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48화 (248/279)

42. 행복 ( 5 )

"그 날, 들었어요. 힘을 빌린다고..."

탑에서 다나를 눕히고 선주에게 일갈할 때,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얼굴을 굳힌 채로 다나의 말을 귀에 새겼다. 꽉 맞닿은 가슴에선, 얇은 잠옷 너머로 세찬 박동이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힘을 빌려줄 리가 없잖아요. 숨기지 말고,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세요."

단호했다.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아이는 천천히 선주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힘을 빌리는 대가로 혼을 건네주었고, 이미 오른팔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내일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공기가 차갑게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다나의 얼굴은 화난 듯 굳어 있었다.

"그럼 해야 할 일은 명확하네요. 내일은 절대로 그 사람한테 혼을 넘겨주지 마세요."

"그렇지만, 내일 이기지 못하면, 모든 게."

"이겨도 아이 씨는 사라진다는 거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나는 두 손을 더듬어 어깨를 세게 붙잡고 말했다. 그 날, 오두막에서 달아나던 때 이래 처음으로, 다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뭘 덤덤하게 그런 걸 받아들이려는 거에요? 이미 충분히 했잖아요. 왜 항상 당신 혼자 가장 힘들어야 하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데요? 아니, 알기나 해요?"

무언가가 북받쳐올랐는지, 다나의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눈 대화가 머리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켜 어떤 문답을 그려냈다.

왜 싸우는 것인가?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럼 왜 약속했는가? 너에게 늘 모질고 잔인하게 굴었던 이 세상에게, 너는 왜 복수하는 대신 희생하려 하는가?

선주에겐 일축해서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 얼굴에게 일축은 대답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늘 이렇게 살아왔는걸요. 이게 천성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새어든 바람으로 차갑게 식어 있던 두 뺨 가득, 온기가 번져왔다. 다나가 얼굴을 가슴에 품고 꼭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좋아해요."

다나는 속삭였다. 아이는 멍하니 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어떻게든 머리카락을 찾아 쓰다듬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런 사람이라서 좋아하게 된 거지만, 그래서 이젠 그 방식이 싫어졌어요. 왜 항상 혼자서, 멋대로, 자신이 가장 상처입는 선택만 고르는 건가요?"

"약속, 했으니까..."

"그럼 저랑도 약속해줘요."

어느새 그 목소리는 애원하는 투로 변해 있었다. 달빛이 흐붓하게 쏟아져 아이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정말로 힘들면 도망쳐도 좋고 포기해도 좋아요. 꼭 곁에 돌아와주세요. 아니, 살아남기만 해도 돼요. 어떤 모습이든, 얼마나 다쳤든 간에, 제가 반드시, 무조건, 어떻게든 찾아갈 테니까."

아이는 천천히 다나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초조한 듯 이 쪽을 올려다보는 다나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빛을 잃은 회색 눈동자 위에선 자신의 모습이 흐리게 비치고 있었다. 연분홍빛 입술은 오므리고 벌어지기를 반복하며 이런 의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세계를 포기하고서라도 도망쳐라. 살아남아라. 그럴 것을,

"약속해주세요."

아이는 침묵했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 수록, 다나의 얼굴은 흐리게 무너져갔다. 입술이 가엾게 떨리고, 눈가에는 물기가 번져가고, 고개는 힘없이 스러져갔다.

괴로운 광경이었다. 참지 못하고, 아이는 팔을 뻗어 무너져가는 다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아서, 한 팔로는 으스러지게 껴안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다나의 머리칼에선 이름모를 꽃향기가 풍겨왔다. 안심하라는 듯, 머리를 길게 쓰다듬으면서, 아이는 말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게 최선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 모를 두 사람만의 만남은, 그런 한심한 말로 끝이 났다.

*

어느새 만월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랗게 떠오른 달이, 상아색으로 반짝이며 보리수에 달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레고르와 만났던 그 보리수였다. 그 그늘로 다가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보리수 잎을 흔들어 엷은 소리를 사방에 뿌려댔다. 아이의 얼굴 위에서 잎 그림자가 어지럽게 이지러졌다.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던 아이는, 툭 말했다.

"림. 있어?"

'찾지 않아도 곁에 있단다.'

그림자 속에서 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뻘건 얼굴이, 어쩐지 정겹게 느껴져서 아이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면, 림과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내일, 아마 가장 힘든 싸움이 있을 거야. 그런데 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싸우라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라는 사람도 있어."

그 말은 이런 물음으로 끝을 맺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림은 물음으로 화답했다.

'어쩔 셈이냐.'

"나는."

고개를 숙였다. 흘깃 오른팔을 쳐다보았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속, 다나에겐 끝내 그 약속을 해줄 수 없었다. 물어보고 있지만, 이미 마음은 한 쪽으로 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 마라.'

림은 단언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림을 쳐다보았다. 만월을 등지고 선 림은, 더없이 진중하게 아이에게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네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괴롭다.'

"그렇지만 난 약한걸. 선주가 힘을 빌려주지 않았으면, 그 날 이미 죽었을 거야."

이 반론에는 림도 쉽게 단언하지 못했다. 단테는, 어쨌든 길 아잘록이 타락시킨 하수인에 불과했다. 그것 하나를 이기는 데에도 선주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그런데 내일 혼을 넘기지 말고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고 무책임한 소리였다. 림은 잠시 뼈날개를 퍼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마지막 한 조각이라도 남겨라. 나는 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사라지면, 많이 슬플 것 같구나.'

아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길 아잘록은 마술사였다. 또 림은 마술사를 멸절하기 위한 신이었다. 그러니까, 나약해져가는 자신의 마음을 엄한 말로 다잡아줄 줄 알았다. 멍청하게 림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조각? 그럼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려서, 어린아이처럼 되어버리면?"

'내가 다 알려주겠다.'

림은 즉답했다.

'네가 내 무릎보다도 작을 때부터 쭉 지켜봤으니, 알려줄 수 있다. 네가 뭘 해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림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해보였다. 뼈와 근육 뿐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오래 림을 지켜봐온 아이는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쩐지 대책 없이 유쾌한 기분이 들어서, 아이는 너털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리수 잎이 얼굴에 닿아 사락거리며 흩어졌다. 완전히 일어선 아이는, 어느새 림과 눈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이는 림을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안아줘."

머뭇거리던 림도 두 팔을 벌려 화답했다. 오직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온기가 온 몸에 전해져왔다. 그 붉은 등을 쓰다듬으면서,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난 아버지가 없지만, 아마 있었다면 너 같았을 것 같아. 처음엔 엄하고 무서웠던 네가, 늘 내 곁에 있어줘서 많은 용기를 얻었어."

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말을 기다리는 듯싶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사라져도, 네가 남을 테니까. 그 사람한테도 해줄 수 있을 거야. 나한테 해준 것들을."

그 말뜻을 곱씹던 림은 탄식을 흘렸다. 결국 아이는 소멸하더라도 선주의 힘을 빌릴 생각인 것 같았다.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림은 다시 물었다.

'너는 그 녀석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하지 않는 거냐. 이미 네 팔은 그 녀석에게 파먹혔는데.'

림의 품에서 벗어난 아이는, 다시금 보리수 그늘 아래 주저앉았다. 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며 답했다.

"글쎄, 난 바보라서. 사실 누굴 정말로 미워하는 법을 아직도 잘 모르겠어."

왜 세상에 복수하지 않느냐. 선주의 물음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사실 이것이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네 말대로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 사람도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외로웠을 뿐."

'그런가.'

"그러니까 너도, 그 사람도, 이번에는 잘 해나갈 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레고르가 건네준 담뱃갑에는 마지막 개비만이 덩그러이 남아 있었다.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갑을 버리려던 아이는, 그제서야 담뱃갑 바닥에 적혀 있는 글자를 확인하고 실소했다. 거기에는 어린이용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환자가 피어도 문제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었던 모양이었다.

깊게 숨을 빨아들였다. 뜨거운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와 내장 가득 번져갔다. 연기와 열기가 폐를 그슬리는 감각이 더없이 생생했다.

숨을 내뱉는 순간, 갑자기 찌르듯 아파왔다. 방금 꺼낸 말이 입천장과 목구멍에 찌꺼기처럼 들러붙어서, 온 몸을 아프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 분명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먼 옛날, 북서 자치령에서 별이 되고 싶다고 할 때부터 지금까지, 늘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장에 깊이 박힌 것이 달랐다.

밭은기침을 뱉으며, 아이는 억지로 담배를 다시 물었다. 순한 담배를 권하던 통령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다음에는 무고하게 죽었던 총관을, 베어온 수많은 생명들을, 드미트리를, 단테를, 그리고 눈이 먼 채로도 자신의 걱정을 하던 다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몸 속 깊은 곳에 그 모든 것이 찌꺼기처럼 남아 부글거렸다. 뜨거운 담배의 열기는 그것들이 들끓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말을 주워섬길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사람이던가. 해왔던 모든 것이 어중간한 어른 흉내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자기혐오와 죄책감을 연기에 묻어서 게워내며, 아이는 다시금 켁켁댔다. 아까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리며 뺨에 맑은 선을 그렸다. 아이는 림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물었다.

"아니려나."

내가 잘못된 걸까. 자그맣게 뇌까렸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삶, 의미 있었을까?"

무릎을 끌어안으면서, 아이는 림에게 다시금 물었다.

"후회한 적 없어? 나 같은 걸 선택한 걸."

답은 즉시 돌아왔다. 림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만약, 처음부터 네 말을 따랐더라면. 모두 베어버리고, 강해지려고 애써서, 충분히 강해졌더라면. 그 사람들은 죽지 않아도 괜찮았을까. 역시 내가, 어리석었던 걸까."

아이의 목소리 끝에는 희미한 울음기가 묻어 있었다. 보리수가 흔들리며 아이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림은 이번에도 즉답했다.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답했을 뿐만 아니라, 날개를 접고 다가와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예전의 림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긴 말이었다.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우직하게 걸어오지 않았나.'

'늘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워왔던 것,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노력해온 것, 가끔씩은 울면서 마음 아파했던 것, 그래도 언제나, 이겨내고 일어났던 것.'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모두 알고 있을 거야. 보거라, 결국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아득할 정도로 험난하기만 했던 길의 끝까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널 선택한 것,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부디 눈물은 멈추거라.'

'그래, 나는 오히려 칭찬하고 싶다.'

'훌륭하게 해냈구나, 하고 말이야.'

말을 마친 림은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물 자국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는 그 뺨은, 여전히 언젠가의 어린아이 같았다. 아이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림과 손을 맞잡았다. 림의 부탁대로, 어느새 그 얼굴에서 눈물은 멎어 있었다. 아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거짓말도 할 줄 알게 됐네."

림은 마주 빙그레 웃으며 화답했다.

'네 덕분이다. 나도 조금쯤 어른이 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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