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끝의 시작 ( 3 )
아침의 햇살이 눈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던 아이는, 무언가가 자신의 곁에서 꾸물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륜이었다. 꼭 매달려서, 손깍지를 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악력은 형편없었다. 잠깐 힘을 준 것만으로도 맥없이 깍지가 풀려 침대로 떨어졌다.
"아, 일어났어요?"
아침에 약한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충격에 깨어난 륜은 졸린 눈으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키더니, 잠시간 멍하니 햇살을 쬐며 앉아 있었다. 한참이나 눈을 부비던 륜은, 어설프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식사 준비를 해 올 테니까요!"
"그렇게 힘들면, 아침은 그냥 걸러도..."
"안 돼요!"
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아이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식물처럼 망연히 세상을 응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났다. 갑자기 쓰러지듯 잠에 드는 기면증은 여전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보통 사람처럼 살았다. 세 끼를 먹고, 바뀐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고, 또 밤마다 수련을 했다. 살아갈 의욕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륜은 그것이 자신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신이, 란페이의 묘에 아이를 데려갔던 덕분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잠시도 아이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지금 저 고집도, 그런 의미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아이는 천천히 이불을 치우고 욕실로 들어갔다. 타일의 차가운 감촉과, 알싸한 소독액 냄새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쏟아지는 찬물에 머리를 내맡긴 채로, 아이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아니에요.'
지금의 아이를 움직이는 건, 륜에 대한 정리 따위가 아니었다. 의무감이었다. 아잘록이 나왔던 꿈. 그 꿈의 탑의 지하에 있었던 예언의 샘. 그것이 비춘 미래가 아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길 아잘록과, 헤카톤 케이레스의 사멸로 세계의 미래는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평화로운 미래는, 지금도 무언가에게 위협을 받아서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들.'
아나테마, 또는 성도 8궁의 주인들. 그들 중 누군가가, 이미 확정되어버린 미래를 뒤흔들고 있을 것이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그 위협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 그 의무감. 그것만이 아이의 가슴부터 울대까지를 가득 메우고 박동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순 없으니까.'
씻기를 마친 아이는, 반라의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아 칼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귀르겐에게서 건네받은 검, 천갈궁은 여전히 시린 빛을 뿜고 있었다. 얄팍한 검면에는 아이의 얼굴이 이지러져서 비쳤다. 코에 가져다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쇳내가 비강 가득 몰려왔다. 가장 익숙한 냄새였다. 몸 안 가득히 스며든 그 철의 향기는 의무감과 부딪혀 거친 쇳소리로 울어댔다. 그 쇳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아직 그 건네받은 목숨으로, 무언가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짠!"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륜이었다. 벙어리장갑을 낀 그녀는, 하얀 김이 뿜어져나오는 냄비를 든 채 엉거주춤 방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스튜에요! 기나센 전통의 스튜!"
원래 요리와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던 그녀였지만, 달라져 있었다. 아이가 잠든 동안, 열심히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한 수행들이었다. 그 사실이 매일 아이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 하나하나에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수고와 노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식탁으로 내려오세요! 준비해놓을 테니까요!"
륜은 그 말을 남기고 계단을 달려 사라졌다. 아이는 천천히 내려가 식탁에 앉았다. 얼굴만 보아도 좋다는 듯, 륜은 활짝 웃으면서, 새가 지저귀듯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모습은 평범한 여자아이 같았다. 옛날처럼, 인격이 바뀐 것처럼 어두워지는 일도 없었다.
"내일은 같이 마르트 공원에 가 볼까요? 싫으면, 유람선을 타 보거나... 준비한 게 많이 있어요. 함께 하려고."
아이는 음식을 먹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종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방문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때를 잘못 골랐군."
그건 아우렐리우스였다. 평소의 주교복이 아닌, 야회복과 비슷한 옷을 입은 그는 중절모를 옷걸이에 얼고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말했다.
"금슬이 아주 좋은 모양일세. 다행이야."
"예?"
그 말에 륜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더니,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딱히 옷을 갈아입지 않아서, 속살이 언뜻 비쳐보이는 속옷에 앞치마만 두른 채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물끄러미 아우렐리우스를 들여다보았다.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때문인지, 거리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깊이 쉬더니, 외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식탁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났다고 하기에, 이야기나 좀 나눠볼까 했네만. 때가 좋지 않은 것 같군. 다음에, 시간이 되면 한 번 들러주게.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감사합니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아우렐리우스는 빙그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혹시라도 바깥에선 그런 행동, 하지 말아주게. 자네가 잠든 사이, 이미 대관식이 치러졌어. 지금은 명목뿐이지만, 자네는 이 신생 제국의 적법한 왕일세."
"그런,가요."
왕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생경하게 들려왔다. 자신에게 속하는 단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우렐리우스는 그 말을 마치고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사라져갔다. 아우렐리우스가 사라진 후에야, 주섬주섬 옷을 걸쳐입은 륜이 방에서 걸어나왔다.
"어머, 벌써 갔나요?"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다음에 들리라더군요."
"그런가요... 그리고, 이걸 놓고 갔네요?"
한 벌의 카드를 보고 륜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이건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카드 놀이에요. 잘 됐다, 오늘 오후에는 함께 이걸 하고 놀까요?"
륜은 머리를 틀어 묶고서는 의욕적으로 나섰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에는 익숙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바보와 마술사부터 시작해서, 심판과 세계로 이어지는 아르카나들. 먼 옛날, 나하트가 점을 칠 때 보았던 것과 같은 그림들이었다.
"상대가 어떤 카드를 들고 있을지 알아맞춘 다음, 이런 방식으로 족보를 구성해서 위치를 뒤집으면 이기는 게임이에요!"
륜은 천천히 룰을 알려준 다음, 과자와 음료를 잔뜩 가져온 후 게임을 시작했다. 아이는 조용히 륜의 말을 따랐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오후 내내, 두 사람은 아르카나로 이루어진 카드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기는 것은, 언제나 륜이었다.
"내일, 혼자 외출해도 괜찮을까요."
어떡할까, 이제 한 번 져줄 때가 됐나. 그렇게 고민핟너 륜에게, 갑자기 아이가 말을 꺼내왔다. 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내일요? 당연히 괜찮죠! 저한테 물어볼 것도 없는데요?"
그러나 그 행선지를 듣고 조금 안색을 굳혔다. 이제 라달라리아의 성녀로서 일하고 있는 다나의 집무실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내왔기 때문이었다. 륜은 카드를 내려놓으면서, 조금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요?"
"몸은 괜찮은가, 걱정이 돼서."
"아."
륜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잘록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다나는 선봉에 섰고, 또 시력을 잃었다. 싸움을 할 힘이 없어 집에서 기도를 올렸을 뿐인 자신과는 달랐다. 그것을 아이가 걱정하고, 또 병문안을 하러 가는 것은 당연한 도리처럼 느껴졌다.
"다녀와야지요, 당연히."
"고마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륜은 볼을 부풀리고 카드를 내려놓았다. 져 주려던 게임을 이겨서 자그맣게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물론, 아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나의 집무실은, 이제 라달라리아의 마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상당히 높은 보안과 접근 등급이 필요한 곳임에도, 아이는 아무런 제지 없이 최상층에 올라설 수 있었다. 소문 때문이었다.
아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륜과 다나는 숱하게 충돌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 과정에서 륜은 계약상의 약혼자고, 다나는 아이의 애인이었던 것으로 널리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아이의 얼굴을 본 율사들은, 작은 미소를 흘릴 뿐 아무도 아이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계단을 타고 오르던 아이는, 마침내 최상층에 도착해 문을 열어젖혔다. 연분홍빛 융단이 깔린 길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걷던 아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또인가."
블뢰유. 죽어버린 전대의 성녀. 그녀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접근하자 앙칼진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마치, 다나를 고생하게 만든 것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곧 단검을 들고 심장을 찔러왔다. 아이는 가만히 서서 그 일격을 받아들였다. 심장에 찌르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잠시 후, 블뢰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환영이기 때문이었다.
일전에도 한 번 보았던 적이 있는 환영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 이런 환영과 마주하는 일이 늘었다. 지금은 죽은 어떤 사람의 환영이 느닷없이 떠올라서, 아이를 공격하거나 비난하고 사라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피곤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어떤 마술의 후유증인가."
그 환영은 실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 닮아 있었다. 깨어난 이후로, 아이는 벌써 몇 번이나 이런 환영과 마주해왔다.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아이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쓸어 올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정을 연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방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여러 꽃향기가 뒤섞여서 풍겨왔다. 서향나무, 무화과, 붓꽃, 부처꽃, 소귀나무, 수레달구지꽃... 수 많은 꽃들이 곱게 담긴 채 뿜어내는 향기들이었다. 그 꽃들의 통로 가장 끝에 다나는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중해서 읽고 있었다. 아이가 들어온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소리없이 문을 닫고, 천천히 다나를 향해 걸어갔다. 예전과 다르게, 분홍빛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화관처럼 묶고 있었다. 블뢰유와 같은 머리모양이었다.
의자를 끌어 열중한 다나 옆에 앉고, 그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고난을 겪어온 그녀의 얼굴은, 이제 소녀티를 완전히 벗고 어른스럽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