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52화 (252/279)

42. 행복 ( 9 )

깊은 물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알집 안은 농밀한 마력으로 가득했다. 깃털처럼 느리게 추락하면서, 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뛰어든 알집의 틈새가 순식간에 아물어가는 것이 보였다. 시꺼먼 무언가가 밀려들어 알집의 상처를 수복해갈수록 스며드는 빛은 줄어들었고, 이내 완전히 깜깜해졌다.

"아."

가라앉듯이 바닥에 안착했을 때, 시야가 어슴푸레 밝아왔다. 누워 있던 아이는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떨어진 곳은 화단이었다. 유리당초와 채송화 꽃잎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 알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이다."

알집이 있던 자리에 원래 있던 것, 황궁의 야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마치 아잘록이 손대지 않은 것처럼 고요히. 아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풀거리던 유리당초의 투명한 꽃잎이 그 콧등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처음부터 실체가 없었던 것처럼. 아이는 그제야 감을 잡기 시작했다.

"이건 환상인가?"

올려다본 하늘에선 알집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연보랏빛 성운이 수직으로 치솟아 보름달을 휘감고 시린 빛을 뿌려대는, 깊은 밤하늘이 보일 뿐이었다. 다른 세계에 착륙한 기분이었다. 기시감이 일었다. 최근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단테가 있던 장례탑에서.

아마도 장례탑에 걸려 있던, 환상을 보여주는 마술이 여기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어나 한 발자국 내딛은 아이는 곧 그것을 확신했다.

자신이 추락하면서 뭉개버린 화단의 빈 자리에 꽃무리가 홀연히 피어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비척이며 화단 밖으로 벗어날 때쯤, 그것들은 감쪽같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환상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새로이 피어난 은방울꽃의 창백한 꽃망울을 응시하던 아이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휘청거렸다. 조용히 지켜보던 림이 놀라 물었다.

'괜찮으냐?'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많은 환청이 림의 목소리에 앞서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불신을 부추기는 말들, 객관을 가장한 저주, 염세주의, 절망을 찬미하는 시구 따위가 겨울 바다를 철썩이는 파도처럼 거세게, 또 맥락없이 귓전에서 울려댔다.

길 아잘록의 특기는 다른 이를 절망시켜 자신의 하수인으로 부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마력으로 빚어낸 이 세계도 그 특성을 이어받아서, 방문자에게 쉼없이 허무를 속삭이는 모양이었다.

"위장에 들어온 것 같아."

거대한 짐승의 위장에 몸을 던진 느낌이었다. 환청은 위액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귓구멍으로 파고들어 안쪽부터 몸을 침식해왔다. 지금까지 아잘록에게 당했던 모든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몰락했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화단 곁의 야트막한 관목림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허무, 그리고 이 죽은 듯 고요한 세계 자체가 일종의 방어 마술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견디지 못하고 이미 정신이 무너져 이 황궁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것 같았다. 선주도 그 위험을 느낀 듯,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힘들면 나가서 증원을 요청해라. 혼자 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아이는 견뎌낼 수 있었다. 이마를 문지르자 식은땀이 손등에 묻어나왔다. 마음을 추스리며 떠올렸다. 길 아잘록의 마술,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말, 이론, 마음에 형상을 입힌 것, 어떤 것이든 흉내낼 수 있는 것, 영원불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때로는 세상의 본질처럼 군림하는 것, 그러나 저 커다란 보름달처럼, 영원히 궤도를 맴돌 뿐 핵심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것.

아이는 관목림에 잘못 끼어든 붉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환상으로 빚은 꽃은 안개처럼 녹아 사라졌다. 그 엷어져가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유."

이 자의 마술의 실체는 사유다.

이 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은 사유다. 사유뿐이다. 그 공허한 내면에서 비롯된 병든 계몽으로 타인을 물들이고, 절망시키는 것.

그의 삶은 그런 침식 과정에 불과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청은 잦아들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자, 우아한 황궁의 야경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 궁전은 아마도 수천 년이 지나도 저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 그것은, 폐허처럼 보였다.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사람 없는 풍경은 결국 유적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법이었다.

떨림은 완전히 멎었다. 두 발로 일어서 고개를 쳐들자, 이 궁전의 실체가 더욱 더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만약 눈 앞에 그가 있다면, 아이는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이것이 길이 바라는 최선의 세계인가. 이 헛것의 궁전이 네가 틀어박히고 싶은 인공의 자궁인가.

너는 인류의 진보를 위한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이것이 그 결과라면, 그 세계란 자폐에 빠진 인류를 위한 끝없이 넓은 벽장에 불과할 것이다.

'너. 정말로 괜찮은 거냐.'

"괜찮아요. 혼자가 아니니까."

다시금 걱정 섞인 말을 하려는 선주에게 대답하고, 아이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환청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얀 사각돌이 정연하게 깔린 길을 따라 걸으며, 륜에게 건네받은 문서에 적혀 있던 정보를 되새겼다. 이 알집 안에서라면 그는 자신의 사유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지금까지 삼켜온 적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을 골라 창조해서 경비를 세웠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말대로였다. 꽃이 만발한 정원을 벗어나기도 전에, 벌써 첫 번째 경비를 발견했다.

"당신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귀르겐이었다. 단테가 그랬던 것처럼, 온 몸이 시꺼먼 무언가에 침식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장미넝쿨에 휘감긴 아치문 아래에 그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아이를 발견한 그는 말을 걸어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칼날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재빨리 천갈궁을 뽑아 맞부딪혔다. 쨍, 검과 검이 부딪혀 걸게 울었다. 짓밟힌 꽃풀더미가 아스라히 치솟고, 분분히 흩어졌다.

"윽..."

십자로 교차한 칼날 너머로 보이는 귀르겐의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 한 번 검격을 맞댄 것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귀르겐은 그 섬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더, 어쩌면 단테보다도 더 강해져 있었다. 팔이 저려왔다. 이를 악물고 쳐내려 했지만, 귀르겐의 검은 마력을 뚝뚝 흘리며 집요하게 약점을 찔러왔다. 버텨내기 버거웠다. 역시,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이겨낼 수 없었다.

"미안해요."

다나에게 한 것일까, 림에게 한 것일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일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사과를 남기고, 아이는 선주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영혼을, 살아온 기억을.

'이 대책 없는 세계를, 잘 버텨낼 수 있겠나.'

'내가 겁쟁이라면 너는 울보인 모양이군. 뭐가 그리 슬픈가.'

'앞으로도 영웅을 연기하며 살아가거라.'

잊어버렸다. 그 날 있었던 일들을. 그리고 그 기억은 고스란히 선주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선주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기억 뿐만 아니라 내장이, 옆구리가, 어깻죽지가 선주의 통제 아래에 들어왔다.

"하아아아압!"

그리고 그 잃어버린 기억만큼 아이는 강해졌다. 기합을 내지르며 귀르겐의 검을 힘내어 쳐내고, 빙글 돌아 가슴을 찔러갔다. 칼끝은 엄심갑을 쳐부수고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 반격을 기점으로 아이는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칼날 아래 귀르겐이 쓰러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최후의 한 합, 허리를 크게 양단당한 귀르겐은 장미 화단 위로 무너져내렸다.

아이도 성하진 않았다. 피투성이였다.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긴 자상이 남아서, 흘러나온 피로 물든 옷은 뚝뚝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찢은 소매로 상처를 동여매어 지혈하고, 이빨로 매듭을 단단히 조였다. 검을 크게 휘둘러 기름처럼 끈적한 핏물을 털어내고, 아이는 천천히 전진했다.

녹아 없어져가는 귀르겐의 유해를 지나, 반쯤 무너진 아치문 너머로. 평소의 아이였다면 애도를 표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귀르겐이 누구였는지, 이름조차 잊었으므로.

곧 웅장한 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사를 지내는 성직자를 주재시키기 위한 건물이었다. 대성당의 상아빛 벽면은 검푸른 밤공기 속에서도 곱게 빛났다. 그 성당으로 향하는 계단에 첫 발을 들이밀었을 때, 괴성이 울려퍼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성당의 첨탑이었다. 뾰족한 첨탑 위에 걸터앉아 있던 무언가가 포효를 내질러 경고하고 있었다.

무시하고 한 발을 더 내딛자, 그것은 풀쩍 뛰어내려 석고상으로 장식된 제단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건 외신이었다. 양 손에 곡도 하나씩을 쥔 그 외신은, 무엇이 기쁜지 흐느적거리며 느릿한 검무를 추었다. 륜이 전해주었던 문서에 적혀 있었던 놈이었다.

갈라아이의 거인. 지금 헤카톤 케이레스가 들고 있는 쌍검의 원 주인이라던 그 놈이 틀림없었다. 귀르겐보다도 훨씬 강한 위압감이 그 거인에게서 풍겨왔다. 이 놈 역시, 버거운 녀석이었다. 마름모꼴의 제단을 밟고 선 그것을 올려다보며, 아이는 조용히 검을 뽑고, 또 혼을 넘기기 시작했다.

'너는 진멸하라!'

'이미 죽은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에 개입해선 안 되는 법이야.'

'잘 가요, 천사님!'

'오지 말라니까. 너랑 나는 적인데?'

'헤헤헤,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카사노의 일이, 나사렘에서 보았던 모든 것이 흘러들어갔다. 그 날, 성당 위로 동터 오던 여명의 따스함도, 햇살이 들이치는 언덕에서 내려다보았던 풍경도 잊었다. 보이는 것은 흉물스러운 외신의 아가리 뿐이었다. 곡검을 거세게 쳐내며 싸움을 시작한 아이는 금세 무아지경에 접어들었다. 그저 검을 쥐고, 달려들어서, 베어낼 뿐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크고, 크며...크지.'

하지만 그 치열한 싸움의 와중에서도, 귓전에서는 카사노의 넋두리 같은 말이 울려대고 있었다.

"크고...크며...아."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외신은 쓰러진 지 오래였다. 멍청히 카사노의 말을 읊조리던 아이는, 우두커니 서서 무너진 외신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방금 끝난 싸움은 격렬했다. 그 여파로 사방은 엉망진창이었다. 제단은 산산조각나 있었고, 석고상과 여신상은 부서져서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장미창으로 쏟아지는 달빛은 온 몸에 지저분한 얼룩을 남겼다. 흘깃 무릎을 쳐다보니 큼지막한 유리조각이 박혀 있는 것이 보았다.

우악스럽게 잡아 뽑자 피가 배어나왔지만, 아픔은 없었다. 무릎도 이미 선주에게 넘어간 모양이었다. 눈길을 돌리자,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마다 자신의 멍청한 얼굴이 조각나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표정이 너무 우스워서, 아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실성한 모양이군.'

"그럴지도요. 아,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냐.'

"방금 제가 중얼거린 말, 무슨 뜻이었나요. 중요한 일이었나요?"

이미 아이는 카사노가 누군지도, 나사렘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주는 잠시 고민했다. 대답을 찾기 쉽지 않았다.

'시시한 일이었다.'

"그런가요."

일축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림은 복잡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회화를 듣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던 걸까, 아이는 절뚝이며 다음 장소로 움직였다.

대성당을 지나 도착한 곳은 드디어 목적지, 황궁의 본궁이었다. 아마도 아잘록이 헤카톤 케이레스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곳이었다.

수천 개의 가느다란 기둥이 지탱하는 본궁의 궁륭은 흐붓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빨아들여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심야의 어둠에 파묻힌 기둥들은 잘 보이지 않아서, 궁륭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본궁의 커다란 대문 앞에 도착한 아이는 둥근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열리지 않았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떻게 이 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펑, 뒤에서 갑자기 터져나온 들끓는 소리에, 아이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 굉음은 앞뜰에 넓게 펼쳐져 있던 호반에서 들려왔다. 호수의 검푸른 수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용틀임을 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 후, 용오름이 치솟으며 그것의 윤곽이 드러났다. 나타난 것은 용이었다. 레고르와 함께 타고 온 타스하만큼이나 거대한 용. 아마도 전쟁 중에 먹어치운 카나기의 용을, 최후의 수문장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꺼냈다. 짐승의 이빨을 닮은 검, 유혼이 손아귀에 치솟아 예리하게 빛났다. 비스듬히 유혼을 늘어뜨리고, 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아이는 또다시 기억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잊어버릴 기억은, 많이 소중했기 때문일까, 어쩐지 예감할 수 있었다.

'그것도 주의 뜻이다.'

'당신은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는 건가요?'

'내 정의를 만들었어요. 착한 마술사는 나중에 죽이고, 나쁜 마술사부터 죽이겠다고요.'

'이 땅에 가득한 원한과 악의에서 벗어나서, 두둥실 떠올라서, 저 우주까지 날아가서...'

'별이 되고 싶어요.'

'글쎄, 그건 주님의 몫도, 내 몫도 아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겠지.'

북서 자치령에서 지새웠던 밤들, 나누었던 풋풋한 대화들이 선주에게로 스며들었다. 그 때 배웠었다. 슬픔에 감사하는 법을, 추한 것을 사랑하는 법을. 매일 야숙을 했었다.

부싯돌로 조그만 불을 피우고, 찌그러진 놋쇠 반합에 밥을 짓고, 불을 쬐며 시덥잖은 농담을 나누다가 푸른 잔디 위에 누워 잠들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곤 했었다. 다른 어떤 때보다도, 밤하늘을 많이 보았던 나날들이었다.

그때 보았던 밤하늘도 지금처럼 새까맣지만, 너무 깨끗해서, 별빛이 묻어날 것 같아서, 이렇게 손을 내뻗곤 했었다...

"쿨럭, 커헉."

메마른 호반 한가운데 누워서 손을 내뻗던 아이는, 핏덩이를 토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그마한 내장 조각이 핏물에 섞여 있었다.

용과 싸워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과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싸우던 때의 기억조차 선주에게 넘어간 모양이었다.

안간힘을 써서 말라붙은 호수에서 벗어나자, 궁전의 문이 처참하게 박살나 있는 것이 보였다. 유혼에 온 몸을 난도질당한 용이 대문 위로 쓰러져서 저렇게 된 것 같았다. 무너진 문 너머로 비치는 복도 속에서는 횃불이 파리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잔해와 용의 유해를 넘어서, 아이는 그 복도로 걸어들어갔다.

비틀거리며 걸었다. 아니,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몸의 7할은 통제권을 잃었으므로, 혼자서는 걷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선주가 배려해서, 걷는 흉내를 내주고 있을 뿐이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자꾸 가물거렸다. 회랑에 깔린 붉은 우단 위를 걸으면서, 아이는 자꾸 감기는 눈을 치뜨려고 애썼다.

아잘록이 기다리고 있는 곳. 알현실로 향하는 회랑을 걷고 있었지만, 저 바람벽을, 송진을 잔뜩 바른 횃불을, 장식 갑옷을, 휘장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간신히 길과, 길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 통로는 영원처럼 길었다. 그 위에서, 아이는 잊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떠올리려 애썼다.

혼자 잠드는 밤이면 어둠과 함께 내려앉아 자신을 에워싸던 생각들, 잊었다. 그날 웅크린 채 보았던 흰 꽃나무의 이름도 잊었다. 부드럽게 들이치는 달빛 속에서 나누었던 약속, 잊었다. 고민했던 것, 보여주고 싶었던 것,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 꼭 간직해서 전해주고 싶었던 생각들.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어도,

결코 잊어버릴 수는 없는 것.

칼을 딛고 일어서 짊어진 최초의 맹세.

'림, 서원한다.'

'내 영과 육을, 이 세상의 모든 마술사를 말살하는 데 바치겠어.'

길의 끝에 다다라 비로소 마주한 기억 속의 숙적.

회랑의 끝의 문을 열자 나타난 유모 잃은 유골에게,

아이는 그 날의 맹세를 바쳐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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