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끝의 시작 ( 2 )
이른 새벽부터 륜의 방은 부산스러웠다.
그녀가 아주 일찍부터 몸단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지러운 방, 침대 위에는 륜이 허물처럼 벗어던진 옷들이 즐비했다. 륜은 전신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기도 하며 뚫어져라 거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흰 속치마가 달린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속이 비쳐보이는 꽃 패턴의 레이스 소매가 인상적인 원피스였다. 옷자락을 살며시 붙잡은 그녀는 몇 분씩 뒷모습을 보기 위해 끙끙대고 있었다. 륜의 작은 체형에 맞게 수선을 했는데도 기장이 조금 커서, 치마가 끌리는 것 같았다. 륜은 서랍에서 리본을 꺼내 살짝 묶어서 틀어올린 다음, 또 뒷모습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
"괜찮나?"
어렸을 때 썼던 리본이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볼 때, 문 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 둘이 트롤리를 끌고 지나가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넌 그 나이 먹고 머리에 그게 뭐니?"
"왜?"
"어린애도 아니고 리본 같은 건 일곱 살이면 졸업해야지. 빨리 떼."
머리띠에 작은 리본이 달려 있다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그 말을 엿들은 륜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얼른 허리에서 리본을 끌러 서랍장에 집어넣었다. 륜은 그제서야 길고 길었던 준비를 마치고, 널브러진 옷을 대충 서랍에 밀어넣곤 방문을 나섰다.
저택의 복도는 깔끔했다. 어느새 완연히 밝아온 아침햇살이 창마다 들이쳐 진홍색 카펫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창가를 지나칠 때마다 빛 속을 헤엄치는 느낌이라서, 복도를 걸으면 걸을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지금 아이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한 륜은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가다듬고, 손등으로 떡갈나무 문을 두들겨 노크했다.
"일어났어요?"
대답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두드리고 물어보았다.
"들어가도 될까요?"
여전히 조용했다. 륜은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 방에는 테라스가 있어서, 저택의 어떤 곳보다도 환한 빛이 들이쳤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 창가의 우듬지에서는 맑은 새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흰 침대에 누운 채로, 햇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대리석 테라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륜은 잠시 그 옆얼굴을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가슴이 조그맣게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수도 없이 보아온 얼굴이지만, 늘 볼 때마다 이렇게 한 구석이 설레왔다. 아이는 여전히 반응 없이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륜이 바로 곁에 다가와, 다소곳이 침대 곁에 앉을 때까지도 그랬다.
"잘 잤어요?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요?"
그리고 어제 두고 간 송어구이 접시를 발견했다.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 책망하는 말이 먼저 나갔다.
"또 하나도 안 먹었어요?"
륜은 신발을 벗고 포근한 침대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선이 무엇을 응시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많았다. 답이 많은 문제를 생각하는 것처럼, 또는 답이 없는 문제를 생각하는 것처럼 늘 혼자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림을 만나기 전에, 꼬맹이였던 아이가 그랬듯이.
"자, 아."
차갑게 식은 송어살을 포크로 한 입 떠서, 륜은 아이에게 내밀었다. 반응은 없었다. 부유하는 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륜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아이가 말을 들어주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 요리, 깨어나면 해 주고 싶어서, 1년동안 열심히 연습한 건데..."
그러자 아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숨을 옅게 내쉬고, 아이는 드디어 고개를 돌려 륜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그리고 아기새처럼 하얀 살을 받아먹었다. 화색이 된 륜은 활짝 웃으며 연신 포크질을 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운 후에, 륜은 또 무언가를 영차 끌고 왔다. 휠체어였다. 방 안에 뿌리내린 듯 앉아서 움직이질 않는 아이를 위해서 주문한 것이었다.
"오늘은 바깥에 좀 나가볼까요? 특별히 주문한 건데.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요. 그래서, 이 휠체어, 제가 현관에서부터 끌고 온 거에요."
성의를 강조하자 아이는 군말없이 휠체어에 올라탔다. 예상대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륜은, 휠체어를 밀면서 저택의 정원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처음으로 아이보다 높은 곳에 서서, 륜은 아이가 잠들었던 동안 세계에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도가 완전히 초토화되었기에 옛 도읍으로 천도했다는 것, 이 곳은 그 황궁에 딸린 별채라는 것, 달라진 제도, 달라진 많은 사람들.
아이는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쩐지 나와 관계없는 먼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휠체어는 어느새 정원에 딸린 호수에 도착했다. 맑은 호숫물은 햇살을 머금어 금빛 물비늘을 그려냈다. 륜은 호수 앞에서 멈추었다. 탁 트인 시야에는 빛과 물뿐이었다.
잠시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륜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금세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는 멍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 빈 자리를 느끼는 것 같아요."
무엇의 빈 자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림을 뜻하는 게 틀림없었다. 조심스레 팔을 움직인 아이는 심장 어림을 매만졌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함께 있었어요. 그 녀석 없이, 혼자 있었을 때는, 너무 옛날이라서... 그 때는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걸 떠올려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어요."
침묵하던 륜은 뒤에서부터 아이를 안아주었다. 검은 소매가 아이의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소매였다. 그제서야 눈치챈 아이는 소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건?"
"언니가 입던 옷이에요."
기억에 있었다. 란페이가 주말에 입던 옷이었다. 뒤돌아보자, 륜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깨어난 이후,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륜과 눈을 마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륜은 더욱 세게 아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저한테는 아직 커서, 고쳐 입었어요. 좋아해줄 것 같아서."
어쩐지 그리운 향기가 났다. 아이는 길게 늘어진 옷소매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중에, 조금 더 기운을 차리면, 같이 가 볼래요? 언니의 묘에."
란페이의 장은 국장으로 치러졌다고 했다. 자신에겐 이렇게 생생한 란페이의 죽음이, 사람들에겐 이미 묘비 너머의 일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검은 소매에 파묻힌 채로,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생기가 조금 돌아온 아이는 침대에서 벗어나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밤공기가 스민 거울의 표면은 연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기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지독하도록 낯설었다. 살면서, 거울이 있는 방에 머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이마를 기댔다. 감촉은 서늘했다.
"안 자요?"
그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말을 걸어왔다. 륜이었다. 방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그녀는, 곧 부끄러워하며 걸어들어왔다. 얇은 속옷 차림인 그녀는 커다란 베개를 안고 쭈뼛대고 있었다.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에게, 륜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 오랜만에, 같이 자고 싶어서."
아이는 말없이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가 륜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작았다. 간신히 깍지를 낄 수 있을 정도였다. 힘없이 베개를 떨어뜨린 륜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저?
말없이 침대에 륜을 눕히고, 그 옆에 누웠다. 체격 차이는 현격했다. 고목과 매미 같았다. 아이는 한 손은 깍지를 낀 채로, 륜의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밤바람이 불어 커튼을 흔들고 달빛을 쏟아부었다. 잠시 당황한 채 침대에 누워 있던 륜은, 곧 아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이미 혼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돌아왔군, 그래."
그리고, 곧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장소는 꿈 속의 탑.
이 관으로 지어진 탑 한 가운데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길 아잘록이었다.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아잘록을 노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격분해서 아잘록을 베어넘겼다. 하지만 아잘록은 베어도, 죽여도, 계속해서 유령처럼 나타났다. 매일 밤 꿈에서 그것이 반복되었다. 지금은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원치 않는 말동무를 맺은 상태였다.
"꺼지세요."
아이는 아잘록을 밀쳐내고 탑의 지하를 향해 걸어갔다. 곧, 전경 가득히 샘이 차올랐다. 샘 가까이로 걸어간 아이는 고개를 숙여 샘에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륜과 함께 보았던 호수의 전경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이, 샘 가득 떠올라 있었다. 샘을 화폭 삼아 목가적인 풍경을 그려낸 듯싶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기에 좋은가?"
"이 샘은 뭐죠?"
질문에 질문으로 되받았다. 아잘록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직관으로 알 수 있었다.
예지의 샘.
아지프의 성물이자, 미래를 보는 샘.
나하트와 선주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샘.
"그래서, 이게 왜 여기에 있냐는 거예요."
아잘록은 짧은 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글쎄. 그대, 특히 그대가 마음에 품은 세계는 이 세상의 경이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경이일 테야. 그러니, 또 다른 경이가 그대의 정신 속에 재현되었다 해도 놀랄 것은 없겠지."
"거짓말은 아니겠죠?"
"알고 있을 텐데.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몸이라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샘은 노을이 저무는 목초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어스름에 젖은 목조 풍차가 회전할 때마다 성채처럼 덩어리진 구름이 흘러서, 풍차가 세계의 태엽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평화로운 세계가 미래의 세계라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 이제 이 세계가 멸망할 일은, 없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아마도."
"운명은 이제 세계가 존속되는 것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그렇겠지. 지금 이 상태라면 말일세."
아잘록은 불길한 끝말을 덧붙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섬은 갑자기 파문을 일으키며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면에는 아이의 당황한 얼굴이 비칠 뿐이었다. 아이는 확 뒤돌아서 아잘록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게 뭐죠?"
그러나 자신의 뒤에 아잘록은 없었다. 그는 저 멀리, 샘의 상공에 떠 있는 승강기에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운명이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아직, 이 세계는 완생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리고 그는 천진하게 손짓했다. 마치 악우를 부르는 듯한 몸동작이었다.
"이 쪽으로 오는 건 어떤가? 이 자리에서는, 이 샘의 정경이 더욱 잘 보인다네."
아이는 아잘록을 노려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금세 승강기에 도착했다. 아이가 발을 들이밀자, 쇠사슬에 매달린 아지프 특유의 승강기는 육중하게 흔들렸다.
"여기, 이 자리에서 보게."
아잘록은 옆으로 한 발자국 움직이고 말했다. 아이는 천천히 그 자리로 걸어갔다.
그 곳에 엎드려서 샘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