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46화 (246/279)

42. 행복 ( 3 )

뒤뜰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상아빛의 분수와 새하얀 동상, 담쟁이와 밝은 갈색의 의자가 어우러져 따뜻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세심하게 손질한 관목림은 거품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화단 가득 뻗어나갔다. 아이는 유령처럼 비틀거리며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뒤뜰 한중간에 섰고, 털썩 주저앉았다. 뺨을 매만졌다. 손은 놀랄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괜찮나?'

마음 속에서 울리는 선주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는 멍하니 앞을 쳐다보았다. 아름답게 조각한 라달라리아의 동상이 맑은 분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당장 어제, 어쩌면 오늘 아침에 공들여 다듬은 듯, 물이끼를 걷어내고 도료를 바른 티가 역력했다. 과장되게 조각된 입술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는 문득 말했다.

"내일 싸움, 힘들겠죠."

선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는 턱을 괴고 재차 말했다.

"얼마나 힘들까요."

'글쎄, 어제보단 몇 배는 힘들 거다. 어쩌면 네 혼을 전부 받아가야 할 지도 모르겠군.'

성격대로, 선주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아이는 동상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엘레나라는 아이가 생각이 안 나요. 이렇게 깔끔하게 지워지는 거였군요."

'그래. 무섭나? 그럼 최대한 절약하도록.'

"만약, 싸우는 도중 제가 힘이 부쳐서... 혼을 전부 넘기면, 당신이 제 기억을 전부 가져가고... 저 대신 살아가는 건가요."

'뭐야, 너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 아니었나?'

놀리듯 말했지만 아이의 반응은 여전히 심각했다. 선주는 곧 아이가 무엇을 염려하는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혹시라도 선주가 몸을 전부 차지하면, 그때 승강기에서 했던 말처럼, 다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나가 방금 흘린 신음은 선주도 똑똑히 들었다. 그 다음부터 죽 하얗게 질린 아이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옆얼굴을 응시하던 선주는, 해본 적 없는 일에 도전하기로 했다.

'화났나?'

"아니오."

'미안하다.'

사과였다. 솔직한 사과. 아이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오른팔을 쳐다보았다. 선주는 말을 계속했다.

'네 여자에게 손대서 미안하다. 한심하게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쓸데없는 데 손을 썼다.'

"당신도 사과를 할 줄 아는군요?"

겸연쩍었는지, 선주는 어딘가 어색한 코웃음으로 대답했다. 아이는 주섬주섬 품을 뒤져 담배를 꺼냈다. 아까 레고르가 병문안 선물이라고 던져준 담배였다. 갑 안에는 두 개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한 개비를 집어들어 물고, 아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도움도 받았으니까."

순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깜깜한 목구멍을 타고 몸 속 깊이 흘러들어간 연기는 부드럽게 폐에 스몄다가, 코를 간질이며 새어나왔다.

여전히 시선은 여신상에 고정된 채였다. 이토록 가지런하게 정돈된 뒤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우스웠다. 내일 이 세상의 명운을 건 싸움이 있는데도, 패배하면 모두 먼지로 돌아가는데도, 이름 모를 정원사는 이 뒤뜰을 가꾸었고 자신은 그것을 망칠까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세상이라는 말의 무게는 성실한 정원사 하나 잡아채지 못했다. 어쩌면 세계라는 건 덧없는 허깨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 말 하나 들어주지 않겠나.'

또 선주답지 않은 말을 걸어왔다. 아이는 입안 가득 고인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탑에서 보았던 마지막 환상 말인데, 결국 결론은 내렸다. 그게 완전히 거짓을 비춰 보여준 건 아닐 거라는 결론 말이다.'

"그런가요."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어.'

선주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아이는 검지와 중지로 개비를 조이며 경청했다.

"어떤 부분이요?"

'저게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 왜 목숨을 던져서 그런 보잘것없는 계약을 성사시켰을까.'

아이는 맥이 살짝 풀리는 것을 느꼈다. 첫 마디를 듣고 선주가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너무나 깊고 어두웠다.

'그래서 가설을 하나 만들어봤다.'

"무슨 가설인가요."

'처음부터 블뢰유는 그 세 주신도 세계의 존속에 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와 싸울때, 나를 죽이지 않고 잊혀지게만 해야 한다는 제약을 걸어서, 싸움의 균형을 맞추려고 들었던 게 아닐까. 결국 그 덕분에 양패구상이라도 했으니 말이다. 마지막까지 날 최대한 활용한 거지.'

가능한 이야기였다. 비꼬아진 시선으로 본다면,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어쩐지 화가 났다. 뜨거운 연기를 토해내며, 아이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모든 걸 보고 당신이 내린 결론이에요? 그게요?"

'화를 낼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가?'

"왜 자꾸 그렇게 멀리 돌아가는 건데요? 그럼 당신은 왜 그 왕이란 놈을 죽였는데요?"

'그거야, 그냥 꼴보기 싫어서'

"나는 왜 도와줬는데요?"

'한심해서.'

"그럼 그 사람도 당신이 꼴보기 싫고 한심했나 보죠."

선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려고 했던 것은 전해진 것 같았다. 오른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 여신상의 그림자가 방향을 바꾸어 길게 늘어질 때가 되었을 때, 선주는 툭 말했다.

'그런가.'

그리고 아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달아 이렇게 말하곤 사라졌다.

'피곤하군. 돌아가 쉬겠다. 혹시 내 험담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지금 마음껏 해 둬라.'

그 말을 끝으로 선주의 기운은 몸 속 깊이 침잠해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먼 바람이 불어 아이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담배는 거의 끝까지 타올라 있었다. 마지막 연기를 토해내고, 꽁초를 비벼 끈 아이는 문득 분수를 바라보았다.

분수 한 가운데 선 동상은 여전히 말끔한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충동이 돋았다.

이 이상한 질서에 심술을 부려보고 싶은 충동이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분수대에 꽁초를 던져넣었다. 속불꽃이 남아 있었던지, 물에 퐁 빠진 꽁초는 치이익 소리를 내며 연기를 흩뿌렸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허허, 통령도 그런 짓을 하는구만."

그 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얼굴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건 아우렐리우스였다.

"나한테 금화 두 닢 빚졌어."

"그 말씀은..."

"범칙금이 금화 두 닢이거든."

실없는 농담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아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통령과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이 늙은이에게 시간 좀 내주지 않겠나."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통령의 뒤를 따라서, 아이는 아탕칼리를 위해 마련된 깊은 별채로 걸어들어갔다.

*

응접실의 벽난로에선 이미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따뜻한 식사며 다과가 준비되어 있고 곳곳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데도,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을 시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 후 모두 몰아낸 모양이었다. 보안을 위한 조치일 터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직접 커피를 따라 내주었다. 흰 잔에 들어찬 커피는 밝은 계피색을 띄고 있었다. 아이는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앉아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네. 그냥 인사나 좀 전하러 왔을 뿐이니."

기품 있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아우렐리우스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일 있을 전투에는 나도 함께할 생각일세."

"예?"

놀란 아이의 눈 앞에 아까 보았던 것과 비슷한 군령장이 들이밀어졌다. 아우렐리우스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마레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전쟁에 합류했다는 증거였다. 군령장을 내려놓고, 아우렐리우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주교들은 말렸지만, 이런 일에 힘 가진 이들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선단 말인가. 억지를 좀 부렸지."

"훌,륭하십니다."

"무얼. 더 훌륭한 사람도 있지 않나."

자신에 대한 공치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는 눈치였다.

"내 양자가 오늘 아침에 찾아갔을 텐데, 인사는 나누었나?"

"마레 수사 말씀이신가요?"

"허허,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필요 없네. 통령과 내 양자가 허물없는 사이라는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 말이야."

아우렐리우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했다.

"아마도 역사의 가장 빛나는 페이지에서 찬사를 들을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훌륭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건 나보다도 내 양자와 같은 사람들 아닌가. 통령도 들었겠지. 그 동안 그 아이가 했던 일을."

마레가 자신의 학문으로 어지러운 후방을 안정시킨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동의할만한 말이었지만, 아이는 침묵했다.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아우렐리우스의 기색이 어딘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과장되게 동의를 얻으려는 듯한 기색이 들뜸을 가장하는 표정 아래에 깔려 있었다. 아이가 침묵하자, 아우렐리우스는 사람 좋게 들리는 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이거 실수했군. 느지막히 얻은 양자라 팔불출 짓을 좀 했다고 너그러이 봐주게."

"아뇨. 저도 동감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아이도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능숙한 화술이었다. 그 후로도 대화는 계속해서 아우렐리우스의 주도 하에 끌려나갔다.

중요하게 들리는 말도 있었고, 그럴듯한 말도 있었고, 유쾌한 말도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준비된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계속 그랬다. 오히려 마레에 대해서 말할 때 남긴 어색한 여운만이 귓 속에서 맴돌았다.

"통령은 이 늙은이와 함께 있는 게 즐겁지 않은 모양이군?"

"예?"

당황스러운 말이 귀를 찔렀다. 아우렐리우스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아이의 잔에 커피를 가득 따라주며 인자하게 웃었다.

"이해해. 이 늙은이도 이런 형식적인 자리에 초대는 수백 번 받았지만, 한 번도 즐거운 적이 없었다네. 그런데 막상 내가 누군가를 북돋아주려고 하니, 이런 방법 말곤 생각나는 게 없더군. 미안하네."

"아니, 아닙니다."

아이가 당황하면서 부정했지만, 아우렐리우스는 여전히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좀 더 흥미있을 얘기를 해 볼까."

"어떤..."

"예를 들자면, 왜 내가 억지를 써서 자네를 왕으로 추대했는가, 같은."

놀란 표정으로 아우렐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건 나 개인으로서도, 아탕칼리의 성인으로서도 아니라, 어포슬의 수장으로서 결정한 일일세. 통령은 혹시 이 전쟁이 끝난 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아니오. 해본 적 없습니다. 지금은 단결해서 싸워야 할 때니까, 후의 이권 따위에 눈독을 들이면 안된다고, 분명히..."

"한 가지 알려주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네."

아우렐리우스는 벙찐 아이를 두고 계속 말했다.

"지난 천 년간, 제국을 유지하던 균형이 무너졌어. 계약은 종료되었고. 황제는 죽었지. 굳게 봉함되어 있던 운명이라는 상자의 문이 열렸단 말일세. 천 년간 일어나지 못한 변화가 한 시대 안에 모두 일어날 게야. 난세라는 이름으로. 어쩌면 그 난세는 이 전쟁보다도 더욱 잔인한 세월이 될지도 모르지."

"그런..."

"그 세월을 헤쳐나가려면, 이젠 허수아비 왕으로는 안 될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네. 살아 숨쉬는 권력이 필요할 게야. 그리고 그 책임을 짊어지는 데에는 통령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해서 무리하게 권했다네."

머리가 복잡해졌다. 예감하고 있던 것이지만, 지금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가 목숨을 바칠 만큼 아름다운 곳이냐는 선주의 비아냥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생각을 정돈할 틈도 없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그러니 내일 있을 싸움에서 꼭, 꼭 살아 돌아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 어포슬의 수장이자 아탕칼리의 성인으로서, 또 자네의 친우의 양아버지로서 하는 부탁이자, 명령일세."

"아..."

"자네 같은 사람은 잘 알고 있다네. 순교자들 중에서 자주 봤어. 기운을 북돋아 주는 건 이 늙은이로서는 힘든 일 같네만, 그렇다면 살아갈 이유라도 하나 더해 주고 싶군. 이게 자네를 부른 이유일세."

그리고 아우렐리우스는 어깨에서 손을 떼며,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 살아 돌아오겠다고, 이 늙은이에게 약속해줄 수 있겠나."

사뭇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순수하게 와닿지가 않았다. 또 선주의 말이 떠올랐다. 륜이 자신의 어리숙함을 파악하고, 책임을 씌워 이용하려고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주와 뒤섞인 영향일까. 아우렐리우스와 륜이 어쩐지 동류처럼 느껴졌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한참이나 밑을 내려다보았다. 커피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이는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약속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색을 굳혔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미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가를 쳐다보니, 벽면을 가득 메운 유리창 너머로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그 노인은 한참 전에 떠났단다, 어린 순례자야.'

림이 얼굴을 불쑥 내밀고 알려주었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고민의 시간이 상상 이상으로 길었고, 아우렐리우스는 기다리다 먼저 떠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거나.

"그래, 그랬구나."

허탈해진 아이는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서늘한 촉감이 이마 가득 번져왔다. 석양은 검푸른 산등성이 속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그리고 그 위에 겹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이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에 다시 방문하라고 했었지."

어느새 그런 시간이었다. 텅 빈 그릇을, 방을, 집을 뒤로 하고, 아이는 다나가 묵고 있는 병실을 향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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