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행복 ( 1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아침이었다.
햇살이 유리창을 넘어 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온갖 문서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상에 엎드려 잠자던 륜은, 눈꺼풀을 움찔거리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에 반쯤 뜬 눈을 껌뻑거리는 그녀의 뺨에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밤을 새서 무언가를 끄적거리다 그대로 쓰러져 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두리번거리던 륜의 눈길이 시계로 향했다.
"9시."
면회가 곧 시작될 시간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륜은 재빨리 몸단장을 하고, 실내복에 얇은 숄 하나만 두른 채로 별채를 빠져나왔다.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지간히 힘든 싸움이었던 것인지,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이는 아직까지도 잠든 채 깨어나지 못했다.
륜은 옆에서 머무르며 간호하려 했지만 안정이 필요하다며 쫓겨나고 말았다. 그 날부터 3일째, 병문안이 가능한 시간이 되면 륜은 늘 이렇게 뛰쳐나갔다.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륜의 덜 마른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품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서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오늘도 오셨군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리원은 륜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소 운동 부족인 주제에 급하게 달려온 탓에 륜은 무릎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장거리 달리기라도 한 것으로 오해할 법한 모습이었다.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륜에게 물을 한 컵 가져다주고, 관리원은 낭보를 전했다.
"오늘 중에는 깨어날 것 같다는 진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들어가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신없이 물을 마시던 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기서 한나절은 앉아 있어야 잠깐 자는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었는데, 하루 사이에 상태가 많이 호전된 모양이었다.
"정말인가요?"
"예. 사실, 이미 부인께서 방문하기 전에 선객도..."
그러나 관리인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미 륜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뺨에는 생기가 넘쳤다. 방금 전까지 지쳐서 헥헥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륜은 나선의 목제 계단을 재빨리 달려 벌컥 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방 안에서 전혀 예상 외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여기서, 어떻게?"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아이의 가슴팍에, 의외의 인물이 단검을 꽂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레고르였다. 륜은 바구니도 떨어뜨리고 달려들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멈춰요!"
"소란피우지 마라. 별 일 아니니까."
나름대로 결사적으로 제지하려 달려든 것이었지만, 레고르는 귀찮다는 듯 륜의 머리를 붙잡아 멈추었다.
"어떻게 이런 비열한 암살 시도를...!"
"그런 게 아니라니까."
레고르가 에페 바체였던 시절, 두 사람은 여러 이유로 얼굴을 부딪힐 때가 있었다. 어쨌든 같은 용병단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마다 레고르는 륜의 신경을 긁어 놓고는 했었다.
"여전히 헛똑똑이구나."
"당신이야말로 여전히 음침하네요."
지지 않고 맞받자 레고르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댔다. 옛날에 보았던 륜과는 반응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옛날의 륜은 이런 도발을 들어도, 죽은 눈으로 무감정하게 흘려보낼 뿐이었다. 지금처럼 달려드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륜은 똑바로 레고르를 바라보며 엄포를 놓았다.
"빨리 그걸 내려놓고 물러서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거에요."
"봐라."
레고르는 헛웃음을 터뜨리곤, 단검을 다시금 크게 휘둘렀다. 단검은 무방비하게 잠든 아이의 옆구리로 쏟아져내렸다. 하얗게 질린 륜이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였다. 턱, 아이의 오른손이 움직여 단검을 쳐냈다.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냥 시험을 좀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몇 번 더 단검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독립적인 자아라도 가지고 있는 듯, 아이의 오른팔은 유려하게 움직어 단검을 계속 쳐냈고, 마지막엔 빼앗아 던지기까지 했다. 단검을 빼앗겨 빈 손이 된 레고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륜은 당혹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용무는 끝났다는 듯, 휙 뒤돌아서며 레고르는 말했다.
"다 나은 것 같군. 병문안 선물이다. 이제 슬슬 일어나라고 해라."
그리고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물어서 빼내고는, 쓰레기를 버리듯 담뱃갑을 륜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륜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에는 세 개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요? 환자한테?"
"특주품이다. 갓난아기가 피어도 문제없는 놈이야."
더 말하기 싫다는 듯, 레고르는 이미 문지방을 밟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 어느새 레고르의 새까만 머리카락은 등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라나 있었다. 그 뒤통수에 예상 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참 고맙군요."
륜은 홱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방금 소란으로 깨어난 듯, 찌푸린 얼굴로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아이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뚝 멈춰선 레고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돌려 흘깃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아이의 품에 와락 달려드는 륜의 모습이 있었다. 정말 많이 변했군. 레고르는 중얼거리곤 방을 나섰다.
이번에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
그리고 그건 서로에게 다행인 일일지도 몰랐다.
그대로 남아 있었다간, 나중에 굉장히 난감한 얼굴로 마주쳤을 것이다. 막 일어난 아이의 품을 꽉 끌어안고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던 륜이 갑자기 맥락 없는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감동적이라기보단 좀 우습게 느껴지는 눈물이었다. 아이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나잇값도 못하고 눈물과 콧물에 젖어서 훌쩍거리는 륜의 얼굴은 그 정도로 걸작이었다.
"왜, 왜 웃고 그래요."
"웃기니까요."
토라진 듯 고개를 치켜들자, 물에 적신 수건이 륜의 얼굴을 덮쳤다. 아이가 얼굴을 억지로 닦아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애완동물처럼 버둥거리며 세안을 마친 륜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래서야 누가 병자고 누가 병문안을 온 건지 분간이 안 돼. 그렇게 생각한 륜은 얼른 바구니에서 준비해온 것을 꺼냈다. 거기에는 사과와 과도가 들어가 있었다.
"배고프죠? 누워 있어요. 과일을 좀 준비해왔으니까, 잘라서 먹여 줄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누워 있어요."
단호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는 침대에 누웠다. 륜은 그 옆에 걸터앉아서 사과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그다지 능숙한 솜씨는 아니었다. 손을 벨까 옆에서 보기 무서울 정도였다. 보다못한 아이가 손을 내뻗었다.
"제가 할게요. 주세요."
"안 돼요. 오늘은 그냥 누워 있어요!"
그리곤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과를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 하는 수 없이, 아이는 다시 이불을 덮고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꼼지락거린 끝에, 마침내 륜은 사과를 다 잘라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사과 하나를 콕 찍어 아이의 입으로 가져갔다.
어설픈 토끼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다 베어물자, 아삭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와 동시에 다음 사과 조각이 입술에 부딪혔다. 륜이 곧바로 다음 것을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한동안 아기새처럼 륜이 먹여주는 사과를 잠자코 먹고만 있었다.
"오른팔은 괜찮은가요?"
그리고 갑자기 이런 질문을 꺼내왔다. 아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흘긋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멀쩡한 것처럼 존재하고 있지만, 아까부터 오른팔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선주와 계약한 대가인 것 같았다. 혹시, 그걸 눈치챈 건가? 사과를 씹으며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륜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오른팔을 제일 심하게 다쳤다고 들었거든요. 아까 잘 움직이는 걸 보니까, 괜한 걱정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륜의 어조는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선주와의 계약을 눈치챈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럼, 끝까지 숨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달라질 것도 없는데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사과를 삼키고 어물어물 대답했다.
"걱정한 것보다는 훨씬 괜찮네요."
"그렇군요. 다행이다. 해내서 정말 다행이에요."
륜은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기쁜 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바구니에 들어 있던 무언가를 집어들고 돌아왔다.
"그 동안 저도 놀고만 있진 않았어요. 돌아오면 건네주려고 며칠이나 밤을 새서 준비한 게 있어요!"
아이 옆에 걸터앉은 륜은 주섬주섬 그것을 펼쳐보였다. 그건 서류였다. 읽는 사람이 편하도록, 엄청나게 공을 들인 티가 나는 서류. 내용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구조도에요. 길 아잘록이 들어앉은 알집의 구조도. 당신이 떠난 동안, 이 곳에 남아 있던 모두의 힘을 빌려서 자료를 모아 완성했어요."
아이는 그 문서를 집어들고 천천히 읽어나갔다. 정말로 정성을 많이 들인 티가 나는 문서였다. 글자 하나하나를 공들여 쓴 듯 오자 하나가 없었고, 예상되는 적과 추정 근거, 알집 내부의 구조 따위가 상세하면서도 알아보기 쉽게 적혀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런 문서를 만들어내려면, 정말로 몸을 갈아 넣었어야 했으리라.
"당신이 잠자는 동안, 승리 소식을 전해들은 구원군이 각지에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모두 아이 씨를 믿고, 따르려고 찾아온 사람들이에요."
"아..."
쓰러져 잠을 자던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륜은 다가와 아이의 왼손을 붙잡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미 모두 준비를 마쳤고, 모두 당신이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씨가 깨어난 다음 날에 출정할 거라고 들었어요. 이제 남은 적은 단 하나뿐이에요. 군대를 이끌고, 저 알집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자를 무찔러주세요. 꼭, 꼭 성공하기를 기원할게요."
그리곤, 잘 했다고 쓰다듬어 달라는 듯, 머리를 가슴에 기대왔다. 옛날에도 종종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스한 온기가 가슴에 전해져왔다. 아이는 손을 내뻗어 쓰다듬으려 했다. 왼손은 붙잡혀 있었으므로 오른손을 써야 했다. 하지만,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는 속으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선주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일어나 있다면, 조금 분위기를 맞춰 주세요.'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제 선주와 한 몸에 동거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분명히 선주의 의식이 느껴지는데도, 그는 못 들은 척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왼손을 빼서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때였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어 무안해졌는지, 륜이 먼저 벌떡 일어나 버렸다.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 좀 더 쉬세요! 누워서!"
횡설수설하듯 말하고 얼른 침대 위를 벗어나려다가, 헛발질을 크게 해서 바닥에 굴러 버렸다. 놀란 아이가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내뻗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오른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얼굴을 찧은 륜은 코를 감싸쥐며 일어났다. 그리곤 괜찮냐는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바구니도 남긴 채 달아나버렸다. 어지간히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쾅! 문이 닫히며 바람이 일어 아이의 앞머리가 나풀거렸다. 륜이 완전히 떠나고 난 뒤, 아이는 책망하듯 물었다.
"왜 이러는 거에요?"
'뭐가 말이냐.'
륜이 사라지자, 선주는 그제서야 뻔뻔하게 대답을 해왔다.
'네 어깻죽지부터 오른손 끝까지, 그 신체의 통제권은 내가 정당하게 얻어낸 내 소유물이자 권리다. 도무지 이해 안가는 네놈의 계집질에 어울려줘야 하는 부칙이라도 있었나?'
뭔가 심기가 단단히 뒤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오른팔은 멋대로 움직여 이불 위를 더듬었다. 아이는 금세 그 팔이 뭘 노리는 지 알 수 있었다. 아까 레고르가 놓고 간 담뱃갑을 찾는 모양이었다. 휙 담뱃갑을 채어들고, 아이는 말을 계속했다.
"왜 또 심술이 난 거에요."
'심술이 아니야.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보다 빨리 그 담배나 빨리 한 대 태워.'
"무슨 중독자인가요?"
'멍청한 놈. 초보라서 모르는군. 그건 카나기의 영산에서만 자라는 연초로 만든 놈이다. 천 년 전에도 쉽게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어. 그런 게 손에 들어왔는데 사과나 씹고 있을 셈이냐.'
아무래도 특주품이라는 레고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담뱃갑은 일회용이라기에는 너무 화려했다. 푸른 청옥과 황금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세 개밖에 없는 개비중 한 개비를 집어들고, 아이는 협상을 시작했다.
"좋아요. 대신, 왜 그렇게 심술이 났는지 들려주세요."
'심술이 아니라니까. 정상적인 반응이야. 저 여자는 대체 무슨 괴물이냐?'
이 정도면 긍정이라는 것을 이제 아이는 알고 있었다. 싫었다면, 욕설이 튀어나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창문 쪽으로 돌아앉아서, 아침 바람을 맞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확실히 특주품은 달랐다. 살짝 달큰하면서도, 어딘가 인삼이나 감초 같은 약재의 풍미가 느껴지는 연기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입으로 새어나오는 연기는 먹처럼 짙은 검은빛이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향하는 연기를 응시하며, 아이는 다시 물었다.
"괴물이라구요?"
'네 오른팔과 함께, 네 삶에서 1년 분량의 혼을 받아간 걸 기억하고 있겠지. 그 기억 중에, 저 여자와의 첫만남도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륜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말대로였다. 마치 잘라낸 것처럼, 그 날 있었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당혹한 표정을 짓는 아이의 귓바퀴에, 선주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난 그날 너희들이 나눈 대화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