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행복 ( 12 )
나하트가 막 탈주해서, 그가 데리고 간 실험체를 찾으러 분주히 돌아다니던 때. 그 때 북서 자치령에서 보고 지나쳤던 그 어린아이가 틀림없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아잘록을 흥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열정, 바로 학문에 관한 열정이 불길처럼 일어나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외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방언을 쏟아붓던 그는 곧 결론을 내렸다.
"어리석었다. 나하트의 실험체가 맞았어. 아아, 그래, 저주 속에서 태어난 것에도 영혼은 깃드는가. 모성은 위대하군. 그렇다면."
그는 손톱을 세워 아이의 뺨을 길게 베어냈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살갗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아잘록은 그 상처에 입을 가까이 대고, 술을 들이키듯 피를 맛보았다. 마치 실험체를 검체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피를 음미하던 아잘록은 다시금 경탄한 듯 중얼거렸다.
"쓰레기야. 이 걸작에 비하면, 내가 만들어온 어떤 것도 전부 쓰레기다."
유리알 너머로 비쳐보이는 그의 눈동자에선 희열이 들끓었다. 그에게는 갑자기 등장한 아이의 존재가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이마를 맞댄 채로, 그는 하나씩 조건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초인의 외신이 되기 위한 조건을.
"신의 피는 이어받았다. 또 어떤 자의 사도인 것도 분명해 보이는군. 그리고, 고결하다. 그래, 영웅이라고 칭송받기 충분한 삶을 살았고. 모자란 것이 있다면..."
길 아잘록은, 헤카톤 케이레스 대신 아이를 외신의 모판으로 삼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흥적이었지만 그 의지는 확고했다. 그가 여태껏 준비한 어떤 재료보다도, 눈 앞의 소년이 더욱 완벽한 걸작임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 뿐이었다.
"아직 절망하지 않았군."
아잘록의 눈에는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그 넋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끌어안고 웅크려서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영웅을 타락시키는 것, 순수한 영혼을 허무로 물들이는 것, 모두 그가 평생에 걸쳐 수없이 해왔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보람없는 파괴의 작업은 결함품으로 태어난 길 아잘록이라는 인간이 탁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작업이었고 또 유일하게 자부심을 느끼는 분야였다. 그는 그것을 과일의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길 아잘록은 헤카톤 케이레스의 손에 붙잡힌 아이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가 이마를 맞댔다. 물에 젖어 서늘한 감촉이 이마 가득 번져왔다. 또다시 잿바람이 일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신음하는 아이에게, 아잘록은 나지막히 물었다.
"괴로운가?"
대답은 없었다. 아잘록의 시선은 이미 이 세상이 아니라, 아이 우르드의 마음 속 세계를 겨누고 있었다. 그는 언뜻 자애롭게까지 들리는 음성으로 무언가를 설파했다.
"고통이 자네를 쥐고 있는 게 아니야. 자네가 고통을 쥐고 있는 것일세."
영혼을 침범당하는 아픔 때문일까. 경련하던 아이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잘록은 안타깝다는 듯 탄식하고 그 은빛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잘록의 검은자위는 형형한 빛을 뿌려댔다. 정신을 한가득 팽창시켜 아이의 영성 속으로 침투하면서, 그는 말했다.
"영안을 열고 삶의 본질을 받아들이게. 그래, 긴 여정이었어. 이제 편히 쉬어도 좋아. 기나센의 통령, 아이 우르드여..."
그 이름을 읊었을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기적이 일어났다.
"응?"
아잘록은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가 올라타 밟고 있는 헤카톤 케이레스가 괴성을 내지르며 이상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유골은 아이를 쥐고 있던 손을 뒤로 멀리 빼내고는, 양 손으로 깍지를 껴서 그 안에 아이를 숨겼다. 마치 아잘록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잘록이 발걸음을 내딛자, 유골은 다시 괴성을 내질렀다. 뼈로 이루어진 것도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그 음성은 끄트머리가 살짝 젖어들어 있는 듯했다. 울음소리처럼.
"설마?"
이 돌연한 반항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에 빠졌던 아잘록의 두뇌는 금세 원인을 찾아냈다. 아잘록은 고개를 홱 돌려 유모 잃은 유골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설이 맞았음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란페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잘록은 신음을 흘렸다. 란페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길게 흘러내려 턱을 적시고 있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박제된 몸뚱이에 그런 기능은 남겨두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고민하던 아잘록은 곧 답을 찾아냈다. 헤카톤 케이레스를 통제하는 것은 란페이의 본능이었다. 방금 아잘록이 아이의 이름을 말했을 때, 그 본능이 반응해서 아이를 숨긴 것 같았다. 아잘록은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아잘록은 분노하여 크게 소리질렀다.
"란페이 군,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인가?"
내지른 노호는 알현실에 크게 울려퍼졌다. 격벽에, 무너진 천장에, 망가진 여신상에 부딪혀 메아리치던 그 이름은 헤카톤 케이레스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들어와 아이의 귀에 닿았다. 귓바퀴에 감겨들어간 그 세 글자는, 기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그마한, 하지만 소중한 힘을 주었다. 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아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말을 듣지 않는군. 뭐, 어차피 쓸모를 다했으니 괜찮은가. 안타깝게 됐어."
아잘록의 목소리가 어둠 저편에서 들려왔다. 이어, 붉은 빛과 강렬한 충격파, 무언가가 부서져나가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포격으로 손뼈를 부수고 아이를 꺼내려 하는 것 같았다. 저 너머에 있을 아잘록의 얼굴이 아이에게는 선명히 보였다.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상처투성이인 몸을 일으켜 세운 어린 순례자는, 검을 집었다.
"고마워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을 인사였다.
"그동안, 행복했어요."
어쩐지 아늑함이 몰려왔다. 가물거렸던 의식이 완전히 녹아드는 것을 느끼며, 희미하게,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
"커헉!"
푹, 뭉툭한 검이 뼈마디를 뚫고 치솟아 아잘록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음 포격을 준비하던 아잘록의 입에서 핏물이 한 움큼 솟구쳤다. 자랑하던 재의 결계는 그 검에 꿰뚫려 형편없이 부서져 있었다.
"윽, 이, 무슨..."
아잘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바라보았다. 검이라기보다는 장식품처럼 보이는, 색유리로 이루어진 검날이, 뼈도, 결계도, 자신의 심장마저도 쳐부수고 등 너머로 삐져나와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클라우 솔리스. 아무것도 벨 수 없었던 그 검은 지금, 계약을 베는 검으로 완성되어서, 이 시대의 유령을 확실하게 쳐부수었다.
"어,째서..."
아잘록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의 피륙은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알현실이, 황궁이, 정원이, 교회의 함석 지붕이, 망가진 헤카톤 케이레스의 육체가, 이 무채색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한 바탕 봄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째서?"
사라지기 직전, 아잘록이 남긴 유언은 그것이었다.
*어느새 들녘에도 동이 텄다.
깨끗한 미명이 자줏빛 어스름을 몰아내서 하늘은 씻은 듯 맑아오고, 눈부시게 쏟아진 햇살은 아셀라이의 황금빛 머리칼에 흰 띠를 그렸다. 전장 한 가운데에서 그녀는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피에 젖은 채로 해골과 검을 맞대던 아셀라이는, 자신을 덮치던 직검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뒤돌아선 아셀라이는 손차양 너머로 황궁을 바라보았다. 이어 환한 미소를 가득 베어물고, 소리쳤다.
"제군들! 고개를 들어라!"
황궁을 감싼 반구형의 결계가 신기루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수만을 헤아렸던 망자의 군대도, 마술사도, 용도, 모두 먼지가 되어 여명 속에 흩어졌다. 그 광경은 한 가지 명료한 사실을 전달했다. 승리를. 아셀라이의 선언에 이어, 기쁨의 함성과 나팔 소리가 아침 들판 가득 울려퍼졌다.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남녀도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사람, 영문 모를 눈물을 흘리는 병사도 있었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아셀라이의 긴 머리채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해냈구나."
그 환희의 현장 한 가운데서 아셀라이는 남다른 감회에 젖어 있었다. 부옇게 먼지가 낀 지평 너머에서 미소짓고 있을 아이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이 승리의 정확한 구조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들판을 훑어보던 아셀라이의 눈에 문득 어떤 사람이 비쳤다.
"응?"
그건 다나였다. 그녀 역시 승리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견스러움으로 가득한 아셀라이의 표정과 다르게, 다나의 얼굴에선 초조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위태롭게, 긴 소매를 허우적거리며, 그녀는 두서없이 뛰어가는 중이었다 아셀라이는 휘청이는 다나를 붙잡아 부축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다나는 자신을 떠받친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깨달았다. 그녀는 가슴팍을 더듬어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에요, 빨리,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요..."
다나 역시 이 승리의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히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일 터였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아셀라이가 알지 못하는 불안으로 떨고 있었다.
"알았다."
물끄러미 다나의 감긴 눈을 쳐다보던 아셀라이는 검지와 엄지로 손피리를 불었다. 경쾌한 소리에 히히힝, 투레질 소리로 호응하며 한 마리의 준마가 이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치렁한 갈기를 붙잡고 능숙하게 안장에 올라탄 아셀라이는 곧 손을 내뻗어 다나를 곁에 태웠다. 꽉 붙잡아라, 단호한 음성으로 주의하곤 고삐를 세게 쥐어잡았다. 말은 긴 밤을 지새우고도 생명력이 넘치는지, 역동적으로 상체를 쳐들고 크게 투레질했다. 곧 두 사람은 빠르게 평원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무너진 성터, 아이의 싸움터를 향해서.
"제발, 제발..."
아셀라이의 등에 매달린 다나는 그 질주 속에서도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기도하고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느냐고 물으려던 아셀라이는 질문을 삼켰다. 고삐를 죄어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우릴 떠나지 말아요..."
얼굴을 파묻은 채로, 작게 읊조린 말은 바람결에 흩어져 아셀라이의 귀에 닿지 못했다.
*마침내 밝게 개어온 하늘에선 수만개의 별이 어스름 속으로 스러지고 있었다.
그 고요한 하늘을 등지고 림은 날아들었다. 폐허로 무너져내린 왕궁의 돌더미 위에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허물어진 알현실의 외벽은 기묘한 파사드를 이루었다. 손을 대면 무너질듯한 입면의 너머에는 완전히 가라앉은 세상이 있었다. 마치 고대의 원형경기장의 바닥처럼 보였다. 그 둥근 지면 한 가운데에, 사람의 형상이 희끄무레하게 눈에 들어왔다.
림은 초조하게 그 형상을 향해 다가갔다.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때, 위태하게 버티고 섰던 외벽이 무너져 먹먹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걸음을 옮길수록 형상은 더욱 더 선명해졌다. 그 형상 앞에서 림은 우뚝 멈춰섰다.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 등 뒤에서는 눈을 감은 란페이가 팔을 벌려 아이를 껴안고 있었다. 뺨을 등에 기댄 채였다. 돌아온 가족을 맞아 주는 것처럼.
혹시 그녀가 살아나 깨어난 것인가,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저 여인의 몸뚱이에 생명의 자취는 없었다. 아마도 헤카톤 케이레스의 몸이 먼지로 흩어지고, 그 가슴팍에서 떨어져내리면서, 기막힌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쳐 저런 모습을 취하게 된 것 같았다.
얼마만큼의 확률일까. 그 덧없는 기적을 말없이 바라보던 림은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분명히 아이는 이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남았다.
영혼을 모두 넘기고 완전히 소멸했는가,
아니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는가.
림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섰다. 검에 몸을 기대어 앉은 아이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싸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단정한 입가에선 하얀 숨이 옅게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입을 열고 말할 것 같았다. 림, 있어? 라고.
"연자여."
아. 림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히 그가 알던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무사했군. 다행이야."
그건 선주의 목소리였다.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 속에, 어릴 때부터 지켜봤던 소년의 자취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림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예상했다. 하지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입을 벌린 채로 림은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때문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 목소리가, 그가 알던 또 다른 사람, 선주의 것과도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란페이의 품에 안긴 채로 선주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기억을 곱씹기 위해서였다.
'너는 내가 본 모든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상냥한 아이였단다.'
작고 따뜻한 방, 그보다 더 작지만 단단한 품에 안긴 채 들었던 두 마디.
이것이 아이가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었다.
"그렇군."
선주는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천천히, 무언가를 음미하는 것처럼, 선주는 감은 눈을 떴다.
"너에게 세계는 항상 이렇게 보였구나."
처참하게 무너진 창백한 폐허 위로 말간 하늘빛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이 남루한 파괴의 현장도, 어째서인지 지금 선주의 눈에는 아름답게만 비쳤다. 손을 들어 가슴을 어루만졌다. 흉터로 늘 텅 비어 있던 자리. 그 자리에는 지금, 아이가 살아온 모든 기억과 삶이 한 권의 책처럼 곱게 접혀 간직되어 있었다.
때로는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언제나 텅 비어있던 가슴이 무언가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수라도를 끝내 그리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이유를 어쩐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 선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란페이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반석 위에 눕혔다. 어디선가 불어온 소슬한 바람이 긴 머리를 흔들고 사라졌다.
"연자여."
잠시 말을 멈추었다. 긴 침묵 끝에 선주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받은 목숨, 이 얼간이에게 돌려주고 싶다."
림을 등지고 선 채였기에 선주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뜻을 얼른 파악하기 어려웠다. 선주가 무릎을 굽혀 검을 집어들고 난 후에야 림은 그 뜻을 깨닫고 되물었다.
'방법이?'
"들은 게 있지 않나. 그 여자에게."
엄지를 튕겨 칼집에서 칼날을 꺼내며 선주는 말했다. 손톱만큼 드러난 검날에 아침 햇살이 부딪혀 눈부시게 빛났다. 그 서늘한 빛을 보는 순간 불현듯 떠올랐다.
륜이 말했던 방법. 완전히 망가져 불 꺼진 영혼을 살리는 방법. 아나테마가 검에 심장을 내주면서, 그 모든 신기를 흘려보내어 주면 된다고 했었다.
이 검으로, 함께 소멸해서 아이에게 삶을 돌려주자. 선주가 건넨 것은 그런 제안이었다. 어느새 뒤돌아선 선주는 검을 집어든 채 림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림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신님, 부디 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굽어 지켜봐 주시기를...'
그 날 들었던 기도를 떠올렸다. 만약 거부한다면, 이것이 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의 끝이라면, 자신은 그 기도를 들어준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끝이라면, 설사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거부하고 싶었다.
'그런가. 그것도 내 소임이겠지.'
림은 날개를 접고 선주의 바로 앞에 내려앉았다.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웠다. 눈에 들어온 선주의 표정은 평온했다. 검집에서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적막한 폐허에 길게 울려퍼졌다. 두 손으로 검을 받쳐든 선주에게, 이번에는 림이 물어보았다.
'하지만 괜찮겠나.'
이 의식을 마치면 선주 역시 소멸하게 될 것이었다. 그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선주는 말없이,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림은 그 눈을 응시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
선주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많은 생각이, 많은 낱말과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대답은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해 주었던 말이었다.
"그냥, 이 녀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