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43화 (243/279)

41. 계승 ( 10 )

무채색의 세계 속에 그 남자는 있었다.

길 아잘록이 바라는 세계, 모든 생명이 사멸한 풍경이 문 너머에선 기다리고 있었다. 잿빛 뿐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한 움큼의 재가 바람을 타고 얼굴에 부딪혀 시야를 가렸다. 입술의 틈새로 파고든 잿가루는 쓰고 매웠다. 올려다본 하늘은 수천 수만의 구름에 가리워 들여다볼수록 어둡기만 했고, 포개어진 구름의 틈새로 스미는 햇살은 부서질 듯 엷었다.

아이는 그 회색 사막 위를 걸어나갔다. 텅 빈 세계에는 삭풍만이 가득했다. 아이의 긴 머리는 걸음마다 희게 나부꼈다. 완전히 무너져 기둥뿐인 성문을 넘고, 자욱하게 몰아치는 잿바람을 헤치며, 말라붙은 관목림과 빛바랜 깃발 위를 걸어서, 마침내 도달했다. 단테가 기다리는 곳에.

퇴적물과 폐허로 쌓은 언덕 위에 단테는 있었다. 아주 높은 언덕이었다. 밑에서 올려다본 그는 하늘을 등지고 무릎꿇은 것처럼 보였다. 저 새까만 하늘을 짊어진 채 얼마나 오래, 또 홀로 기다려왔는가. 무언가가 북받쳤다. 울음 같았다. 억눌러 삼키고, 아이는 다시금 발을 내딛었다. 푸욱, 발자국은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깊었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모습은 더욱 더 선명해졌다. 금우궁의 힘을 끌어내 갑주를 온 몸에 둘렀을 때와 같은 형상이었지만, 많은 것이 달랐다.

고결한 은빛이었던 갑옷은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고, 어깻죽지와 옆구리에서 쇳조각이 길게 자라나 사슬처럼 엮여 있었다.

무게 때문일까, 강풍에도 불구하고 사슬들은 가지런히 늘어져서 언뜻 망토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이제 투구도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 깊은 눈구멍에는 어둠이 가득 고여 있었다. 열 발자국이면 닿을 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스릉, 비석에 박혀 있던 단테의 검이 부드럽게 뽑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던 그가 검을 뽑고 일어선 것이었다.

여전히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저 투구 너머로 숨이 하얗게 새어나올 따름이었다. 아이는 천갈궁을 세차게 뽑아들었다.

단테도 금우궁을 비스듬히 겨누었다. 잠시 두 사람은 그렇게 검을 마주 댄 채로 대치했다. 검으로 겨눈 세상 너머는 온통 묵빛이었다. 빛나는 것이라곤, 마주 선 상대의 검날 뿐이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이였다. 그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베루스의 전승을 들려주며 단테는 그런 약속을 권했다. 서로의 검은, 서로가 이어받자고. 이 싸움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단테가 원했던 자연물의 소멸 같은 죽음을 이루어줄 유일한 길일 터였다.

멀리서 불어온 잿바람에 단테의 장식술이 길게 휘날렸다. 우그러져 그림자로 얼룩진 흉갑은 귀신의 얼굴처럼 보였다.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대신, 단테는 커다란 참격을 날려왔다. 크게 휘둘러 맞받았다. 쾅, 울려퍼지는 날카로운 금속음을 신호로, 두 성좌의 싸움은 막을 올렸다.

시꺼먼 무언가가 들러붙은 금우궁은 직각의 정육도처럼 변해 있었다. 그 무거운 칼날이 어깻죽지를 노렸다.

소름끼치는 검풍이 귓전에 몰아쳤다. 손잡이로 간신히 받아내고, 팔꿈치로 단테의 머리를 후려쳤다. 텅! 머리가 돌아가며 실낱같은 빈틈이 열렸다. 팔꿈치의 격통을 참아내고, 아이는 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바닥을 쓸며 튀어오른 검날은 단테의 아랫턱을 쪼갤 듯 덮쳐들었다.

"윽!"

턱, 그러나 막혔다. 단테가 손을 내뻗어 검날을 붙잡은 것이었다. 신기를 가득 머금은 성좌의 검날을 목검처럼 잡아내는 것,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전의 단테조차 불가능했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신기를 밀어넣었다. 검 위에서 붉은 신기가 해일처럼 너울거렸지만, 단테의 건틀릿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방어력이 압도적이었던 금우궁이, 아잘록의 힘으로 강화되며 이런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 같았다. 포기하지 않고 신기를 더욱 쏟아부었다.

검 위의 붉은 빛은 이제 눈이 아플 정도로 넘쳐흘렀다. 이건 버티지 못했는지, 건틀릿의 표면에 쩍 금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에 힘을 얻고 더욱 힘을 넣고 휘두르려 할 때였다.

펑, 가죽북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손에서 검날을 놓아버린 단테가 아이의 배에 돌려차기를 먹인 것이었다.

재빠르고, 깔끔한 솜씨였다. 공처럼 날아간 아이는 망가진 여신상에 부딪혔다. 여신상은 이 충격으로 완파되어, 아이의 머리 위로 돌조각과 흙먼지를 흩날렸다.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등과 배 모두에 찌르는 듯한 격통이 치밀었다. 하지만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아이는 즉시 검을 잡고 일어나 단테를 살폈다.

"ㅡㅡㅡㅡㅡ..."

단테가 뒤집어쓴 시커먼 투구, 그 쇠창살 같은 입구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뱃속에서 쇳물을 끓이는 듯한 저음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금우궁을 붙잡고, 큰 일격을 준비하는 듯 힘을 모으고 있었다. 넓적한 검날 위에서 새까만 기운은 미친 듯 요동쳤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다는 것을. 대응하기 위해 자세를 낮췄을 때, 단테는 검을 휘둘렀다. 둥글게 회전한 금우궁은 재와 돌조각을 흩날리며 바닥에 둥그런 흉터를 새겼다.

잠시 후 그 흉터를 따라, 시꺼먼 무언가가 폭발하며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비석도, 여신상도, 폭발은 닿는 모든 것을 쳐부수며 다가왔다.

흩날리는 재와 먼지 때문에 눈을 뜨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렸을 때, 이미 폭발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쾅! 굉음과 함께 커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테는 그 연기를 응시했다. 연기 속에서 웅크린 채 앉아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뭄을 숙여 후폭풍은 피했지만 중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바닥에 깊이 쳐박힌 금우궁을 뽑아들고, 그림자를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갔다. 그 때문에, 등이 완전히 열렸다.

쩡! 강렬한 충격이 등 전체를 덮쳐서, 단테는 균형을 잃고 휘청했다. 등 뒤의 연기 속에서 아이가 뛰쳐나와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당황한 듯 뒤돌아섰지만, 이미 천갈궁은 자신의 어깨를 베어내고 빠져나간 뒤였다. 어깨를 움켜쥐고 힐끗 뒤를 돌아본 단테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기가 걷힌 자리에는 아이 대신 그림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림자를 꺼내 부리는 능력, 천갈궁의 힘을 이용해 속임수를 걸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도 완전히 성하진 않았다. 폭발을 무작정 뚫고 뛰쳐나온 대가로, 왼쪽 눈두덩 위에 커다란 파편이 박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바테인!"

어깨를 베어낸 기세 그대로 천갈궁을 내던지고, 아이는 적색의 대검을 청원했다. 저 무식한 방어력을 뚫으려면 레바테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붉은 대검은 형체를 드러내자마자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단테가 금우궁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늦었다. 쾅! 레바테인은 투구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투구 전체에 금이 번져나가고, 일부가 떨어져나가 단테의 금빛 머리칼과 이마가 드러났다. 아까에 비하면 큰 성과였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커헉!"

방금 일격은 결정타라고 생각하고 휘두른 것이었다. 그게 막힌 대가는 컸다. 단테는 레바테인을 쳐내고, 금우궁을 두 손으로 꼬나쥐어 찌르기를 날려왔다.

송곳처럼 쏟아진 검끝은 아이의 쇄골을 꿰뚫고 뒤로 빠져나왔다. 피와 뼛가루가 흩날리며, 미칠 듯한 고통이 상반신 전체에 번졌다.

하지만, 참아냈다. 참아내야만 했다. 아이는 지척까지 다가온 단테의 머리를 붙잡고 박치기를 날렸다. 드러난 부위가 그곳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어지러운 듯 단테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검은 뽑혀나오며 피를 뿌렸다. 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슴에 발차기를 먹였다.

자세가 무너진 단테는 뒤로 세 발 물러섰다. 아이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 거리를 확보했다. 가쁜 호흡을 부여잡고, 아이는 눈두덩 위에 박힌 파편을 사납게 뽑아 내던졌다. 피가 주륵 흘러내리며 왼편의 시야를 새빨간 빛으로 물들였다.

"후욱...후욱..."

반격으로 죽음의 위기에선 벗어났지만, 상황은 명백히 열세였다. 지금의 너는 단테를 이길 수 없다던 선주의 단언이 떠올랐다. 아니, 할 수 있어. 없어도 해야 해. 혼잣말로 나약한 생각을 몰아내고, 아이는 뺨을 따라 턱까지 흘러내린 핏물을 슥 닦아냈다. 붉게 물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단테의 모습이 가득 떠올랐다.

"ㅡㅡㅡㅡㅡ..."

그는 다시금 두 손으로 금우궁을 부여잡고, 아까의 그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금우궁의 검날 위에서 새까만 기운이 폭풍처럼 맺혔다.

완성되기 전에 막아야 해. 다급하게 판단을 내린 아이는 레바테인을 움켜쥐고 뛰쳐들었다. 그러나 단테는 기다렸다는 듯, 검은 신기를 휘두른 금우궁으로 맞받아쳐왔다.

충돌은 컸다. 검압에서 미친 듯한 돌풍이 불어, 아이의 앞머리는 쉴새없이 휘날렸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람이 휘몰아쳐 거대한 잿가루의 회오리를 이룰 정도였다.

전신의 모든 힘이 검날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눈 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아까의 충격으로 잔금이 간 투구가, 풍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금씩 바스라져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드러난 단테의 금발 역시 미친 듯 휘날리고 있었다. 기합성을 내지르며, 아이는 레바테인을 떼어내고 다시금 커다랗게 휘둘렀다.

쾅! 태풍과 태풍이 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터지고, 금우궁과 레바테인은 다시 한 번 충돌했다. 여파를 견디지 못한 단테의 투구가 완전히 부서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부서진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레바테인 또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다.

"크헉!"

단테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릎으로 아이의 턱을 올려찼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힘을 밀어넣은 아이는 저항하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뒤로 쓰러졌다. 어지러웠다. 짓무른 눈에 어둡기만 한 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무언가가 자신의 배를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각반 같았다. 자신을 깔아뭉갠 단테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무릎으로 배를 꽉 붙잡고 있는 듯했다.

"후욱...후욱..."

어떻게든 팔을 움직여 검을 움켜쥐려 했지만, 팔도 붙들렸다. 뭉개진 시야 위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단테였다. 투구가 깨져서, 그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뺨과 턱 아래가 새까만 혈관 비슷한 무언가로 뒤덮인 것만 빼면, 예전의 단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탁한 압생트 빛의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말했다.

"편히, 쉬어라."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나. 또렷한 발음이었다. 대답을 할 겨를도 없었다. 곤충을 박제하듯 붙들어맨 채로, 단테는 아이의 심장에 금우궁을 꽂아넣었다. 커헉, 더운 숨과 핏물을 토해내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숨을 끊어줄 수 있도록, 검을 꽂은 채로 둥글게 비틀었다. 심장과 내장을 모두 으깨지는 감각이 검을 타고 전해져왔다.

"헉...흐헉....흐으윽."

검날 너머로 느껴지는 떨림은 강하고 깊었다. 단테는 눈을 감은 채, 그 떨림이 완전히 멎기를 기다렸다. 잿바람이 다시금 불어 두 사람을 휩쓸고 지나갔다.

입을 닫아도, 입술의 틈새로 파고들어 혀뿌리에 몸을 부딪고야 마는 그 잿가루는, 너무나 맵고 쓰라렸다. 잿바람이 지나갔을 때, 떨림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끝인가. 단테는 아이의 심장에서 검을 뽑고 일어섰다. 늘어진 금우궁은 심장을 쪼개고도 새것처럼 하얗게 빛났다. 뒤돌아서서, 원래 있던 언덕으로 향하기 위해, 몇 발자국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쿨럭, 커헉."

느닷없이 들려온 신음 소리에 다시 뒤돌아섰다. 그 자리에는, 만신창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아이가 있었다. 그 손에는 짐승의 이빨처럼 창백한 대태도가 들려 있었다. 심장을 꿰뚫리고, 애검이 부러졌어도, 아이는 아직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얼간이 자식, 죽은 척 하고 있었더라면 첩과 함께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응해 주는 것이 전사의 도리였다. 단테는 다시 금우궁을 뽑아들었다. 구름의 틈새로 엷은 햇살이 스며들어, 두 사람의 기묘한 대치를 비추었다.

간신히 일어섰지만 검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든 듯, 아이의 검끝은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단테의 검끝은 너무나 가지런했다.

먼저 달려든 것은 아이였다. 세 번 검을 부딪히기도 전에 승부는 났다. 신기가 가물거리는 유혼을 손으로 잡아 뺏고, 그 뻥 뚫린 가슴에 주먹을 찔러넣은 것이었다.

피가 또 잔뜩 튀어나와 재로 가득한 바닥을 적셨다. 피를 빨아들인 재는 검게 물들었다. 아이는 검을 놓치고 저 멀리로 굴러서, 석제 기둥에 몸을 부딪혔다.

이번에야말로 끝이겠지. 아무리 멍청이라도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그러나 단테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않아."

아이였다. 배와 어깨로 피를 잔뜩 흘리면서, 돌기둥에 겨드랑이를 기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면서, 소리지르고 있었다. 신음과 바람소리에 파묻혀 그 소리는 온전히 들리지 않았다. 완전히 일어난 아이는, 색유리로 만든 듯한 뭉툭한 검을 꺼내곤 소리질렀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미친 놈.

멍청한 놈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손에 든 것은 클라우솔리스. 알고 있었다. 율사를 베기 위해 자신이 만든 검이었다.

지금 싸움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검이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검이 저것 뿐이기에 억지로 꺼낸 것 같았다.

그야말로 억지였다. 또 두 사람은 부딪혔고, 불보듯 뻔하게 승부는 났다. 다시금 날아든 금우궁은 클라우솔리스의 검날을 무자비하게 깨부쉈고, 나아가 아이의 오른팔에까지 덮쳐들었다. 스하악,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금우궁은 아이의 오른팔을 상박까지 깔끔하게 토막쳤다. 팔을 잃은 아이의 몸뚱이는 부서진 유리조각 위로 허물어졌다.

미친 자식, 얼간이, 멍청한 놈...

할 수 있는 모든 욕지기를 쏟아부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인간의 행동 원리가, 삼라만상의 원리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망가질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몸으로도, 그것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입이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만두라고.

"커헉."

쓰러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피는 몸 안에 있는 것보다 몸 밖에 있는 게 많을 정도로 흘렸고, 심장엔 구멍이 뚫렸으며, 팔마저 한 쪽 잃었다.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설 수 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아닐 터였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일어서고 말았다. 망가진 검의 자루를 보검이라도 되는 양 움켜쥐고, 두 다리로 서서, 멀어져가는 단테의 뒷모습에 크게 소리질렀다.

"나는 당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아!"

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도 석양은 저물었다. 우연히 드러난 구름의 틈새로, 마지막 햇살이 쏟아져 두 사람을 황금빛으로 적셔갔다. 뒤돌아선 단테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쩐지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의미 없을 거라고 말했는데도,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

단테와 마주보는 아이의 얼굴은 피와 오물로 얼룩져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그러나 색을 잃지 않은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눈이었다. 그 두 눈은, 여전히 당차기 그지없었다.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질리도록 보았다.

또, 알고 있었다.

이런 눈을 한 사람은, 자신이 정한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해 줄 수 있는 것은.

챙!

검이 부딪는 소리가 석양이 내리쬐는 언덕 가득 퍼져갔다. 아이가 금우궁을 막아낸 것이었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새까만 빛으로 뒤덮인 팔이 자라나 있었다.

'뭐 해, 얼간아. 넋 빼고 있을 시간이 있나?'

선주였다. 선주의 목소리였다. 보다 못한 선주가, 탑에 들어서기 전에 계약했던 대로 오른팔 분량의 혼을 받아가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힘을 빌려주기 위해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선주의 오른팔은 검을 불러내어 후려쳤다. 깔끔하게 복구된 레바테인이었다.

"윽."

단테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서렸다. 갑자기 팔을 되찾은 아이가, 이제껏 없었던 맹렬한 검격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거꾸로 힘에서 밀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검을 부딪을 때마다, 금우궁을 거무튀튀하게 물들였던 무언가가 부서져나갔고 검날은 크게 울어댔다.

큰 호를 그리며, 왼쪽 위에서 레바테인이 쏟아졌다. 피로에 지친 몸은 따라가지 못했다. 레바테인은 흉하게 자라난 사슬과 흉갑을 쳐부수며 긴 상처를 남기고 빠져나왔다.

입안 가득 역류하는 핏물을 삼키고, 단테는 옆으로 주춤대며 물러섰다. 하지만 아이의 공세는 끝날 줄을 몰랐다.

빙글 돌아 대검을 어깨 위로 쳐들고 또다시 덮쳐왔다. 간신히 쳐냈지만, 왼쪽 허리가 찢어졌다. 피로와 고통이 온 몸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을 저 녀석은, 지친 기색도 없이...

"아."

털썩, 단테는 무릎을 꿇었다. 그 뒤편에서, 아이는 레바테인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온 힘을 다해 단테의 옆구리를 베어내고,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서 일어나서 다음 공격을 준비해야 할 텐데, 한계까지 혹사한 몸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때였다.

"나는 당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나."

뒤에서 단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검을 움켜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단테도 자신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웅크려 검에 몸을 의탁한 채, 무언가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 자가 말했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너도, 속으로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느냐고. 죄의 대가로 소멸하고 싶다는 것은 변명일 뿐, 실제로는 스스로를 포기해버린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인간의 약함이라고. 하지만,"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단테의 몸이, 그 끝에서부터 재로 변해 흩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방금의 일격이 단테를 이루던 핵을 끊어놓은 것 같았다. 아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단테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단테의 몸은 눈처럼 녹아 스러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도 구원받을 수 있는 법이구나."

사라지고 있는 단테의 목에는, 그 검은 혈관의 침식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 얼굴에는, 처음 보는 표정이 걸려 있었다. 은은한 미소였다. 멍하니 서 있는 아이에게, 단테는 금우궁을 건네주었다. 아이는 조심스레 금우궁을 받아들고, 천갈궁의 위에 포갰다. 둘은 마치 원래 하나의 검이었던 것처럼 합쳐졌다.

"고맙다, 친우여."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그 시덥잖은 말을 끝으로, 단테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 재로 가득한 환상의 세계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와 동시였다.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 같았던 구름이 걷히고, 재로 가득한 세계가 녹아내리며 모든 것은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건네받은 검을 두 손으로 받친 채로, 아이는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게 개어가며, 색깔을 되찾는 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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