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51화 (251/279)

42. 행복 ( 8 )

전황은 시작과 동시에 기울어져 있었다.

적어도 에길론은 그렇게 느꼈다. 안간힘을 다해 해골의 눈구멍 깊이 쳐박힌 장검을 뽑아내자, 검회색으로 부패한 골수가 뺨에 튀었다.

닦아낼 틈조차 없었다. 흘깃 눈을 돌리자 해골 셋과 뒤엉킨 아군이 보였다. 재빨리 달려든 에길론은 전보다 훌륭한 솜씨로 검을 휘둘러 포위를 풀어내고 해골을 쳐부쉈다.

방패를 뒤집어쓴 채 버둥거리던 남자는 헉헉거리며 에길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카나기의 무반이었는데, 격전으로 방패와 검을 잇는 사슬이 망가져 있었다.

그러나 일어선 것도 무색하게 두 사람은 다시 엎드려야 했다. 선명한 뿔피리 소리가 전장의 소음을 가로질러 사방에 퍼져나갔다.

포격의 신호였다. 연 모양 방패 아래 엎드린 두 사람 뒤로, 백열하는 금빛의 마탄이 우박처럼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진흙이 부서져 비산하고, 무언가가 박살나 뭉개지는 소리가 한참 울려퍼진 후에야 에길론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한 쪽 귀가 먹먹했다.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귓바퀴에 고여 있던 피가 뜨끈하게 흘러내렸다. 방금 전 가까이서 포격이 터졌을 때 찢어진 모양이었다.

시야조차 흐릿했다. 초토화된 대지 곳곳에선 흰 포연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부서진 뼛조각과 핏물로 엉망진창이 된 전장 위에, 자신 같은 사람들 여럿이 다리를 후들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그들 위에, 그리고 에길론의 머리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포격으로 박살나 흩뿌려진 뼛조각들이 한데로 모여들어서, 이제껏 없었던 거대한 환골탑을 이루고 음산한 그림자를 내리깔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에길론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저 탑은 아지프의 괴물을 불러내는 탑이었다. 그렇다면, 저렇게 거대한 탑 속에서 나타날 것은, 이제껏 없었던 위험한 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예감은 정확했다. 알처럼 깨져나가는 환골탑 속에서 크고 무서운 것이 몸을 일으켰다. 몸뚱이는 하늘에 뜬 금빛의 법문을 가릴 정도로 크고, 머리 위에 산양의 두개골을 얹은 거인. 에길론은 저것을 알고 있었다.

길 아잘록의 분신과도 같은 병기, 헤카톤 케이레스였다. 그것이 포효하자 공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쓰러졌던 뼈의 군대들이 다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힘겹게 쳐부쉈던 뼛조각이 붕 떠올라 서로 골격을 짜맞추고, 군병으로 부활해 대열을 맞추어 헤카톤 케이레스를 엄호했다.

무력감을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아귀힘이 탁 풀려 느슨하게 검을 늘어뜨린 에길론에게, 커다란 마골귀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에길론의 작은 몸을 집어삼켜버릴 것 같았다.

"윽!"

그 흉측한 이빨이 목전에 다가온 찰나, 눈부신 흰 빛이 터졌다. 에길론은 간신히 눈을 뜬 채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침 햇살처럼 밝은 빛이 둥글게 퍼져나가며, 그 빛의 고리에 닿는 해골들을 봄눈처럼 녹여버리고 있었다. 컨쿼러가 하루에 한 번만 쏘아보낼 수 있는 비기, 정화의 불꽃이었다. 금방이라도 에길론을 잡아먹을 듯 덮쳐왔던 마골귀도 녹아내려 소멸했다.

이윽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크게 흔들렸다. 충격에 뒤로 벌렁 넘어질 정도였다. 머리카락이 푸들거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헤카톤 케이레스를 발견한 컨쿼러가 이 쪽으로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른 것이었다. 주먹은 헤카톤 케이레스의 주먹과 맞부딪혀서, 산맥과 산맥이 충돌한 것 같은 폭음을 뿌려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헤카톤 케이레스는 다시금 괴성을 내질렀다. 컨쿼러의 눈구멍에선 시뻘건 빛이 용광로처럼 넘실댔다. 두 거인은 뿔과 뿔을 맞대고, 양손을 맞잡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그 무게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거죽이 뒤집혀 붉은 지층이 드러났다. 컨쿼러의 동체에선 금을 녹인 증기가 숨결처럼 끓어오르고, 산양의 텅 빈 목구멍에선 귀기 서린 포효가 잇달아 터졌다.

웅장한 광경이었다. 신화의 한 장면 같았다. 헤카톤 케이레스의 위압적인 등장과, 부활하는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풀죽었던 사기가 소생하기 시작했다. 에길론의 외침이 그것에 쐐기를 박았다.

"저 놈은 가짜에요! 진짜와 다르게 가슴에 핵이 없습니다!"

기나센의 일원이기에 알고 있었다. 헤카톤 케이레스의 가슴팍에는, 란페이가 매달려 핵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 헤카톤 케이레스의 가슴엔 피로 검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을 뿐 란페이가 없었다.

저것은 가짜였다. 모조품이나, 시범작 따위가 틀림없었다. 그 말에 전의가 되살아난 구원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짜 헤카톤 케이레스에게 달려들었다. 기둥처럼 두꺼운 발목으로 몰려가 연이어 후려치자, 균형을 잃어버린 가짜는 크게 휘청였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나가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통령!"

"통령이 이 쪽에 왔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이 또한 에길론이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통령, 아이 우르드가 흰 머리카락을 길게 나부끼며 사납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질풍 같은 속도였다. 매끄러운 컨쿼러의 동체를 평지라도 되는 것처럼 밟고 달려나가, 어깨, 목, 뿔까지 도달해서, 크게 도약해 뛰쳐내렸다. 그 손에는 어느새 핏빛의 대검이 솟아나 적의 정수리를 덮치는 중이었다.

레바테인은 크고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쏟아져내렸다. 헤카톤 케이레스의 굽은 뿔을 베어내고, 정수리 깊이 쳐박혔다.

쿵! 잘린 뿔이 바닥에 떨어져서, 발치에 몰려 있던 용병들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가짜 헤카톤 케이레스는 포효를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컨쿼러의 힘에 밀려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서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떨었다. 쿵! 때를 놓치지 않고, 컨쿼러는 연신 박치기를 가했다.

두개골 일부가 함몰되며 충격이 아이에게까지 전해져왔다. 레바테인을 양손으로 붙잡은 아이는, 검을 깊게 쑤셔넣어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괴물을 둘로 쪼개버릴 작정이었다. 거듭된 박치기를 이기지 못하고 두개골에 금이 가고 있었으므로,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다.

잠시 후, 가짜 헤카톤 케이레스의 두개골은 완전히 양단되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는 뼛조각과 함께 떨어지며 깔끔한 낙법을 취했다.

쾅! 사뿐히 착지한 아이의 뒤로, 커다란 산양의 뿔과 두개골 조각이 마구 떨어져 굉음과 흙먼지를 일으켰다. 머리를 잃어버린 헤카톤 케이레스의 육신은, 모래성처럼 재로 변해 무너져서 그 위를 덮었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아이가 천천히 무릎꿇은 몸을 일으켰을 때, 뒤에서는 천지를 울리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만큼 영웅적인 광경이었다.

뒤에 만장한 구원군에게, 방금의 전투는 승리를 예고하는 축포처럼 보였을 터였다. 사기와 전의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이 에길론에겐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도,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정도니까. 하지만 에길론은, 금세 그 열광에서 벗어나 눈초리를 흐렸다.

전황은 시작과 동시에 기울어져 있었다. 아지프 쪽으로. 적어도 에길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과도, 교환비도 압도적이었지만, 대전략이 없었다.

에길론에게 이 전쟁은 죽음과의 전쟁처럼 여겨졌다. 조용한 불멸성이 저들의 무기였다. 지금 이렇게 전투의 흥분으로 사기가 들끓는 순간조차도, 저 멀리에서 죽음의 군대는 탄생하고 있었다. 방금 입은 손실을 보충하고도 남을 규모로.

저들은 인간을 대하는 죽음의 방식으로, 불꽃을 대하는 겨울밤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방금의 승전으로, 시야를 가리던 환골탑과 뼈무덤이 사라져 알집이 아스라히 드러났다. 황궁을 가득 파먹고 검게 번들거리는 알집, 저것이 적들의 마력의 원천이었고, 죽음의 자궁이었다.

아마도 저 안 가장 깊은 곳에서 진짜 헤카톤 케이레스와, 길 아잘록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구원군의 최종 목표는 저 알집을 쳐부수고 길 아잘록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성벽을 엄호하는 장벽은 너무나 두터웠으며, 또 끝없이 재생하여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길론에겐 그것이 불가능한 과업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다시금 환골탑이 솟아오르며, 알집으로 향하는 시선조차 차단을...

"응?"

하지 못했다. 뼛조각을 그러모아 형성되던 환골탑은, 어디선가 날아온 편대에 부딪혀 산산조각났다. 지면은 그것들이 내뿜는 불과 벼락으로 뒤덮여서, 재생되어가던 죽음의 군대는 다시금 깨끗하게 일소되었다.

용군단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하늘에서 때를 기다리던 수십 마리의 용군단이 매처럼 날아들어 길을 뚫고 있었다.

한번 지면을 휩쓴 용군단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컨쿼러가 있는 쪽을 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가 있는 쪽을 향했다. 용군단의 선두는 교룡 타스하였다. 그 위에 탄 사람, 레고르가, 아이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팔을 내뻗었다.

"꽉 잡아라."

턱, 아이는 그 손을 붙잡고 날래게 지면을 박차 타스하의 위에 안착했다. 아이를 태운 용군단은 다시금 방향을 틀었고, 깨끗하게 뚫린 길을 따라 돌진하기 시작했다. 알집으로.

"아!"

에길론은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그 장면의 의미를 하달이라도 받은 듯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용군단의 목표는 저것이었다.

전황이 우세해져 길이 뚫리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통령을 알집에 강습시키는 것. 그리고 통령이 길 아잘록을 무찌르는 것.

처음부터 이럴 계획임이 틀림없었다. 전략의 핵심은 방금 용을 타고 날아간 자들에게 있었다. 이제부터 남은 구원군의 역할은, 그들이 길 아잘록을 제거하고 나올 때까지의 시간벌이. 고기방패. 그것이면 충분했다.

"자, 제군! 위치를 사수하도록!"

낭랑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공백을 채웠다. 아셀라이였다. 홀연히 나타난 그녀는 수천의 나비검을 광휘처럼 두르고 선봉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아직 사람들의 열광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부지불식간에 지휘권을 인계받아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고 작전을 수행할 셈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 교묘한 연극 같은 연출의 솜씨에 에길론이 전율하고 있을 때, 아셀라이가 에길론을 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입단속이 틀림없었다. 그 천진한 눈웃음에 어쩐지 긴장이 풀린 에길론은, 피식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자세를 바로했다.

에페 바체이고, 전술가이기 이전에, 에길론 역시 용병이었다. 설사 시간벌이보다 더 한 임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또 그것을 눈치챈다고 하더라도, 전장에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저 통령이 성공하기를 기원하며, 기합성을 내지르고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

한편, 용군단은 쐐기형의 편대를 이루어 곧장 날아들고 있었다. 알집으로.

그야말로 속공이었다. 용들은 모두 가진 속도를 다해 비행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일어서, 아이의 머리카락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말끔하게 씻겨나갈 정도였다.

그래야만 했다. 이 정도의 속도가 아니라면, 괴물들에게 발목을 붙잡힐 것이 뻔했다. 황궁으로 향하는 길은 한번 뚫었는데도 험난했다. 사방에서 탑이 솟아오르고, 이형의 괴물들이 튀어나와 용군단을 가로막으려 들었다.

"ㅡㅡㅡㅡㅡㅡㅡ!!"

그 때마다, 쐐기의 가장 바깥쪽에서 두 마리의 용이 튀어나가 괴물을 막아세우고, 나머지는 직진하기를 계속했다. 쐐기의 바깥부터 벗겨져나가는 형태였다. 이 편대의 중심, 그 꼭짓점에는 천교룡 타스하가, 그리고 레고르와 아이가 위치했다. 저항은 내부로 진입할수록 거세졌고, 길도 더욱 더 험난해져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큭!"

레고르가 신음을 흘렸다. 길을 뚫기 위해 대열에서 이탈한 용 한 마리가, 무수한 굉혈포 세례에 온몸을 꿰뚫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고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황궁 가까운 심부에는 라달라리아의 법문이 닿지 않아서, 마술사들이 무력화되지 않았기에 생긴 참사였다.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장엄한 대열을 이루던 용군단은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초라해져서, 알집이 가시권에 들어올 때에는 이미 타스하와 몇 마리의 용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심호흡을 한 아이는 타스하의 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정말로 지척이었다. 내려다보자, 알집의 시꺼먼 피막이 발 밑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이제, 돌입할 때인 것 같습니다."

레고르는 말없이 뿔을 당겨 타스하의 궤도를 틀었다. 그리고 성난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너 하나를 저 안에 쳐박으려고 용군단 전부를 걸었다. 그러니까, 해내라."

어쩌면 그 나름의 격려일지도 몰랐다. 아이가 대답할 새도 없이, 급강하가 시작되었다. 일전에 장례탑에서 그랬던 것처럼, 타스하는 화살처럼 알집을 향해 쏟아져내렸다. 타스하의 뿔과 충돌한 알집은 얼음장처럼 산산조각나고,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이 열렸다.

저 곳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는 건가.

마음을 굳게 다지고, 그 입을 쩍 벌린 틈으로, 아이는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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