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49화 (249/279)

42. 행복 ( 6 ) 제도는 검게 죽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부풀어오른 알집이 황궁을 파먹고 음산하게 솟아 있었고, 알집을 둘러친 땅은 거뭇하게 말라붙어 풀 한포기도 품지 못했다. 그슬린 도시의 잔해는 묘비처럼 곳곳에 박혀 있었다. 개선문의 깃발은 낡은 양탄자처럼 망가져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그 밑에 도열한 것은, 죽은 자들의 군대였다.

썩은 기름을 뒤집어쓴 듯, 끈적이는 무언가로 거무죽죽하게 침색된 해골들이 메마른 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방진을 이루고 선 곳마다 새하얀 환골탑이 앙상하게 솟아 흔들렸고, 이따금씩 탑이 무너질 때마다 괴물이 뼛조각을 헤치고 기어나왔다.

아지프의 마술사는 갓 태어난 괴물들의 젖은 몸을 닦고 쇠목줄을 채웠다. 마술사들 역시 멀쩡하진 못했다. 큼지막한 이형의 벌레가 뒷목과 등뼈에 척 달라붙어 불끈거리고 있었다. 그 벌레에게 이성을 뺴앗긴 듯 마술사들의 시선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길 아잘록의 군세가 제도를 점령한 뒤 이 곳의 풍경은 계속 이랬다. 헤카톤 케이레스를 품은 알집은 박쥐의 피막 같은 껍질을 번들거리며 계속 커져갔고, 그 알집을 지키기 위한 군세도 커져만 갔다. 마술사들은 매일 탑을 세우고 마법진을 피로 덧그리며 그것의 출산을 준비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제도는 종양을 닮았다. 이 세계의 심장에 자라난 암처럼 보였다.

바닥을 그물처럼 촘촘하게 메운 마법진은 알집을 녹여내고 헤카톤 케이레스를 일깨우기 위한 준비물이었다. 검붉은 색채로 불길하게 빛나는 마법진 위에는, 이성을 잃은 마술사들이 뭉쳐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등에 매달린 벌레는 꿈틀거리며 뇌리에 이런 명령을 주입했다.

알이 완성되고, 모든 위협이 사라지면, 의식을 집전해라.

알은 이미 완성되었다. 하지만 마술사들은 아직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협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며칠째, 혼자서, 이 아비규환의 전장 속을 헤집으며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

"흡!"

그건 아셀라이였다. 회의장을 박차고 뛰쳐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쭉 이 곳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합과 함께 휘두른 검날이 적의 슬개골을 쳐부수고 왼쪽으로 빠져나왔다. 뒤편에는 부서진 뼛조각이 수북히 쌓여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의식은 진작에 시작되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홀몸으로 이 세계의 종양과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아름답던 갑옷은 우그러지고 마모되어 빛을 잃었고, 나비검을 뭉쳐 만들어낸 의수도 곳곳이 텅 비어 위태로웠다.

금빛의 머리카락은 오물과 피에 젖어 축 늘어졌다. 벌써 며칠째,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수만의 적과 싸워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또 한 무리의 해골을 베어낸 아셀라이는 이마를 붙잡고 휘청거렸다.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이제 지쳤다는 신호를 온 심신이 전해오고 있었다. 몸의 피로보다도, 오직 죽음으로만 가득한 이 희망 없는 들판의 풍경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베어내도 적은 해일처럼 몰려왔다. 잠시의 여유도 없었다. 또 한 무리의 적이 언덕을 달려 아셀라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악물어 몸을 가누고,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치솟은 나비검은 쇄도하던 해골의 흉곽을 십자로 쪼개고, 비수처럼 날아가 마술사의 볼을 꿰뚫어 입을 막았다.

바닥을 기어 덮쳐드는 해골을 걷어차 쳐부수고, 검을 둥글게 휘둘러 마술사의 아랫턱과 등에 매달린 벌레를 한꺼번에 베어냈다.

벌레의 검은 체액과 마술사의 피가 뒤섞여 치솟으며 바닥을 더럽게 물들였다. 순식간에 또 한 무더기의 유해가 쌓였다.

그러나 아직도 습격은 끝이 아니었다. 땅거죽이 갈라지고 가득 쌓여 있던 뼛조각이 튀어오르며, 땅 속에 잠복해 있던 마골귀가 뛰쳐나와 아셀라이의 등을 덮쳐왔다.

간신히 앞으로 굴러 피하고, 받아쳤다. 의수를 이루던 나비검을 전부 그러모아 대검을 만들어 휘두른 것이다. 마골귀의 몸뚱이는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져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지막 습격자의 포효가 울렸다. 근처에 있던 환골탑이 깨지면서, 용골귀가 새로 태어나 아셀라이를 발견하고 포효를 내지른 것이었다.

아셀라이의 긴 머리카락이 돌풍에 쉼없이 흩날렸다. 갓 태어난 용골귀의 날카로운 눈을 마주하면서, 그녀는 망토를 뜯어 내던지고 나비검을 그러모았다.

망토는 허공에서 나비검으로 변하고, 대검으로 날아들어 하나로 합쳐졌다. 대검은 순식간에 그녀의 몸보다도 커졌다.

용골귀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녀석의 시꺼먼 목구멍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목구멍 깊이 고인 어둠을 응시하며, 아셀라이는 대검을 크게 휘둘러 용골귀를 양단했다.

천지가 떠나갈 것 같은 굉음과 절삭음이 울리고, 승패가 정해졌다. 무작정 몸을 부딪힌 용골귀가 생선처럼 깔끔하게 양단되어 나동그라진 것이었다. 쿵! 언덕을 타고 굴러떨어진 용골귀의 사체는 바닥과 부딪혀 산산히 부서져 바람에 흩날렸다.

그러나, 아셀라이의 상태도 성하진 못했다. 놈의 갈비뼈와 이빨에 긁혀 온 몸이 만신창이였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언덕 위에 주저앉았다.

왼이마에선 피가 길게 흘러내려 턱끝에 방울졌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뺨에 달라붙어 난해한 곡선을 그렸다.

핏물과 티끌이 눈에 가득 들어가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그걸 닦아낼 힘조차 없었다. 그저 자신이 쌓아올린 언덕에서, 검에 몸을 기댄 채로 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석양은 저물었다. 황량한 지평 위로 태양이 서서히 가라앉아 두터운 구름 너머로 햇살을 쏘아보냈다. 피로 얼룩진 시야 위에 태양의 붉은 빛이 포개어졌다. 아셀라이는 장갑을 내던지고 후들거리는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피와 눈물이 손등에 묻어 씻겨나갔지만, 아직도 시야는 붉기만 했다. 석양 때문이 아니었다.

"아."

수천 개의 붉은 빛이 점멸하며 자신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지프의 마술사들의 주특기, 포격이 틀림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아잘록이 마술사들을 모두 움직인 모양이었다. 자신을 겨누는 수천 개의 굉혈포를, 이 상태에서, 이겨낼 방법은 없었다. 외통수였다.

이것이 내 최후인가. 사슴처럼 긴 목을 뻗어 하늘을 우러르면서 아셀라이는 중얼거렸다. 구름에 덮인 하늘은 석양 곁에서도 어둑했다. 체념하고, 검을 손에서 놓으려 할 때였다.

텅! 기다리던 최후는 오지 않았다. 대신 다급한 발소리와, 무언가를 튕겨내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누군가가 곁으로 달려들어, 아셀라이에게 날아든 수천 개의 굉혈포를 일격에 베어낸 것이었다. 아셀라이는 놀란 듯 자신의 곁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그녀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었다. 낯익은 붉은 대검을 발견한 아셀라이는 당황한 듯 소리질렀다.

"어떻게?"

아이 우르드, 자신의 제자가 곁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손에 쥔 대검은, 마술을 베어내는 힘이 있다던 그 검이었다. 저것으로 굉혈포를 전부 깨부수고 자신을 구해낸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씩 웃으며 팔을 내뻗어 아셀라이를 부축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듣기만 해도 긴장이 녹아버릴 것 같은, 따뜻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셀라이는 마음을 다잡고 사납게 물었다.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혼자 온 거라면 돌아가라. 너는 책임질 사람이 있어서, 나와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히, 그럴 거면 절대로 오지 말라고..."

쿵. 아셀라이의 말을 멈춘 것은 아이가 아니었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발소리였다. 아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어깨에 품고 뒤돌아섰다.

"혼자가 아니에요."

쿵. 다시 한 번 웅장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발소리의 주인은 이 언덕에서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컨쿼러였다. 숱한 고난과, 수많은 전쟁과, 그리고 한 소녀의 죽음으로 벼려낸 성물. 그 금빛의 동체는 석양빛을 원본보다도 밝게 반사하며,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컨쿼러의 밑에선 수만의 군세가 기나센의 깃발을 휘날리며 정연하게 진군하고 있었다. 군세의 행렬은 횡으로, 종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저편의 지평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이는 슬쩍 아셀라이의 반응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화난 표정을 짓던 아셀라이는, 지금은 그저 놀란 듯 점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이!"

그리고 그 군세 사이에는 예상 외의 지원군이 또 있었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아이에게도, 아셀라이에게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밝고 천진한 목소리였다. 아셀라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시력을 집중했다. 멀리서도, 분명히 눈치챌 수 있었다.

"모두 다! 우릴 도와주러 왔어!"

컨쿼러의 뾰족한 뿔 위에 재주 좋게 올라타서, 두 팔을 마구 흔들어대는, 짐승을 닮은 여자아이. 그건 에바였다. 그 주위에는 검은 옷을 두르고, 갖가지 동물의 두개골을 뒤집어쓴 두냐의 암살자들이 한가득 뭉쳐 있었다. 그들 역시 구원군에 합류한 것이었다.

분명히 전쟁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든든한 전력으로 활동했던 에바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이유. 그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회전에서 아잘록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여 구원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에바는 두냐의 암살자들을 설득해 구원군에 합류시키기 위해 떠났다.

모두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암살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도구로 사용되도록 철저히 세뇌당한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두냐의 수뇌부들은 전쟁에 자신의 전력을 소모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암살자들은 주인을 배반하고 싸움에 나서는 것을 망설여했다. 하지만 에바의 끈질긴 호소가, 그리고 아이가 그 장례탑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결국 그들의 마음을 바꾸었다.

처음으로, 주인 없이, 두냐의 마술사들은 스스로 싸움에 나서기로 했다.

"끝나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맛있는 밥을 차려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으리으리하게 차려서! 내 체면 꼭 세워줘야 해!"

바보스러울 정도로 해맑게 웃으면서 에바는 외쳤다. 하얗게 삐져나온 송곳니가 석양빛을 받아 건강하게 빛났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회답했다. 아셀라이도 마찬가지였다. 먼 옛날, 천칭이 저 녀석을 살리기로 결정했던 것은, 역시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에바는 날래게 뛰어올라 컨쿼러의 가장 높은 뿔까지 올라갔다. 움직이는 거인 위가 아니라 평지 위를 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묘기였다. 정상에서 두 발로 쭈그려 앉은 에바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답답할 정도로 두텁게 뭉쳐 있던 구름이 갈라지고, 또 다른 원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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