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60화 (260/279)

43. 끝의 시작 ( 4 )

늘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까, 눈꺼풀이 더욱 치렁하게 자라난 것이 보였다. 집중해서 더듬어 마력으로 글자를 읽어나가던 다나의 손이, 문득 아이의 손에 닿았다. 다나는 그제서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팔을 내뻗어 아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뺨을, 코를, 그리고 이마를 더듬던 다나는, 갑자기 말갛게 웃으면서 얼굴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 입에서는 진한 잉크의 냄새, 그리고 이 방의 꽃 향기를 다 합친것보다도 더 감미로운 향기가 났다.

"다녀왔군요."

"예."

더듬어 품을 안겨드는 다나의 머리를 쓸어내리면서, 아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동안이나,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나가 해왔던 일에 대해서, 그리고 바뀐 세계에 대해서. 다시 만난 그녀는 확연히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겉모습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랬다. 죽어버린 성녀의 빈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사명, 그것이 그녀를 그렇게 바꾼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었어요?"

아이는 별 생각 없이 다나가 보던 문서를 건드리려 했다. 그런데 다나는 갑자기 팔을 더듬더니, 결사적으로 그 문서를 숨기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방어는 허술해서, 아이는 충분히 그 문서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

"봐, 봤죠."

다나는 문서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잠깐 탄식을 흘렸다. 그건 어떤 어린아이에 대한 조사 문서였다. 칼슨이 맡아 기르던 고아에 관한 문서. 굉장히 오랫동안 그 아이를 추적해온 듯, 문서의 두께는 두꺼웠고 첨부된 자료의 양도 보통이 아니었다. 언뜻 보니, 북서 자치령 어딘가에 정착하려 했다는 결론이 보였다.

그 아이는 다나가 과거에 저지른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아마도 마지막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수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전쟁의 선봉에 서서, 시력을 잃고도, 성녀 자리에 오르고서도 아직도 그녀는 그 사실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잠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다나의 얼굴을 보면서, 아이는 생각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그 때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밝힐까. 밝히는 쪽이 그녀에게 좋을까.

"아직, 일이 바빠서... 찾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조사가 끝나면, 반드시 제 발로, 찾아갈 테니까요..."

하지만, 그만두었다. 변명하는 다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과거의 일은, 그만큼 막중하게 그녀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 사실을 밝힌다면, 그녀는 자신이 용서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죄책감에 짓눌려 망가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비밀은, 내가 마지막까지 안고 삼키는 것으로.'

그 결심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다나의 방을 나섰다.

*그 다음날, 아이는 또 다른 옛 동료를 만났다.

마레였다. 마레는 새로 창설된 제국의 비상 행정기구에서, 정책을 총괄하는 직을 맡고 있었다. 그 직의 위세는 대단했다. 마레만을 위한 장서관이 하나 신축되어서, 전국 각지의 뜻 있고 재능 있는 인재들이 그 장서관에 몸을 담는 것을 간절히 소망할 정도였다.

가죽장정된 책과 서류더미 그리고 피곤에 파묻혀 있던 마레는, 아이가 나타나자마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어깨를 부딪혀 껴안았다. 얼핏 보니, 마레의 손에는 펜혹이 많이 생겨 있었다.

"고맙다."

"뭐가요?"

"그냥, 모든 게 고맙다."

짧은 인사였다. 하지만 그 짧은 인사에는 큰 힘이 담겨 있었다. 곧 둘은 장서관을 함께 거닐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서관은 넓었다. 주로 마레가 말했고, 아이는 가만히 경청했다. 장서관의 창은 어디나 널찍하고 크게 뚫려 있어서, 바람과 햇살이 모든 복도와 통로에 가득했다. 마치 햇살에 봉헌한 건물 같았다.

그 햇살 속과 선현들의 지혜 속을 거닐면서, 아이는 마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치렁했던 금발 머리를 운동선수처럼 머리를 바짝 올려쳐 깎은 마레는 예전에 북서 자치령에서, 심문관으로 만났을 때보다도 더 젊어 보였다. 아마도 눈빛 탓일 것이었다. 만성적인 피곤함이 엿보였지만, 그 눈은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모든 체계가 혼란한 것, 그리고 궐위라는 상황은 분명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국은 마레에게, 정확히 말하면 마레가 축적해온 복안에는 호재로 작용했다. 이러한 시대상황과, 아우렐리우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마레는 그 동안 서면에 쌓아두었던 수많은 창조적 대안들을 현실에 적용할 기회를 얻었다.

아이는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때 있었던 일들을 수없이 전해들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마레의 이름은 날짜나 서명처럼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마레의 활약상은 책 한권으로 요약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신에 가까운 규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거래구조를 제시해 곡물가를 안정시켰고, 전쟁으로 행정이 마비된 지역 여럿을 구제하고, 수많은 정치적 절충안을 찾아내어 수많은 비상기구를 입안하고 또 사분오열된 제국을 통합시켰다. 마레가 개인적으로 준비해두었던 연구들은, 마치 세계나 역사가 이 때를 위해 예비해놓은 것처럼 하나같이 빛을 보았다.

"네 덕분이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장서관을 일주하며 자랑하듯 그간의 역사를 훑던 마레는 툭 말했다.

"네 덕분에, 포기히자 읺을 수 있었다. 모든 걸."

"무얼요?"

"사람을 믿는 것을. 민중의 의지가, 결국 모든 것을 행복한 결말로 이끌 거라는 믿음을."

아이는 침묵했다.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 떨려왔다. 그날 밤, 자치령의 무너진 공터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오늘로 이어졌다고 생가하니 한없이 뿌듯했다.

아이는 마레의 손에 이끌려 다니며, 장서관에 보관된 그간의 흔적들을 안내받고 있었다. 그러던 아이의 눈에 문득 이질적인 것이 비쳤다. 구휼 물자를 대규모로 편성하도록 하는 제안서였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 흩뿌리듯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이는 그 제안서가 보관된 유리장을 향해 한 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멈춰섰다. 또 환영이 솟아나 그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자신이 죽인 사람일 텐데, 누군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갑옷과 복색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카나기의 무사였다. 그것은 길다란 칼을 휘둘러 아이의 목을 후려쳤다. 아이는 가만히 눈을 뜬 채 그 아픔을 받아들였다. 살이 베이는 감촉이 전신에 전해졌다. 환지통이 지릿하게 온 몸에 울리고, 이어 그 환영의 무사는 칼자루부터 녹아 사라졌다.

"이게, 뭐죠?"

환영을 이겨내고 한 발자국을 내딛어 유리장에 다가선 아이는, 곧 유리장을 열고 문서를 꺼내 훑어보았다. 그 구휼을 요청하는 문서 뒤편에는, 구휼이 필요한 근거가 적혀 있었다. 학살, 그리고 약탈이었다. 제국 외곽 지역에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레는 그 문서를 보고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응? 아. 반려된 제안서들이다."

"그건, 알겠는데..."

"알다시피, 반란이 일어나서 군을 물린 지역을 노리고 카나기가 계속 약탈을 저지르고 있거든. 제국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씁쓸해서 말이다.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을 보내자고 건의하고 있었다."

"예?"

아이는 홱 고개를 돌렸다. 후반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마레는, 카나기를 마치 제국에서 독립된 다른 세력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응? 뭐야, 설마 몰랐던 거냐?"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마레는 지도를 가리키며,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카나기는 전후에 구성된 협의체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별도의 왕국을 세웠어. 그리고, 산맥을 근거로 들어앉아 호시탐탐 제국의 봉토를 노리고 있다."

아이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후 뒤에서 쇳소리가 울어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몸이 망가졌는데도, 살아 움직여야 하는 이유. 그 이름을 듣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온 몸 가득 차올랐다.

"듣지 못했던 거냐? 레고르 보르지아, 그 녀석은 카나기의 왕이 되었다."

마레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레고르가, 연이은 학살을 주도하고 있노라고.

다음 순간, 아이는 혼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추론할 능력이 있다면, 진작 알았어야 하지 않나. 자네의 최후의 적이 누구일지."

아이는 뒤에서 음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장소는, 그 관짝으로 이루어진 공양탑이었다. 사슬이 삐걱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이는 샘 위의 승강기에 올라탄 채로, 망연히 수면에 비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신의 사도이며, 비틀린 자아와 권력욕을 가졌고, 또 성도의 주인이기까지 하지. 자네가 섬기던 신과 선대가 몸을 바쳐가며 안정시킨 운명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밖에 없지 않겠나?"

그건 레고르였다. 목초지를 사르며 꽃처럼 피어오르는 진한 홍염을 뒤로 하고, 기다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는 유령 같았다. 아이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눈을 부릅떠 샘에 비치는 레고르를 바라보았다. 그 손에서 버들처럼 유려한 호를 그리는 대태도는, 그 짐승의 이빨을 닮은 빛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유혼이었다.

"금기의, 에단."

기억났다. 림이 소멸하면, 그 힘은 에단이 이어받도록 흉계가 짜여 있다고 했었다. 자신과 림이 함께 벼려낸 검들은, 지금 모두 레고르의 손아귀에 들려 있을 것이었다. 격노, 분노, 그런 감정들로 참을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아잘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는 아직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 뭐야. 이 탑은 대체 뭐야. 왜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아잘록은 아이의 드잡이질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나지막한 음색으로 말할 뿐이었다.

"이 탑은 그대 마음 속의 공양탑. 그리고, 이 탑을 이루는 관짝들은 그대가 죽여온 생명들일세. 나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야."

"아..."

"이토록 많은 죽음을 품고도, 용케 무너지지 않았군."

아잘록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지하 벽면을 이루는 관짝들이 일제히 열리며 잿가루와 삭은 먼지를 흘려보냈다. 아이는 눈가를 경련하며 그 관짝 안에 누운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실험체 시절 보았던 아이들이었다. 실험을 견디지 못해 자신보다 먼저 죽었던 아이들.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칼슨이었다.

"그럼, 이제 출발할 시간일세."

아잘록은 그 말과 함께 승강기의 쇳줄을 당겼다.

쿠르릉, 기름 먹인 쇠가 회전하는 유음과 함께,

승강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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