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45화 (245/279)

42. 행복 ( 2 )

잠시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담뱃불이 종이를 사르는 소리만이 낮게 타닥일 뿐이었다. 창문 너머로 쏟아진 아침 햇살이 아이의 단단한 등 위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아이는 가만히 선주의 말을 기다렸다.

'나였으면 그 순간 목을 벴을 거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저 여자는 스스로를 자애의 외신이자 모략의 신이라고 소개했지. 이 세계를 지켜내자는 사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아이는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만날 때의 기억은 이미 선주에게 넘어갔지만, 추후에 나눈 대화들은 아직 머릿속에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지킨다면 무엇으로부터 지킨다는 것이고, 지킨다는 세계는 또 무엇이란 말이냐. 저런 엉성한 문장을 경구로 삼았으니 저 꼴이다.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라곤 악에 받친 각오밖에 남지 않아서 하고 많은 개념중 모략을 대표하게 된 것일 테고, 신이 아니라 외신으로 전락한 것이겠지.'

"굉장히 잘 아시네요."

'시끄럽다. 비꼬려고 했으면 실패야. 그러니 결국 진짜 위기가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도 진짜 멸망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는 일이라곤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밖에 없지 않았나.'

"지금 절 걱정해주는 건가요?"

바람이 불어 담배연기와 아이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선주는 과장되게 혀를 차곤 다시 말했다.`

'걱정이 아니야. 한심해서 그렇다. 방금도 말이다, 저 여자가 한 짓을 봐라. 네가 일어나자마자 또 사지로 밀어넣으면서 해맑은 웃음이나 짓고 자빠졌지 않나. 너는 저 여자의 약혼자 아닌가? 세상천지 어떤 약혼자가 반려를 사지에 밀어넣으면서 웃는단 말이냐?'

"그건..."

처음으로 아이가 말꼬리를 흐렸다. 선주는 말을 계속했다.

'아마도 저 여자가 지켜야 할 세계에 너는 포함되어 있지 않겠지. 방금 기뻐한 것도 네 생환이 기쁜 것이 아니라, 도구가 망가지지 않은 걸 기뻐한 걸 테다.'

"아니에요."

'응?'

아이는 분명하게 부정했다. 담배는 어느새 입술 근처까지 타올라 있었다. 폐부를 달큰하게 그슬리는 연기를 뱉어내고, 재떨이에 재를 털어낸 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을 알려주면, 저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준비한 것 뿐이에요."

'왜?'

"그러기로 계약했으니까요."

아마빛 셔츠의 흑단 단추를 잠그면서, 아이는 유리관에 새긴 약속을 들려주었다. 최소의 희생으로 세계를 구하자는 내용의 서약, 그건 선주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서로보다 그걸 더 우선하자고 약속했으니까. 약속에 충실한 것 뿐이에요. 오히려 그래주지 않았으면 실망했을 걸요."

단추를 모두 잠그고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을 때까지도 선주는 대답이 없었다.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묶을 때, 선주는 툭 말을 꺼내왔다.

'그럼 너도 이해가 안 간다.'

"왜요?"

'왜 그런 계약에 동의한 거냐?'

이번엔 화살이 아이에게 돌아간 모양이었다.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아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주는 당혹스러운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이 세계는 너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지 않았나. 태어난 순간부터 쭉, 너한테 가혹하게 굴기만 했던 이 저주받은 세계를 왜 하필 네가 목숨바쳐 지켜야 한다는 소리냐? 양심이 있다면, 누구도 너한테 그런 책임을 지울 수는 없을 텐데.'

"좋은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이 세계에 그럴 가치가 있다고?'

"충분히 가치있어요."

문제가 생겼다. 오른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마지막 머리끈을 조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잠깐 멍하니 당황하고 있을 때, 오른팔이 멋대로 움직여 끈을 매어주었다. 선주가 한 일이었다.

'허, 참. 아무튼 충고하지. 저 여자를 조심해라. 네 인생은 저 여자 때문에 망가진 거야.'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여자 보는 눈이 뛰어난 당신의 충고니까."

이번에는 비꼬는 데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정곡을 찔린 듯 선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아이는 서랍장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천갈궁, 이제는 금우궁과 하나로 합쳐진 베루스의 유해였다. 스릉, 칼날은 서늘한 소리로 묵빛의 검집에서 빠져나와 시린 빛을 뿌려댔다.

손잡이를 세게 쥐어잡았다. 불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검날에 뒤섞인 금우궁도 아이를 주인으로 인정한 모양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검날의 내음을 빨아들였다. 맑은 쇳내가 났다. 콧등에 서늘한 칼날을 대고, 눈을 감은 채로, 아이는 잠시 단테의 표정을 떠올렸다.

"가죠.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해요."

턱, 허리춤에 검을 밀어넣고, 아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딜?'

"부상을 입은 게 저 혼자는 아니니까요. 상태를 확인하러 가야죠."

다나가 잠자고 있을 병실을 향해서였다.

*

그러나 마주한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어?"

관리인에게 좀 더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계단을 내려온 아이는, 어딘가 익숙한 금발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널따란 어깨와 붉은 옷은,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그 사람은 휙 뒤돌아섰다. 그 입에는 기다란 사탕이 담배처럼 물려 있었다.

"오랜만이다."

그건 마레였다. 학술원에 돌아가기 위해서 치렁치렁하던 머리를 짧게 쳐냈지만, 나머지는 옛날의 그 모습과 똑같았다. 아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마레는 다가와서 살갑게 인사했다. 어깨가 부딪히며 툭 소리가 났다.

"많이 아프다고 해서 우선 네 병문안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당신, 여기에, 왜..."

"함께 싸우러 왔지."

그리고 마레는 군령장을 보여주었다. 구원군을 위해 복무하겠다는 증서의 끝에, 마레의 이름이 선명하게 서명되어 있었다.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합류한 증거였다. 멍하니 증서를 들여다보는 아이의 머리를 매만지며, 마레는 씨익 웃고 말했다.

"친구가 전장의 선봉에 선다는데, 혼자 안전한 책상에 있을 수는 없어서 말이야.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왔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대하지 않은 방문이었지만 너무나 반가웠다. 아이는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마레의 손을 굳세게 붙잡고, 마주 웃었다. 스스로 놀랐다. 이렇게 그늘 없이 활짝 웃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둥근 채광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씩 웃는 마레의 이 위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그 때였다.

"저도 왔어요!"

발랄한 목소리가 가슴께 아래에서 들려왔다. 내려다보니, 밝은 인상의 꼬마 하나가 마레의 옷소매를 붙잡은 채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꼬마는, 당연히 아이가 자신을 알 거라는 듯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천사의 집 아이들의 대표로 왔어요!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그러니까...어..."

아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투인데, 정말로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꼬마도 그 어색함을 눈치채고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쯤이었다.

'엘레나다.'

선주가 보다 못해 말하는 투로 들려주었다. 이 꼬마와 관련된 기억이, 선주에게 흘러들어가서 기억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저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운영하는 고아원의 꼬마다. 너랑 인사한 적이 있었어. 그게 끝이다.'

"엘레나. 고마워."

"제 이름, 기억하고 계셨군요!"

불안한 기색이던 엘레나는 다시 활짝 웃었다. 아이는 애써 웃으면서,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아이들은 빨리 크는군. 예전에 봤던 때보다 두 뼘은 자랐어.'

"많이 컸구나. 이만큼은 자랐는데?"

선주의 말을 듣고 아이는 황급히 덧붙였다. 엘레나는 수줍게 웃으며 다시 마레의 옷자락 뒤로 얼굴을 숨겼다. 그 뒤로, 세 사람은 널따란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였다. 아이도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마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학술원에서 전후 복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망가진 규율도 너무 많아서, 전쟁의 뒤편에선 또 그들 나름의 전쟁을 시작할 태세였지. 그래서 이 때를 틈타 구상만 하던 시범적인 자치조직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는데, 성인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에 시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성과를..."

마레는 열띤 어조로 말했다. 내용은 어려워서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희망에 찬 목소리였다. 이것 역시 요 몇달간, 아이 주변에선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서, 아이는 그저 음악을 듣듯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발을 살랑살랑 흔들던 엘레나가 크게 하품을 했다. 어린아이는 견디기 힘든 지루함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낮잠 잘 시간이구나."

"흐아암, 아니에요. 오빠랑 계속 얘기하세요."

기색을 눈치챈 마레가 엘레나를 데리고 일어서려 하자, 엘레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마레는 일어서서 엘레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가 봐야겠다. 지금처럼 계속 삼나무처럼 자라려면, 낮잠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 말이야."

자주 있던 일인듯 마레는 자연스럽게 엘레나를 들쳐 업었다. 심문관의 법의를 입고, 학승처럼 머리를 깎고, 여자아이를 업은 모습은 하나하나가 부조화스러워서, 아이는 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레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냐, 웃긴 거냐? 너도 아빠 비스무리한 게 되보면 알게 될 걸."

"아니, 보기 좋아서요."

그리고 인사했다. 아마도 내일 다시 만날 것이므로, 긴 인사는 필요 없었다. 아침 햇살이 쏟아져들어오는 문으로 걸어나가는 마레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마레는 멈춰서서 휙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내일 이길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요?"

"어?"

"전후 복구도, 그 아이의 키도, 내일 이겨야만 의미가 있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건가요."

마레는 잠시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더니,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야 너를 믿으니까."

"아..."

"잘 부탁한다. 우리의 새로운 왕."

그 말을 남기고, 마레는 휘적휘적 걸어나가버렸다. 아이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이제 면회 가능 시간입니다!"

다나가 쉬고 있을 병실 쪽에서부터 들려온 소리였다. 아이는 황급히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계단 위에선 긴장된 표정의 율사가 떨면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 아이를 다나가 묵고 있는 병실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병실은 깊숙한 곳에 있었다. 안정을 위해서 일부러 외따로 떨어지고, 큰 방으로 고른 모양이었다. 마침내 떡갈나무 문 앞에 도달한 아이가 문을 두드리려고 할 때였다.

"윽, 으윽, 흐으윽..."

"빨리! 빨리 전위 치료가 가능한 사람을 불러와!"

다나의 것이 분명한 신음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문이 열렸다. 황망한 얼굴의 치료사가 튀어나와선 얼떨떨한 표정의 아이도 무시하고, 빠르게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사람을 부르러 가는 것 같았다. 한바탕 난장판이었다. 연이어 신음 소리와 함께 어떤 마술이 펼쳐지는 소리, 수혈액이 짤랑대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어지럽게 들려왔다.

아이의 안색은 넋을 잃은 듯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아이를 이 곳까지 인도한 율사는, 먼저 방 안에 들어가 상황을 파악하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나타나 이런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새 성녀님의 용태가 갑자기 변해서, 면회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전해달라는군요."

"그렇게, 안 좋은가요? 상태가?"

"아뇨. 일단, 확실하게 생명의 위기는 벗어났습니다만..."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율사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말꼬리를 흐렸다. 떨리는 입술도, 눈꺼풀도, 하얗게 질린 얼굴도, 하나같이 너무나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입술을 우물거리던 율사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소리쳤다.

"저녁에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그 때까진 안정을 찾을 겁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아이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나갔다. 뒤뜰을 향해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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