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행복 ( 4 )
그러나 아이는 또 가로막혔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낮에 보았던 그 율사였다. 지금까지 쭉 기다린 듯, 텅 빈 방 한 가운데에 앉아 있던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런 말을 꺼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방은 어두웠다. 촛대 위의 촛불이 흔들리며 연한 주홍빛을 뿌릴 뿐이었다.
"저, 당부가 있었습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눈 앞까지 다가온 아이에게 율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촛불이 아이의 얼굴을 둥글게 비추었다. 그 표정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아이는 율사를 지나쳐 걸어갔다. 무시하고 다나의 방으로 찾아갈 셈인 것 같았다. 당황한 그녀는 옷소매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돌아본 아이의 눈빛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일개 율사가 견디기 힘든 위압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한 발 물러섰을 때, 아이는 이미 저만치 멀리 나아가 있었다.
낮에 들렀기 때문에, 다나의 방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 깊숙한 곳이었다. 목제 난간을 둘러친 좁은 복도를 따라서 아이는 한참 걸어나갔다. 그렇게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이는 잠시 멈춰섰다.
"응?"
다나의 방 앞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 그것도 여자가 틀림없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아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블뢰유, 그것도 천 년 전의 블뢰유가 애타게 방문을 두드리다가, 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무슨."
말을 걸기 위해 아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날카롭게 노려보던 블뢰유는, 갑자기 품에서 날붙이를 꺼내 달려들었다. 불의의 습격이었다. 피하지 못하고 가슴께를 깊게 찔린 아이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주춤거렸다. 아주 잠깐, 찌르는 듯한 흉통이 흉곽 전체에 번져왔다.
"윽."
그러나 신음을 뱉으며 자세를 바로잡았을 때, 블뢰유는 사라져 있었다. 아이는 얼떨떨한 채 가슴을 더듬었다. 칼 같은 건 박혀있지 않았고, 옷도 멀쩡했다. 귀신에 홀린 듯, 멍하니 텅 빈 복도를 바라보던 아이는 희게 바른 벽에 이마를 댔다. 서늘한 감촉이 이마 가득 번져왔다.
"헛것을 본 건가."
그것 외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정말로 지쳤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슴에 파고든 고통은, 환지통이라기엔 너무나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일이, 앞으로 자주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몰아내고, 아이는 문을 두드렸다.
"누구?"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다나의 목소리였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들렸다. 안도한 아이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내부는 정갈했다. 그 끝자락, 창가 옆의 침대에, 다나는 누워 있었다.
막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얇은 이불 위에 누운 다나는 눈을 감은 채, 어수선하게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얇아서 속이 비칠 것 같은, 레이스 달린 흰 잠옷을 입은 채였다. 아이는 문을 닫고 걸어들어와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저, 누구세요?"
다나는 불안한 듯 물었다. 창 밖에선 어느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각의 창문으로 들이친 달빛이 엷은 잠옷에 쏟아져서, 목어림부터 쇄골까지 이어진 푸른 멍을 비추었다. 그 날, 쇠사슬에 부딪히면서 생긴 것 같았다. 어쩐지 죄스러워진 아이는 조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에요."
"아."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당황한 듯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돌아누웠다. 다나의 등이 아이의 시선 가득 들어왔다. 등에도 사슬 모양의 멍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서, 얇은 잠옷 너머로도 비쳐보였다.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었다. 아이는 상체를 숙이고 손을 내뻗었지만, 다나는 돌아누운 채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냥, 보고 싶어서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타래처럼 길게 풀어진 분홍색 머리카락 위에서 달빛이 부서질 뿐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조금 쳐들고 말했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에요."
대답은 없었다. 아이는 혼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침에도 들렀는데, 그때는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늦게라도 찾아왔어요. 이제 좀 괜찮은가요?"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다나는 돌아누운 채로, 가끔 작은 대답을 흘릴 뿐이었다. 보기 싫다는 듯,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에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북서 자치령에서 만난 이래로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반응이었다. 아이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보았다. 그러나 다나는 이불을 더 세게 쥐어잡을 뿐, 반응하지 않았다. 아이는 손을 축 늘어뜨리고 물었다.
"혹시, 제가 싫어진 건가요."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놀란 건 아이 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불을 움켜쥐고 반응하지 않았던 다나가, 깜짝 놀란 듯 이불을 놓치고 상체를 일으켰다. 다나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냥,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에요. 피곤해서... 화장도 제대로 못했고. 땀도 많이 흘렸고. 부끄러워서..."
그러나 그렇게 손사래치던 다나는,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손은 허공을 더듬을 뿐 쉽게 이불을 잡지 못했다.
"자요."
보다 못한 아이가 손에 이불을 쥐어 주자, 다시 달팽이처럼 휙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다나와, 곁에 앉은 아이.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아이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이불을 더 세게 붙잡고 웅크린 다나가 말을 꺼냈다.
"제가, 당신을 싫어하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거에요. 지금은, 좀, 피곤한 것 뿐이니까. 돌아가주지 않을..."
그러나 그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묵직한 무게감이 이불 너머로 전해졌다. 아이가 침대 위에 올라온 것 같았다.
자신을 침대 아래 깔아뭉갠 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불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덧없는 저항이었다. 휙, 이불은 바닥 밑으로 떨어지고, 볼이 연분홍빛으로 상기된 다나의 얼굴이 드러났다.
더없이 당황한 표정인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아이는 다나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저...저."
다나는 어깨를 떨면서 물었다. 그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아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딘가 침통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서로 얼굴을 맞댄 채로, 아이는 천천히 물었다.
"눈을 떠 주세요."
창문으로 들어온 찬 바람이, 아이의 옷 틈새를 타고들어와 등을 서늘하게 어루만졌다. 다나는 어설프게 반문했다.
"왜,왜요."
"보고 싶으니까."
그 말을 하는 아이의 입술은 자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어떤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다나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그 호수에 앉아 있던 블뢰유처럼. 당황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저으며 빠져나가려 애쓰던 다나는, 결국 체념한 듯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맞물려 있던 긴 눈꺼풀이 열리고, 눈동자가 드러났다. 호수처럼 맑은 녹색이었던 그 눈동자가 아니었다. 드러난 다나의 눈동자는, 탁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무채색의 동공은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공허하게 맴돌았다.
"아..."
조각난 성녀의 혼, 그것을 억지로 승계한 대가로, 다나의 눈은 멀고 말았다. 아침에 의사에게서 확진을 들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다나의 귀에, 아이의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애닳는 탄식이었다.
이래서, 적어도 내일까진 몰랐으면 했는데. 다나는 온 힘을 다해 어둠 속을 쏘아보았다. 온통 새까만 세상 위로 희미한 선이 일렁거렸다. 아마도 그 사람의 얼굴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애써서 미소를 지으려는 두 뺨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한 방울 떨어졌다.
"미안,해요."
눈물이 떨어져내린 것 같았다. 당황한 다나의 뺨 위로, 폭우처럼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울음에 뭉개진 목소리가 귓바퀴로 흘러들어왔다.
"정말 미안해요. 내가, 내가 꼭 지켜줬어야 했는데."
다나 위에 엎드린 채로, 아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장이 전부 찢어졌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정말로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탁하게 변해버린 다나의 눈동자를 보는 매 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아이는 그대로, 망가진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읊어댔다. 다나는 새까만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떨리는 그 흰 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확실하게 위치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서, 아이의 단단한 몸을 더듬어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다 제 선택이니까. 다 잘 될 거에요."
"그렇,지만. 하지만."
"오히려 기운이 넘치는 걸요? 봐요, 이렇게."
두 팔을 벌려서, 아이의 몸뚱이를 세게 끌어안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던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어깨에 턱을 기대고, 다시금 등을 쓸어내리면서, 다나는 새삼 떠올렸다.
이 사람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강하지만, 바보같을 정도로 여리다는 것을. 어느새 달은 하늘 가득히 떠올라 있었다. 창문으로 쏟아져들어온 달빛은 서로 끌어안은 두 사람을 아련하게 비추었다. 손등으로 등을 쓸어내리면서, 다나는 조용히 말했다.
"내일, 저도 전쟁에 나갈 거에요."
"네?"
"이제 스승님의 혼을 이어받아서, 스승님과 같은 힘을 얻었으니까. 그 역할도 당연히 물려받아야지요."
생각해보면 원래 다나를 그 탑에 데려간 목적이 그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자, 아이는 냉정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허리를 휘감은 한 팔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안 돼요. 허락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받은 게 있으니까. 당당한 제자가 되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그 몸으로 무슨...!"
"그건 저도 하고 싶은 말인데."
뜻밖의 역공에 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나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두 뺨을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 씨도 숨기는 게 있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흘깃 오른팔을 돌아보았다. 선주가 잠든 후로 오른팔은 전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다나도 거기서 위화감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두 뺨을 움켜쥔 채로 다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다면, 부탁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꼭 들어주세요."
"어떤, 부탁인가요."
"그 사람. 그 불행한 사람의 힘을 빌리지 말아 주세요."
다나는 눈을 감은 채로도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람이라는 건,
선주를 뜻하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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