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후일담 #1. 꼭대기에서
"죽는 것을 옳다고 보았다..."
레고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피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리자, 탁 트인 시야 가득 버들밭이 들어왔다.
이불솜처럼 새하얀 버들밭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길게 물결쳐서, 이지러진 달빛은 어지러운 선을 그렸다. 바람이 너무 거세어 버들이 깊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시체였다. 카나기의 무복을 입은 시체가 수십 구나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풀밭 아래 시체의 지층이 퇴적된 것 같았다. 레고르는 무너진 망루 꼭대기에 걸터앉은 채로 그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기묘한 광경을 응시하며, 레고르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 나라는 죽는 것을 옳다고 보았다. 꽃과 풀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듯이, 축복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데도, 깨닫지 못한 채 뗏장 아래서 평생을 허우적거린다.'
몇 시간 전, 이 버들밭에서 격렬한 싸움이 있었고, 끝났다. 달빛을 머금은 서풍이 잘린 억새풀 더미를 걷어내자 부부의 시체가 드러났다. 자신이 직접 베어낸 부부였다. 남편의 팔을 먼저 잘랐고, 아내는 뒤로 물러섰다. 그는 아내를 도망치게 하려고 가망 없는 싸움에 몸을 던졌고, 이내 두 토막났지만, 아내는 다섯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쓰러진 아내의 목에 칼날을 내려찍기 직전, 그녀는 이름을 불렀다. 남편의 이름이 아니었다. 살덩이에서 칼날을 뽑으면서 생각했다.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엇갈린 두 구의 시체를 바라보는 레고르의 옆얼굴에 달빛이 서려 기묘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레고르는 다시 앞머리를 걷어올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했다.
'내 무정한 조국, 밤이 다가오면 가장 먼저 고요에 파묻히는 나라, 까마귀와 까치가 늘 떼지어 몰려드는 곳. 내 어머니의 피가 비롯된 이 나라는, 죽는 것을 옳다고 보았다.'
'봄에 지는 꽃과 겨울을 버티는 풀이 정해져 있듯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과 그럴 수 없는 삶은 태어날 때부터, 물과 기름의 경계처럼 분명히 정해져 있고.'
'바닥에서 태어난 자들, 가지지 못한 자들이 행복이라 여기고 소중히 하는 것은 모두 애처로운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 꼭대기에서는. 이 자리에서는 이토록 선명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엷은 버들잎 아래 몸을 뉘인 이 나라는 천 년 그리고 또 천 년을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레고르는 낡은 회벽돌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표범처럼 가뿐한 착지였다. 레고르는 무릎으로 풀섶을 헤치며 자신이 베어낸 남편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핏기가 가신 시체의 피부는 종이처럼 파리했다. 손을 들어 감긴 눈을 열어보았다. 그 불 꺼진 망막에는 어둠이 고여 피안을 비추고 있었다.
'언젠가 깨닫고야 말 그 진실을 깨닫기 전에, 명예롭게 죽는 것. 이 나라는 그것을 옳은 죽음이라고 보는 듯 했다.'
올려다본 하늘은 높았다. 제비꽃처럼 짙푸른 성운이 구름에 덮인 달을 띠처럼 휘감고 있었다. 레고르는 실용적이지 않은 생각을 싫어했다. 무가치한 우울에 젖는 것은 정신적 자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시도때도 없이 솟아오르는 이 생각들을 통제하는 것이 더없이 힘들었다. 여기까지는 과거에 했던 생각들이었다. 이쯤에서 늘 담배를 빼어 물고, 더 사고하는 것을 중지해왔다.
'이 죽음의 나라에 당도한 이후에,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끝낼 수 없었다. 마침내 푸르스름하게 드러난 보름달을 멍하니 응시하며, 레고르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막아놓은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깊이 억눌러왔던 상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둥치에 기대어 침묵하면서, 이 나라의 관습대로, 그녀는 분류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판단하기에,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괴물이었다.'
'그러니, 이 저주받은 세상을 살아서 견뎌내느니, 차라리 지금 죽어서 떠나라는 의미였다.'
'그녀도 그것을 옳다고 보았을 터였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왜 거짓말조차 해주지 않았냐는 것.'
'사랑한다고, 꼭 찾으러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마디만 해 주었다면.'
'그날 그 동토에서 웅크린 채로 죽을 수 있었을 텐데.'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피식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레고르는 잘린 나무 밑둥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이런 유약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치솟게 된 계기는 분명했다. 길 아잘록과의 전쟁이 끝나고 보았던 어떤 광경 때문이었다.
옛날에 만났던 한 아이를 떠올렸다. 더 이상 파괴당할 수도 없을 정도로 버려지고, 또 배신당했던 아이. 당연히, 같은 종류라고 생각했다.
'그럼 사형은 뭔데요. 자기가 검이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자입니까?'
그러나 달랐다.
언제나 녀석은 수 많은 사람들 품에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폐허에 도착했을 때, 레고르는 보았다. 수백, 수천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하지만 레고르는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뒤돌아서서 탄식할 뿐이었다.
왜 내게는 삶이 하나의 질곡이고 너에게는 축복인가?
삶이 그러했을지언대 왜 죽음마저 네 쪽이 더 아름다운가.
"저, 괜찮으십니까?"
상념에 젖어 있던 레고르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딘가 걱정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진홍색 법의를 뒤집어 쓴 아탕칼리의 수녀가 눈에 들어왔다. 주황빛 귀밑머리를 치렁하게 기른 여자였다. 놋쇠 십자가를 움켜쥔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도 눈물을 흘리는군요."
그제서야 레고르는 자신의 눈가가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나무둥치에 휙 걸터앉고, 고개를 돌렸다. 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고 있을 때, 웃기는 제안이 들려왔다.
"혹시, 죄책감을 느끼시나요?"
"전혀."
"그렇다면 간단하게 고해를 들어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 여자는 레고르가 사람, 그것도 자신의 동료였던 카나기의 고위층을 죽인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착각한 듯 했다. 레고르는 두툼한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짙은 연기를 토하며 일축했다.
"받더라도 너한테는 아니겠지. 피차 지옥에 떨어질 텐데."
비꼬는 듯한 어조에 수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레고르는 담배 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쓸데 없는 참견할 시간이 있으면 일이나 빨리 시작해줬으면 좋겠군."
"그러죠."
대답은 짧았다. 그녀는 품에서 갈색 병을 꺼내들었다.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그 진갈색 병에는 시꺼먼 기름 같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마개를 따자마자, 버들밭에 감도는 피비린내보다도 지독한 냄새가 사방에 퍼져나갔다. 수녀는 성호를 긋고,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그 액체를 시체 위에 뿌렸다.
액체는 마치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상처 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시체는 검붉은 색으로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이형의 수족, 장기, 눈알 따위가 변색된 살점 위에 종기처럼 돋아나고, 터지기를 반복하며 괴이쩍은 형상을 이루어갔다. 옛날, 나사렘에서 참극을 일으켰던 시체를 외신으로 바꾸는 물약. 방금 수녀가 뿌린 것은 그 물약이었다. 마침내 게와 인간을 합친 것과 같은 기이한 형상으로 완성이 끝난 외신은, 기성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비켜."
수녀는 연신 성호를 그으며 뒤로 물러서고, 레고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 손에는 짐승의 이빨처럼 예리한 대태도가 들려 있었다. 외신은 새로 생긴 집게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들었다. 레고르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태도를 비스듬히 휘둘렀다. 잘린 버들잎이 달빛 아래 휘날리고, 또다시 두 토막이 난 시체는 피를 흩뿌리며 풀밭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다음."
슥, 칼을 납도하고 레고르는 말했다. 과거 자신의 동료였던 무반을 두 번 죽이고도, 그 음색에는 한 점 흔들림조차 없었다. 수녀는 심호흡을 하고, 풀밭에 널브러진 다음 시체에 또 약물을 쏟아부었다. 다시금 시체는 고깃덩이로, 그리고 외신으로 변해가고, 레고르는 대태도로 그것을 쓰러뜨렸다. 같은 작업의 반복이었다. 약병이 텅 빌 때까지 거듭된 그 작업이 끝났을 때, 달은 이미 저 편으로 저물어 있었다.
"이걸로 끝인가?"
그렇게 수 많은 외신을 베었는데도 레고르의 대태도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놀라운 예리함이었다. 계속 이형의 외신을 마주한 탓에 구토감이 몰려온 듯, 수녀는 무너진 벽을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는 중이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슥 닦은 수녀는 질렸다는 듯 물어보았다.
"빈말로라도 괜찮냐고 안 물어보는 건가요?"
"따질 기운이 있는 걸 보니 괜찮겠군."
레고르는 능청스럽게 대답하고 칼을 납도할 뿐이었다. 수녀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성인께서는 왜 이런 자와 손을 잡은 건지... 그런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내가 왜 그 늙은이와 손을 잡았는지를 궁금해야 하는 것 아닌가. 레고르는 이죽거리려다 말을 삼켰다. 지금 아쉬운 입장인 것은 그였기 떄문이었다.
"그럼 이제 정리하죠. 오늘 있었던 일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이 자들은 새 황제가 혼수 상태에 빠져 제국이 궐위인 틈을 노리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 금지된 힘을 빌려 당신을 암살하려 했던 겁니다. 당신은 불의의 습격을 받았으나 백양궁의 주인답게 암살을 받아친 것이고요. 내일 조사관으로서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명심하지."
"저 뿐만 아니라 이 교구를 관할하는 주교도 한 분 모셔야 하니까요. 그때는 지금보다 나은 태도로 손님을 맞아주시길."
"걱정도.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나."
레고르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금 주섬주섬 담뱃갑을 꺼내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전혀 훌륭한 태도가 아니었다. 염려 섞인 표정을 짓는 수녀에게 레고르는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대가는 어떻게 지불하면 되지?"
그 말에 수녀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몇 번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수녀는, 비웃음을 베어물고 있는 레고르의 얼굴을 보고 그 질문의 의도를 깨달았다. 몰라서가 아니라, 비꼬고 즐기기 위해서 물어본 것이 틀림없었다. 수녀는 표정을 굳히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아실 텐데요."
"뭐, 죄책감을 느끼는 거라면 간단하게 고해를 들어줄 수도 있는데."
"닥치세요."
쏘아붙이듯 대답하고, 수녀는 휙 뒤돌아서 멀어져갔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레고르는 그 뒷모습이 완전히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서서 응시하다가, 떠나자마자 밑둥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혼자 남자 다시금 지독한 잡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세 배로 독한 담배로도 몰아내기 힘든 생각들이었다. 놀리지 말고 더 오래 붙잡아둘 걸 그랬나. 아쉬워하던 레고르는 문득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꺠달았다. 외로움이었다.
'더없이 슬픈 표정이구나, 순례자야.'
"꺼져라. 망령."
그와 동시에 불청객이 말을 걸어왔다. 에단이었다. 반사적으로 바로 손사래를 쳐 쫓아내면서, 레고르는 자신이 매우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남으면 계집아이처럼 외로워하는 주제에, 누군가 곁에 오면 바로 모독해서 쫓아낸다. 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나에게만은 그러지 않아도 좋단다. 말했지, 슬플 때는 세상의 모든 말을 다 지껄여보거라...'
"어설픈 흉내는 그만둬라. 역겨우니까."
어설픈 흉내라는 말에 에단이 입을 닫았다. 레고르는 자신의 재주에 탄복했다. 누군가의 약점을 찔러 입을 닥치게 만드는 것, 그 일 하나에만큼은, 자신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집어던졌다. 언제까지고 우울에 젖어 있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레고르는 난폭한 압운으로 잡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괴물이라면, 인간과 살아갈 방법은 둘 뿐일 터다.
왕이 되거나, 가축이 되거나.
'훌륭한 결론이구나, 어린 순례자야.'
"닥치라니까."
에단과 말다툼을 하며, 들판을 헤치고 걸어가는 레고르의 허리춤을 달빛이 비추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대태도는 월광을 빨아들여 눈부시게 반사했다. 그 검면에는 두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유혼이라는 두 글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