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행복 ( 10 )
알현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세월이 비껴가는 것처럼 영원히 정지해 있던 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확장을 거듭하던 것이 바로 이 알현실이었다. 그 당시에 가장 값지고 화려했던 것들이 이 곳에 진상되어 켜켜이 축적되어서, 이 넓은 방에서는 여러 시대가 어깨를 맞대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황제들은 진상품의 뒤편에 무거운 필체로 그것이 진상된 해에 있었던 일을 새겨넣었다. 금을 녹여 써내려간 글씨들은 누대에 걸쳐 쌓이고 또 쌓였고, 지금에 이르러 알현실의 벽은 하나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일정한 양식을 이루었다. 임기의 초반, 뭇 비극에 대하여 비분을 연극조로 삼키기도 했고 슬픔을 수다스럽게 고백하기도 했던 문체는 임기의 끝에 다다를수록 점점 짧고 건조해진다. 벽면을 가득 메운 수만 개의 글자들은 하나의 어두운 계몽을 향해 수렴하여 나아간다. 그 내용은 명료했다. 나는 벌받지 않는다. 전횡을 방치해도, 부정을 눈감아도, 촌민을 전쟁터로 내몰아도, 이 안락한 방에 비껴 앉은 나는 절대로 죄값을 치르지 않는다...
글머리마다 녹아나는 이 계몽은 임기의 끝에 다다를수록 더욱 더 선명해져서, 말엽에는 어떤 사치스러운 장식도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진주와 청금석을 빻아 조색한 그림도, 금사로 수놓은 비단 휘장도 근조기처럼 우울하게 자리를 지킬 뿐이다. 이 한 사람만을 위한 계몽은 천 년 동안 붉은 깃폭 뒤에서 비밀스럽게 계승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길 아잘록은 이 곳에 터를 잡았다.
이 공간의 부절한 확장은 그의 손 아래서 마침내 끝을 맺었다. 희귀한 짐승의 박제와 수정 세공품은 산산히 조각나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고, 관능적으로 양팔을 내뻗던 여신상은 거뭇하게 침색된 채 물에 잠겨서 비탄에 빠진 원령처럼 허우적댔다. 수은에 백금을 섞어 축언과 잠언 수천 구를 새겨놓은 청동 궁륭은 둥글게 구멍뚫려 있고, 검고 탁한 액체가 그 구멍으로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잘록은 그 검푸른 물의 베일에 비치는 자신의 무감정한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폭포의 너머에서, 헤카톤 케이레스는 입을 쩍 벌리고 게걸스레 저 검푸른 오수를 받아마시는 중이었다. 아잘록은 옷자락으로 외알 안경을 닦아 다시 걸치고, 저 오수에 대해서 생각했다.
저 오수의 정체는 원한과 악의였다. 어떤 형상도 얻지 못하고 망령처럼 맴돌던 이 세계의 원한과 악의가, 아잘록의 병든 세상 가운데서 마침내 형상을 얻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 알현실의 왕좌에서 스러져간 모든 이들이 벌받지 않았다 한들 먹먹하게 울려퍼졌던 그 원한과 악의가 어딘가로 사라졌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아잘록은 이 곳을, 유모 잃은 유골을 완성하기 위한 장소로 골랐다. 이 황궁의 심장부야말로 갈 곳 잃어 헤매던 악의가 모두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의식이 거행되기 전, 아잘록은 이 원한을 최대한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폭포수의 밑단에서 헤카톤 케이레스는 아가리를 흉하게 벌리고 게걸스레 오수를 들이마시고 있었지만, 주둥이와 목구멍을 통과한 물은 흉곽의 틈으로 쏟아져내려 바닥을 적실 뿐 거의 흡수되지 않았다. 받아마시지 못한 오수로 알현실의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발목께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도 그랬다. 물이 쏟아지는 음산한 소리 사이로 헤카톤 케이레스는 가끔씩 기이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마치 영원히 목마르라는 형벌을 받은 죄수의 신음처럼 들렸다. 타인의 원한을 짊어지는 것은 이다지도 힘든 일인가, 아잘록은 중얼거렸다. 그 어깨에선 세네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부리로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철벅, 아잘록은 로브의 아랫단을 적시며 헤카톤 케이레스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 거체의 가슴팍을 올려다보자, 심장부에 결박된 그녀의 형상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물어보았다.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나?"
그 응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돌아왔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고, 무언가가 아잘록이 서 있는 자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격이었다. 그대로 아잘록의 허리를 토막낼 것만 같았던 칼날은, 그보다 더 거대한 칼날에 가로막혔다. 쏟아지는 오수의 폭포 속에서 헤카톤 케이레스가 쌍검을 내뻗어 검을 막아세운 것이었다.
산양의 유골은 검을 맞댄 채로 천천히 오수의 폭포를 헤쳐나왔다. 창백한 뿔과 갸름한 세모꼴의 두개골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길 아잘록은 세네터의 발목을 붙잡고 날아올라 헤카톤 케이레스의 빗장뼈에 내려앉았다. 유골이 검을 휘두르자 습격자는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직전까지도 상념에 젖어 있던 길은 그제서야 습격자를 내려다보았다.
환한 사람이었다. 또 아름다웠다. 유독 어두운 이 방이기 때문일까, 그 은빛의 머리칼과 색소가 엷은 피부에선 은은한 빛이 뿜어져나오는 것 같았다. 굳게 다문 입과 예리한 턱선에선 어떤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계에서 내방한 방문자 같다고, 아잘록은 그렇게 생각했다. 흥미로운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이의 귀를 스치지조차 못했다. 두 시선은 허공에서 엇갈렸다.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헤카톤 케이레스의 가슴팍 정중앙, 그 너른 흉곽에 십자로 팔을 벌린 채 매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란페이 우르드. 그 날, 그 방에서 보았던 마지막 모습 그대로, 그녀는 유골에 묻혀 잠들어 있었다. 물소리가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도 그 얼굴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말도 귀를 스치지조차 못했다. 그저 검을 붙잡은 양 손에 힘을 더해서, 전의를 불태워 검격을 흩뿌릴 뿐이었다.
강렬한 검풍이 물보라와 함께 알현실 가득 휘몰아쳤다. 헤카톤 케이레스는 차라리 기둥이라는 말이 어울릴 커다란 쌍검으로 검격에 맞섰다. 레바테인의 진홍빛 칼날과 쌍검의 묵빛 검날이 맞부딪힐 때마다 불똥이 폭죽처럼 터져나왔다. 두 대적자의 체구의 차이는 수십 배를 넘었다. 분명 무모한 것이어야 했을 이 경합은, 그러나 지금 아이의 우세로 성립되고 있었다.
벼락처럼 떨어져내리는 쌍검을 유려하게 쳐내고, 아이는 디딤발을 젖혔다. 큰 일격의 준비였다. 레바테인은 유골의 손목을 향해 쏘아져나가서 첫 유효타를 만들어냈다. 손마디 하나가 부서져 바닥에 떨어지고, 돌가루와 뒤섞인 오수가 크게 튀었다. 대검이 너울거리며 지나간 자리 뒤엔 검붉은 잔영이 강하게 남았다. 선혈을 진한 먹에 섞어 흩뿌리는 듯한 질감이었다. 선주와 동화되면서 레바테인의 모든 힘을 끌어냈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었다. 지금 저 유골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유골은 크게 휘청였다. 기묘한 비명이 넓은 방 가득 메아리쳤다. 아이는 다시금 그 품으로 달려들었다. 횡으로 휘두른 검은 무릎을 크게 베어내고 뼛가루를 흩뿌렸다. 성난 반격이 발작하듯 뒤따랐지만, 아이는 검격의 맥을 짚어 흘려보내거나 허리를 젖혀 피해냈다. 검과 검의 싸움에서는 명백히 아이가 우위에 있었다. 공세는 계속되었다. 맹공에 눌린 헤카톤 케이레스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를 거듭했다. 알현실은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비스듬히 베어 올려친 검격에 휘말려 주철 기둥이 물 속으로 무너지고, 휘장이 반으로 잘려서 진주알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순식간에 오간 수십 번의 공방에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는 것은 늘 아이였다. 어느새 헤카톤 케이레스는 벽을 등질 정도로 몰려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쇳소리를 닮은 불쾌한 괴성 사이에서 유골은 쌍검을 크게 쳐들었다. 팔꿈치에 부딪힌 벽이 무너져 돌가루가 흩날렸다. 양팔을 한껏 젖힌 헤카톤 케이레스는 곧 바닥 전체를 휩쓸며 커다란 일격을 가해왔다. 쌍검에 부딪힌 포석이 쪼개져 마구 비산하고, 가득 고여 있던 오수는 맹렬히 치솟아 해일을 일으켰다. 아이는 거세게 뛰어올라 그 해일을 정면으로 뚫고, 넓적한 검날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두 손을 포개어 레바테인의 손잡이를 굳게 쥐었다. 막 모루에서 꺼낸 것처럼, 그 검신은 선연한 주홍빛이었다. 시야 가득 유골의 거대한 흉곽이 들어왔다. 꽉 맞물린 두 손에 힘을 가득 불어넣었다. 손잡이는 뜨거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에서 시작된 자그마한 불씨는 어깨와 팔뚝을 타고 검으로 흘러들어가 분명한 불길로 자라나서, 검끝에 다다를 때쯤 이미 커다란 불꽃이 되어 있었다. 유골은 눈 앞까지 다가왔다. 레바테인을 휘감은 불씨가 정점에 달해 맹화가 되었을 때, 그것은 갈비뼈를 노리고 쏘아져나갔다. 검날이 그리는 호는 크고, 깨끗했다. 그 궤적은 긴 꼬리를 남기며 사막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 같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명, 그리고 파열음이 뒤따랐다. 진정한 힘을 끌어내어 휘두른 일격은 오른쪽 쌍검을 완벽히 깨부쉈다. 거대한 검이 부서져 파편을 사방에 흩날리고 검조각이 떨어진 자리마다 물보라가 치솟았다. 멈추지 않고 계속 쏘아져나가서 유골의 핵심을 쳐부술 기세였던 레바테인은, 그러나 의외의 일격을 맞고 부서졌다.
커헉, 폐가 조여오는 격통에 아이는 작은 신음성을 흘렸다. 길 아잘록의 개입이었다. 레바테인이 유골의 가슴을 범하기 직전, 그가 쏘아보낸 포격이 아이를 덮쳤던 것이었다. 급하게 검면을 세워 방패처럼 가로막아서 치명타는 피했지만, 포격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레바테인의 검날은 유리처럼 박살나 있었다. 휩쓸려 바닥을 구른 아이는 오수 속에서 일어나 아잘록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곁에는 헤카톤 케이레스의 그것을 닮은, 산양의 두개골이 떠올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저것이 포격을 쏘아낸 모양이었다. 오수를 뭉쳐서 빚어낸 듯 그 윤곽에선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경이롭군. 경이로워."
아잘록이라는 사람을 몰랐다면 비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역광으로 하얗게 물든 외알 안경에 가려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은 필기하듯 허공을 분주히 움직였다. 창백한 손가락은 난해한 도형을 덧그리고 또 덧그려서 불길한 마법진 수십 개를 순식간에 완성해냈고, 마법진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며 검붉은 빛을 뿌려댔다. 그 가지런한 회전이 끝났을 때, 대지가 크게 진동하며 오수에서 무언가가 치솟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개골이었다. 방금 포격을 쏘아낸 저것과 같은 산양의 두개골. 흥건한 오수 속에서 물덩어리가 치솟아 점토처럼 꿈틀거리며 그 흉칙한 형상을 갖추어갔다. 완성된 두개골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아이가 서 있는 곳에 포격을 조준했다. 쾅, 재빨리 몸을 굴러 피했지만 포격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두개골은 원형의 행렬을 이루며 연이어 떠올라서 쉴새없이 붉은 빛을 뿜어댔다. 아이는 시계방향으로 달려 계속해서 뿜어져나오는 포격을 피했고, 대신 얻어맞은 알현실의 기둥과 벽은 처참하게 부서져서 건물 전체가 흔들거렸다. 빛줄기와 아이의 추격전은 알현실의 벽 한쪽이 무너져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새 두개골의 수는 수십을 헤아렸다. 그 두개골의 행렬은 이제 완연한 원을 완성하고, 합을 맞춘 듯 일제히 아이를 조준하여 입을 벌렸다. 포격을 피해 뛰던 아이는 잔해에 가로막혀 구석에 몰려 있었다. 크게 벌어진 산양의 입마다 붉은 빛무리가 맺히고, 수천 개의 이빨은 피먹은 듯 번들거렸다. 넘실거리는 오수는 선홍색으로 물들고 대리석은 빛을 빨아들여 불그스름하게 반사해서, 알현실은 온통 핏물에 잠긴 것 같았다. 산양의 뿔에 기대 선 아잘록이 높이 쳐든 오른손을 내리그었을 때, 빛줄기들은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범람해서 아이를 덮쳐왔다.
아이의 넓은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반쯤 찢겨진 망토가 거센 돌풍에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눈 멀듯 강렬한 빛으로 짓쳐들어오는 포격을 응시하며, 아이는 검자루만 남은 레바테인을 내던졌다. 그리고, 양 손에 굳게 쥐었다. 새로운 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