복의 옷깃이 찢어지면서, 다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선주는 여전히 폭주하고 있었다. 선주는 다나의 어깨를 붙잡고,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질렀다.
"그래서? 내 꼴을 봐! 그 따위로 살아남아서 좋은 일이라는 게 생겼나? 넌 졌어. 졌다고!"
"그만, 그만해요..."
다나의 머리카락은 엉망이 되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드디어 선주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블뢰유가 아니라 다나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 예지의 샘에서 비추었던, 늑대 같은 흉흉한 안광으로, 다나를 노려보며 나지막히 말할 뿐이었다.
"우스운 짓이었군. 진지해질 필요 같은 건 없었는데. 이것도 어차피 잘 꾸며낸 기만일 뿐이겠지. 네놈들은 마술사니까."
다나는 밭은 기침을 뱉으면서도, 눈을 치뜨고 선주를 노려보았다. 잠깐 움츠러들었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눈을 치떴다.
"그게 너희의 일이지.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고, 속이고, 배신하는 것. 저런 엉터리 소설이 사실일 리가 없지. 덕분에 잊어버렸던 사명을 똑똑히 되새겼다."
"그게, 저 사람의 희생에 대한 당신의 대답인가요."
"닥쳐. 이 일이 끝나면, 이번에야말로 못다한 일을 끝마치겠다. 제국의 마술사를 전부 쳐 죽여버리겠어."
선주의 목소리는 탑의 벽에 부딪혀 음산하게 울렸다. 다시금 다나의 멱살을 붙잡고, 선주는 승강기의 끝까지 걸어갔다. 다나의 밑에는 끝없는 어둠이 고여 있었다. 어떻게든 그 팔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다나의 힘으론 무리였다. 금방이라도 다나를 놓아버릴 것처럼 위협하면서, 선주는 나지막하게 선언했다.
"이번에야말로 제국을 남김없이 멸절해서, 그 빌어쳐먹을 균형이라는 걸 맞춰 주겠어. 그래야 저런 개소리에 빚진 게 아니게 될 테니까. 그래, 다 쳐 죽여버릴 거다. 다시는 이런 개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그 말을 마친 선주는 금방이라도 다나를 놓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놓지 못하고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다나의 모습에, 블뢰유가 겹쳐 보였던 것 같았다. 틈은 그때였다.
"윽!"
팔뚝을 크게 깨물린 선주는 다나를 놓치고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다나는, 승강기 꼭짓점의 사슬까지 굴러가 부딪혔다.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고통이 배와 등 전체에 몰려왔지만,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주가 무슨 짓을 할 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나 일어난 다나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아이를 감싸고 있던 새까만 기운이 사라지고, 은발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방금을 틈타서 아이가 다시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것 같았다. 숨이 하얗게 번져 나올 정도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아이는 선주에게 씹어뱉듯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선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선언으로 어떤 의지를 굳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는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레 다나에게로 다가갔다.
혼을 흡수해서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을 텐데, 뜻밖에 난투까지 치른 것이 참을 수 없이 걱정됐다. 간신히 일어섰던 다나는 힘이 빠진 듯 사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였다. 아이는 황망하게 다나의 어깨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괜찮은 거죠? 괜찮나요? 대답할 수 있어요?"
찢어진 곳이 눈에 띄었다. 겉옷을 벗어 붕대를 만들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눕도록 베개를 만들어 눕혀주었다. 그럼에도 눈을 뜨지 않자, 아이는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했다. 보다못한 선주가 한 마디를 던졌다.
'심장이 뛰고 있지 않나. 그냥 잠든 거다.'
그 말대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이는 털썩 주저앉았다. 위를 올려다보자, 탑의 천장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탑의 끝에 거의 다다른 모양이었다. 아이는 담을 수 있는 최대의 분노를 담아서, 선주에게 말을 걸었다.
"실망이에요."
답은 없었다. 천갈궁의 칼자루를 매만지면서 아이는 계속 말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가요. 그렇게 강하다면서, 당신은 사람의 진심 하나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나요."
'저건 기만이야. 너야말로 저런 모든 거짓말에 다 속아넘어가서, 어떻게 세상을 견딜 셈인 게냐.'
선주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승강기는 어느새 끝에 도착해 있었다. 두 팔을 벌려서 다나를 안아올리고, 승강기에서 내리면서, 아이는 선언했다.
"그런 겁쟁이의 힘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나 혼자 싸우겠어요."
'정말로?'
"당신의 힘은 빌리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문 근처에 다나를 눕히고, 그 얼굴에 귀를 가져다대며 아이는 말했다. 다행히도, 새근새근 잠자는 숨소리가 들렸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에 안도하는 표정이 그렇게 우스웠는지, 선주는 코웃음을 치곤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선주의 기척은 그것으로 가슴 속에서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정말로 절대로 도움을 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다녀올게요. 푹 쉬고 있어요."
잠든 다나에게 말을 건네고, 아이는 마지막 문의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멈추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사과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구나.'
"응?"
그건 림이었다. 뼈날개를 퍼덕거리며, 림은 정말로 괴로운 듯이,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내가, 모든 것을 망쳐버려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는 잠시 멍청하게 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림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블뢰유와 선주의 관계를 자신이 망쳐버린 것에 대해서. 아이는 림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때의 림이라면, 절대로 꺼내지 않을 것 같은 말이었다.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뼈와 근육으로 가득한 몸뚱이를 꽉 끌어안았다. 등에 친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따스함이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포옹을 마치고, 아이는 뒤돌아섰다. 문은 여전히 차갑게 닫혀 있었다. 심호흡을 들이키고, 문을 열어젖혔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단테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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