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61화 (26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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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의 장서관에서 쓰러진 뒤, 며칠이 지났다.

야심한 새벽, 아이는 머무르고 있는 별궁의 뒤뜰에서 느린 검무를 추고 있었다. 긴 잠으로 피폐해진 육신을 다시 단련하고자 하는 의미였고, 또 나름대로의 저항이었다. 그 꿈 이후로 파도처럼 부절하게 계속해서 밀려드는 환영에 대한 저항.

아잘록에게 그 탑의 정체를 듣고 난 이후로, 환영이 방문하는 빈도는 더 잦아졌고 환상의 밀도는 더욱 더 농밀해졌다. 지금도, 언제 죽였는지도 모를 네 사람의 환영이 아이를 둘러싸고 칼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이의 검무는 너울거리며 느릿하게 그 환영들을 연신 베어댔다.

동력을 잃어버린 기구처럼, 갑자기 쓰러져 잠에 드는 시간도 길어졌다. 마음에서 흘러넘친 검고 무서운 것이 계속해서 자신을 침식해오는 듯싶었다. 해일과 풍랑에 가라앉아가는 외딴 섬이 된 것 기분이었다.

뒤뜰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지 벌써 몇 시간 째, 베어낸 환영의 수는 수십을 헤아리는데도, 검무는 끝날 줄을 몰랐다. 느릿했던 검무는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또 빨라져갔다. 이제는 선명히 기억하는 사람들의 환영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레이븐사이드의 용병들, 기나센에서 죽였던 총관, 통령, 모두가 홀연히 등장해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다. 아이는 묵묵히 그 저주를 받아들이면서, 다시 한 번 안식을 주려는 것처럼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동료가 될 수 있을까요?'

"윽."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걸어온 하늘빛 머리의 환영을 베어넘기고, 아이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입에서 하얀 숨이 새어나와 밤공기 속으로 흘러갔다. 마지막 일격은, 힘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름드리 뻗어 있던 정원수를 비스듬히 쪼개놓고 말았다.

"저, 괜찮은 건가요?"

여자의 목소리가 또 울렸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칼을 내뻗었다. 그리고,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칼을 완전히 내뻗기 직전에야 그 말을 걸어온 사람이 환영이 아니라 진짜 사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륜이었다. 밤새서 수련을 하는 자신이 마음에 걸려서, 숄을 하나 걸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갑자기 날아드는 칼날에 놀라 눈을 꼭 감고 움츠러들었던 륜은,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떴다. 칼날은 륜을 덮쳐들지 않았다. 간신히 직전에 멈춘 것 같았다. 그 대신, 땀에 푹 젖은 아이의 몸뚱이가 륜 위로 쓰러져왔다.

"또 갑자기 잠에 든 거군요."

한때 륜을 괴롭혔던 병이, 지금은 아이를 붙들고 있었다. 륜은 가녀린 두 팔로 간신히 아이를 받치고, 질질 끌다시피 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이 일은 거의 일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간신히 침대에 눕히고, 륜은 그 옆에 걸터앉았다. 그 커다란 손바닥에는 식은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작은 두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움켜쥐고, 륜은 창문으로 세차게 쏟아지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푸르게 물든 커튼은 치맛자락처럼 일렁거렸다.

*"그대는 미쳐가고 있는 듯하군?"

이제는 일과가 되어버린 아잘록과의 대담이었다. 기면증에 당해 쓰러지듯 잠에 들면, 언제나 아잘록의 뻔뻔한 낯짝이 제일 먼저 아이를 맞이했다. 꿈 속의 장면이라기엔 너무나 현실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승강기에 쓰러지듯 누운 채로, 아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잘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미친 사람이 한 말이라 참 신빙성이 높군요."

아잘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몸을 일으킨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번 꿈의 말미에서, 끝을 모르고 치솟던 승강기는 지금 멈춰 있었다.

"빈정거리기 전에 내게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닌가?"

"감사?"

"자네가 환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의 약혼자를 검으로 해치려 하기에, 내가 힘을 써서 막아주었다네."

"아."

쓰러져서, 이 꿈 속의 공간으로 이동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자신은 분명히 륜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 칼이 륜을 범하기 직전에 아잘록이 힘을 써 자신을 이 공간으로 끌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왜 그런 짓을?"

"글쎄. 자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녀가 자네의 손에 죽는 건, 내게도 절대 좋은 일이 아니거든."

아잘록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어조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아잘록은 거짓을 고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럼 내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나?"

"뭐죠."

"자네는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분명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치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자그맣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음."

그 어조는 감사라기보단 모욕에 가까웠지만, 아잘록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아잘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주었으면 좋겠군. 나는 자네의 조력자일세."

"뭘 위한 조력자죠."

"자네가 진정한 자네가 되기 위한 조력자라고나 할까. 진정한 탄생을 돕기 위한, 일종의 산파일세."

"헛소리를."

"산파가 싫은가? 그럼, 자네의 목적지로 인도해주는, 그래. 이 승강기 정도의 도구로 보아도 좋다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보다 또렷해진 정신으로 탑 내부를 거닐었다. 탈출구는 없어 보였다. 선명히 보이는 것이라곤, 탑의 벽재를 이루는 관짝들 뿐이었다. 아이가 손을 대자 관은 소리없이 열리며 내용물을 드러냈다.

"보게. 내 말에 거짓은 없지 않았나."

아이는 이를 앙다물었다. 이 탑이 아이의 마음 속에 세워진 공양탑이라는 아잘록의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환영에서 보았던 죽은 자들이 관짝에 그대로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아잘록의 말을 무시한 채 문을 열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부정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관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가 아이가 죽여온 사람들이었다.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제가 먼저 당신을 만났더라면, 동료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이의 광폭한 행진은 하늘빛 머리카락을 한 소녀의 시체 앞에서 멈추었다. 드미트리였다. 조심스레 관의 문을 닫고, 머리를 기댄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런 자 또한 마음에 품고 공양하고 있는 겐가? 신기하군."

"닥치세요."

"그 여자는 명백한 악인이 아닌가. 자네가 죄를 느낄 이유는 없을 터인데."

그 말대로, 관에 들어있는 시체는 선악과 미추를 가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을 가렸다면, 아잘록이 이 자리에 있을 리도 없을 터였다. 그 자는 분명히 스스로를 망령이라고 소개했으니까.

잠시 관에 이마를 기댄 채 서 있던 아이는, 마지막으로 남은 두 개의 관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놀람 때문이었다.

"그럼, 이건 왜 비어 있죠?"

이 층을 이루는 관짝, 그 중 마지막 두 개는, 텅 비어 있었다. 관의 주인이 적혀 있어야 할 명패도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아잘록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재수 없는 소리를."

그 날의 꿈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손 안 가득 부드러움을 느끼며 아이는 잠에서 깼다. 푸른 달빛이 눈을 간지럽혔다. 이번에 아이를 맞아준 것은 륜이었다.

"일어났군요. 걱정했어요."

천갈궁에 크게 해를 입을 뻔했으면서도, 륜은 오히려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품에 안겨드는 륜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 머리카락에선, 잘 말린 이불 같은 햇볕의 냄새가 났다. 그대로 륜은 물었다.

"그 사람들과 만난 다음 날부터, 왜 계속 아무 말 없이 수련만 하고 있는지. 알려주세요."

"불안해서요."

환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꺼낼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림은 생각보다도, 더 전부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죽 함께했던 친구이자, 스승이자, 그리고 아버지였다. 그가 사라지고 남은 자신은 찌꺼기처럼 왜소했다. 이 몸에 남은 힘이라고는, 쓰잘데기 없이 질긴 목숨 뿐. 그리고 귀르겐과 단테에게 물려받은 천갈궁 뿐이었다. 이제 이 칼 한 자루로 세상과 맞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검을 쥐고 있지 않은 모든 시간이 불안했다.

"거짓말."

그러나 륜은 그 말로 납득해주지 않았다. 아이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더 주고, 추궁해왔다.

"뭔가 이유가 더 있죠?"

아이는 망설였다. 샘에서 보았던 풍경, 그리고 길 아잘록과의 대화. 그 모든 것을 륜에게 들려주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던 아이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비단 자신에 관련된 얘기가 아니라, 세계의 운명과 관련된 얘기였다. 또 자신은 륜을 해칠 뻔했다. 그렇다면, 륜은 분명히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입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던 아이는, 모든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단테의 장례탑에서 보았던 이야기, 선주의 이야기, 그리고 꿈 속의 또다른 장례탑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리고 선언했다. 세계의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끝마쳐야만 한다고.

이야기를 끝마친 아이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은 본디 륜의 사명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 과제 앞에서는, 인격이 변한 것처럼 바뀌어서,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륜의 팔은 아이의 몸을 더욱 세게 조였다. 입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홈통처럼 울려서 가슴팍에 전해졌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우고...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또.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군요."

"해야 할 일이니까요."

"당신이 이 세계를 위해 해야만 할 일 같은 건 없어요. 세상은 당신한테 빚진 것밖에 없는걸요. 미안해요. 내 사명에, 당신을 끌어들여버려서..."

무엇을 사과하고 있는 것일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륜은 여전히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읊조릴 뿐이었다.

"당신은, 바보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드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제가 당신한테 세계를 보여줘 버렸어요. 세계를 긍휼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없는데. 내가, 저주를 내렸어요. 당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어요. 내가..."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운명 같은 건 이제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당신의 세계가 되어 줄게요. 그러고, 싶어요. 언제나, 눈길 닿는 곳에 늘 내가 있을게요. 그러니까, 부디, 더 이상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아 주세요."

"왜... 그런 말을."

"사랑하니까요."

그 말과 함께 륜은 아이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달빛에 젖은 눈물은 연한 푸른빛으로 물들어서 하얀 뺨을 가로질렀다.

"당신은, 제가 사랑하는,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아."

륜은 갑자기 작은 숨을 토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침대에 눕혔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까지도 우악스러울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작은 신음을 토했다. 더 이상 말을 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틀어막은 살덩이는 곧 륜의 혀뿌리까지 휘감아왔다.

"아..."

눈물 젖은 시야로 보는 천장은, 우유로 칠한 듯 뿌연 색이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옷자락이 살갗을 스쳐서 카페트 위로 흘러내리는 소리마저 크게 울렸다. 창 밖에서 소슬한 밤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뒤흔들었다. 바람의 차가운 손길에 맞닿은 나신은 불안한 듯 떨었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곧 체온에 덮여 스러져갔다.

"사랑,해요."

자신을 짓누르듯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륜은 팔을 내뻗어서, 그 널찍한 등을 세차게 껴안았다.

"그리고, 미안, 해요."

바다처럼 널따란 슬픔을 가르고, 이따금씩 행복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 행복감은 이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다시금 후회와 슬픔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사랑한다고, 또 미안하다고. 륜은 그 때마다 번갈아 읊조렸다. 밤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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