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54화 (254/279)

42. 행복 ( 11 )

늘 평온했던 아잘록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이채를 띠었다. 아이의 손에 새로이 돋아난 검 때문이었다. 맹수의 이빨을 닮은 검이었다. 선주의 힘을 받아들여서 전보다 예리하고 강인하게 변형된 유혼이었다. 지금 유혼은 마치 금강석을 연마해 벼려낸 것처럼, 붉은 빛을 여과해 오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아이는 쏟아지는 포격의 중심에 유혼을 정확히 꽂아넣었다.

"이건..."

아잘록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저 검이 자신이 쏘아낸 포격을 빨아들여 갈무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빛줄기들은 검신 주변에서 곱게 정돈되어 진홍색 나선을 이루며 회오리쳤다. 마력을 빨아들여 되받아치는 것, 미숙하던 시절의 아이를 여러 번 구해주었던 유혼의 그 힘이, 마침내 여기서 완성되어 그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앞머리가 미친듯이 흩날렸다. 검을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양팔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기합을 내지르며 크게 휘둘러 쏘아보냈다.

귀가 찢어지는 굉음이 울렸다. 쏘아보낸 포격은 매섭게 소용돌이치며 빛살처럼 산양의 몸뚱이를 덮쳤다. 기둥을, 폭포를, 오수로 빚은 두개골 두어 개를, 닿는 모든 것을 쳐부수며 달려든 포격은 유골의 왼 가슴을 꿰뚫고 커다란 구멍을 뻥 뚫어놓았다. 괴로운 비명이 울려퍼지고,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파가 바닥을 뒤흔들었다. 균형을 잃은 유골은 오수의 폭포 위로 쓰러졌다. 거대한 물보라가 천장까지 치솟아 시야를 가렸다. 심지어 아이가 있는 곳까지 오수가 튈 정도로 큰 물보라였다. 팔을 들어 덮쳐오는 오수를 막고, 흘깃 저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심대한 타격을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물보라가 가라앉고 드러난 것은 더욱 더 흉악한 모습으로 변한 유골이었다. 방금 아이의 유혼이 꿰뚫은 가슴께에서는, 새까만 고깃덩이가 심장처럼 맥동하며 잿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다. 길 아잘록의 어깨에 머무르던 귀조 세네터, 그것이 유골의 몸에 녹아들어가 상처를 수복해서 저런 모습이 된 것 같았다. 변화는 그 뿐이 아니었다. 온 몸이 칠흑의 깃털에 뒤덮여 몸 빛깔은 자수정 같은 검보랏빛으로 변해 있었고, 네 장의 섬뜩한 날개가 어깻죽지에 돋아나 위협하듯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시험삼아 느리게 날개를 두어 번 펄럭이던 헤카톤 케이레스는, 곧 분주히 날개짓해 알현실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잘록은 반쯤 부러진 유골의 뿔을 붙잡고 어깨 위에 서 있었다. 방금 전의 충격에 휘말려 안경알이 깨져서 이번에는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얼굴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희열이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경탄에 찬 표정으로, 그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에 경탄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헤카톤 케이레스는 날개를 칼처럼 예리하게 펼치고 고도를 낮추어 덮쳐들었다.

몸을 굴려 피했다. 철벅이는 물소리가 귀 가득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검날처럼 펼쳐진 날개에 동상이 비스듬히 잘려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저 편의 상공에 도착한 헤카톤 케이레스는 다시금 날개를 펄럭이며 강습을 준비하고, 또 아이를 덮쳐왔다. 아이는 다시금 몸을 굴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벽이 잘리고, 지붕을 지탱하던 기둥이 쓰러져 궁륭 일부가 무너지고, 파편이 흩날리고,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또 날아든 헤카톤 케이레스의 날개에 아치를 떠받치던 은사 다발이 잘려 머리카락처럼 어지럽게 흩날렸다. 위태롭게 버티던 아치가 무너져서 아이를 덮쳐왔다. 간신히 옆으로 굴러 피하자마자, 이번에는 정면에서 헤카톤 케이레스가 뿔을 앞세워 찔러왔다. 찰나의 차이로 피해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뿔에 몸뚱이를 꿰뚫려 내장을 찢겼을 터였다. 반격하려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헤카톤 케이레스는 멀리 벗어나 저 편의 상공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중이었다. 제공권을 영악하게 살린 이 전술은 파훼하기 어려웠다. 숨이 가빠왔다. 시야도 흐릿했다. 눈에 선명히 보이는 것은, 아까부터 기이한 미소를 짓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잘록의 얼굴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처음으로 맞닿았다. 가물은 시야 속에서, 그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내리그었다.

"아."

그 순간, 알현실 전체가 핏빛에 휩싸였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이는 입을 벌리고 작은 신음을 흘렸다. 수십 개의 두개골이 자신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 입마다 시뻘건 불빛이 넘실거렸다. 헤카톤 케이레스의 공격을 피하는 동안, 은밀히 포석을 깔듯 두개골을 불러내어 포격을 준비해왔던 게 틀림없었다. 어둠 속에서 숨죽인 채 기다리던 수십 개의 두개골은 그렇게 아이를 완벽히 포위하고, 다시 한 번 일제히 포격을 쏘아냈다. 이번에는, 대응하지 못했다. 무자비한 빛줄기가 아이가 있던 곳을, 돌바닥을, 벽 전체를 쳐부수며 작열하고 이어 크게 폭발했다. 그야말로 완전한 파괴였다. 유성우를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철저하게 무언가를 파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포연이 걷힌 자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은 짙고 농밀했다. 망가진 미술품들이 부장품처럼 아이가 서 있던 자리 곁에 쌓이고, 그 위를 무너진 알현실의 외벽이 이불처럼 덮었다. 적요한 침묵이 반파된 알현실을 몇 분이나 지배했다. 그 숨막히는 암흑의 저편에서, 헤카톤 케이레스는 여전히 느리게 날개짓하며 부유하고 있었다. 아잘록은 망가진 안경을 벗어 옷자락으로 닦다가, 쓸모 없는 행동임을 깨닫고 내던졌다. 작은 장신구를 벗어던지자 연로한 망막의 표면에도 어둠이 가득 부풀어올랐다. 그는 암순응을 위해서,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고 눈두덩을 매만졌다. 그 직후였다.

"윽."

강렬한 섬광이 눈가를 찔렀다. 처음에는 작은 반짝임이었던 그것은,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환한 빛으로 자라나 알현실을 온통 희게 물들였다. 그 광채가 가장 눈부시게 빛날 때, 돌무더기와 잔해를 뚫고 무언가가 치솟아올랐다. 아이였다. 그 빛의 근원은 아이가 들고 있는 검, 그리고 등에 매달린 여덟 장의 날개였다. 코람 데오. 천사의 힘을 빌려주는 검. 그 능력을 선주의 도움을 받아 극한으로 끌어낸 결과가 바로 이 비상이었다.

지면을 박차고 떠오른 아이는 활짝 날개를 폈다. 순백으로 빛나는 수천 개의 깃털이 무너진 천장으로 스미는 달빛을 빨아들여 강렬하게 반사했다. 예리한 검날은 초저녁에 떠오른 샛별처럼 반짝였다. 아이는 곧바로 날개를 날렵하게 펼쳐 활공했다. 몸 전체가 한 발의 탄환이 된 것 같았다. 검끝은 아잘록을 겨눈 채였다.

폭음이 터져나와 지축을 뒤흔들었다. 쏜살같이 날아들던 아이의 코람 데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결계에 부딪혀 가로막히며 터진 충돌음이었다. 재와 피로 빚은 질감의 결계가 반구형으로 어른거리며 칼날을 붙잡고 있었다. 예사로운 마술이 아니었다. 이것이 저 자가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방어 수단인 것 같았다. 아이가 결계에 붙들려 있는 사이에, 저 너머에서 아잘록과 헤카톤 케이레스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아이는 힘을 쥐어짜내 검신 가득 불어넣었다. 코람 데오의 검신을 감싼 달빛은 더욱 더 휘황하게 빛났다. 가능한 모든 힘을 쏟아부어 검을 위로 휘둘렀을 때, 결계는 드디어 금이 가서 새알처럼 깨져나갔다. 그러나, 코람 데오도 성하지 않았다. 날이 부러져 저 먼 바닥 깊이 떨어져내렸다. 망가진 칼날은 점점 엷어지며 소멸해갔고, 등의 날개도 햇빛에 닿은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코람 데오는 이 결계와 공멸한 것으로 소임을 다한 모양새였다.

짧은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부스러져가는 날개를 힘껏 추스려 날아올랐다. 노리는 것은 여전히 아잘록이었다. 홰칠 때마다 흰 깃털이 눈처럼 흩날려 녹아내렸다. 날개가 완전히 스러지고 마지막 날개짓이 끝났을 때, 아잘록의 얼굴이 시야 가까이 들어왔다. 급히 양손을 펼쳐 어떤 마술의 인을 맺고 있었다. 아이는 검자루만 남은 코람 데오를 내던지고, 새로운 검을 꺼내 비수처럼 내리꽂았다.

새까만 겨우살이가 아잘록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미제리코드였다. 기생목의 나뭇가지처럼 변화된 그 단검의 칼날은 아잘록의 손등을 뼈째로 꿰뚫고 진혈을 뿌렸다. 아이는 아잘록을 걷어차 바닥에 깔아뭉갰다. 아잘록의 등과 헤카톤 케이레스의 어깨뼈가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아이는 그 몸뚱이 위에 올라타고, 단검을 아잘록의 심장에 꽂아넣으려 했다.

"왜, 잘 되지 않나?"

단검에 손을 꿰뚫려 심장을 위협받고 있는데도 아잘록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 말대로였다.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을 것 같았던 미제리코드는, 무언가에 막혀 손등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결계 때문이었다. 방금 코람 데오가 부딪혀 공멸한 결계, 그것과 똑같은 것이 아잘록의 심장 주변에 우산처럼 펼쳐져 있었다. 미제리코드는 그 잿빛의 결계에 붙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포기하게. 이 잿가루는 내가 뭇 생령의 여망을 대행하여 맺은 계약의 징표일세. 이 결계는 힘으로는 결코 깨지지 않아."

아잘록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마치 정답을 가르쳐주는 교수 같은 태도였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힘을 밀어넣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 이 손을 놓치면, 그대로 끝이었다. 결계가 일렁일 때마다 잿가루가 흩날리고,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잘록의 얼굴이 저 편에서 어른거렸다. 힘싸움의 형세는 절망적이었다. 결계는 오히려 더 두터워지고 있었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힘을, 조금만, 더 힘을.

모든 힘을 쥐어짜내 손잡이에 밀어넣으며 아이는 또다시 기억에 손을 댔다. 텅 빈 몸뚱이에 남은 기억은 어린 시절에 쌓은 것들뿐이라서, 문지르면 지워질 것 같은 시시한 일들뿐이라서, 아주 작고 가냘펐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었다. 기억의 상자를 열고 간직했던 것들을 꺼내 선주에게 건네줄 때마다 아이의 의식은 낡은 성곽처럼 허물어져갔다. 깊은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고, 깨어날 수 없는 꿈 속으로 떨어져가는 듯도 했다. 수많은 주마등을 헤치고 하염없는 어둠 속으로 깊이 추락할 때, 가슴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따뜻함이 번져왔다. 알 수 있었다. 이걸 건네주면, 정말로 끝이라는 것을. 그래도, 할 수 있다면.

"아."

탄식했다. 거울같은 결계의 표면에 어떤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란페이였다. 헤카톤 케이레스의 몸뚱이 위에서 박투를 하고 있었기에, 가슴팍에 매달린 그녀의 얼굴이 비쳐 보였던 것이었다. 그 순간, 어떤 망설임이 아이를 덮쳤다.

선주에게 기억을 전부 넘겨주면, 이것도 잊어버리게 되는 건가.

그 찰나의 망설임은 치명적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유골은 괴성을 내지르며 오른팔을 내뻗어 아이를 움켜쥐었다. 하얀 뼈마디는 아이의 몸을 빈틈없이 구속하고, 과즙을 짜내듯 쥐어짰다. 저항할 수 없었다. 피와 신음이 뒤섞인 숨을 토하고, 잠시 몸부림치던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경련하던 발도 이내 떨림을 멈추고 교수대의 시체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놀랍군."

반면 아잘록은 태연했다. 미제리코드가 손등을 완전히 꿰뚫고 손바닥으로 튀어나와 혈관에 독을 부어넣어서, 팔꿈치까지 검녹색으로 썩어가고 있었는데도 그 음성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이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단검을 뽑아 던졌다. 잿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들어 괴사한 아잘록의 팔을 휘감았다. 그것이 회반죽처럼 상처에 스며들어 새살을 돋게 만드는 듯했다. 헤카톤 케이레스는 날개짓을 멈추고 반쯤 폐허가 된 알현실의 바닥에 내려앉았다. 붙들린 아이 바로 앞에 아잘록이 다가섰을 때, 그 팔은 이미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놀라워."

아잘록은 발걸음을 멈추고 탄식했다. 그 탄식에 담긴 것은 증오나 분노가 아니었다. 순수한 경탄이었다. 나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듯, 미간을 찡그리던 아잘록은 새 외알 안경을 꺼내 쓰고 아이를 응시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에게 묻는다기보단 현상을 관찰하는 듯했다. 그는 검지와 엄지로 아이의 턱을 붙잡고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긴 속눈썹과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 아잘록은 손가락을 내뻗어 천천히 그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기시감이 아잘록을 덮쳤다. 먼 옛날에도, 분명히 이런 일이 있었다.

"설마!"

드러난 눈동자는 복잡한 심홍빛이었다. 세상의 어떤 염료로도 재현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특징적인 색채는 아잘록의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틀림없었다.

"아, 그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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