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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슬레이어-262화 (262/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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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이는 힘차게 지저귀는 새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불의 보드라운 감촉이 온 몸에 전해졌다. 여전히 나신이었다. 조금 정신이 맑아진 후에야, 어제 있었던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 일어났군요."

진한 커피의 냄새. 그리고 밝은, 어쩌면 애써 밝은 척하는 목소리가 아이를 반겼다. 륜이었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하얀 종아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어제 벗어던진 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양 손에 커피를 든 채 방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이것도, 당신이 깨어나면 해 주려고 준비했던 거에요."

커피의 표면에선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시자, 산미 사이로 사향 같은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아이가 군말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을 확인한 륜은, 아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제, 저를 믿고 얘기를 해 주어서 고마워요."

아이는 말없이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시 깨어난 이후로, 아이는 부쩍 말수가 줄어 있었다. 륜은 눈을 감고, 고양이처럼 그 쓰다듬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이 싸우지 않아도 될 방법과, 이 세계를 구할 방법. 모두를 꼭 찾아내고 말 테니까요.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런가요."

"네. 앞으로도, 많이 기대 주세요. 그게... 저는, 당신의 아내니까요."

마지막 말을 하는 륜의 볼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약혼자가 아니라 아내라는 말을 했다. 어제 일로, 이제 아내라고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애써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커피를 내려놓고, 앞머리를 들어올려 새하얀 이마를 드러내고, 자그맣게 입을 맞추었다. 일을 마친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오늘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의장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다. 황제가 없어진 지금, 재상직을 겸임하며 사실상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활동하고 있는 자. 아우렐리우스였다.

그는 마레의 대부였으며, 또 세계의 필연적인 멸망을 예지하고 대책을 꾸리던 비밀 결사, 어포슬의 수장이기도 했다. 아이는 그에게도 꿈에서 보았던 것을, 그리고 아잘록과 나누었던 회화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구할 생각이었다. 림을 잃어버린 자신은 분명히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우렐리우스의 처소는 검소했다.

그는 별궁의 작은 건물, 아침 미사를 집전하는 성직자가 머무르던 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고 있었다. 아이가 그 건물에 들어설 때, 그 안에선 이미 행사가 한창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건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끝에선 땟국물이 흐르는 어린아이 여럿이 찬송가를 부르는 중이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란 대개 기분 좋은 것이어서, 자주 미숙함을 드러냈는데도 그 끝엔 박수가 휘몰아쳤다. 아우렐리우스는 그 작은 성가대의 뒤편에 있었다. 곧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왔다.

아이는 그들이 빠져나온 후 천천히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노인과 아낙 몇이 아우렐리우스를 둘러싸고 건강해달라는 축복을 달라는 둥, 돼지가 순산하게 해달라는 둥 시시콜콜한 소원을 빌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눈 앞의 노인이 성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저 아침 미사를 집전하는 성직자가 바뀐 줄로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다리게 했군."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우렐리우스와 독대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이를 건물 뒤편의 별실로 데려갔다. 단출한 공간이었다. 두 사람은 유리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앉았다.

"홍차일세. 품종은 모르네만."

"어째서입니까?"

"이 작은 교회의 집사에게 선물받은 것이라. 그 자신도 품종을 모르더군."

하지만 그 빛깔은 맑았다. 아이의 눈동자가 비쳐 보일 정도였다. 분명히 아우렐리우스가 먼저 요청한 독대임에도, 그는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가 대신 꺼낸 것은 한 벌의 카드였다.

"이건..."

"그때 선물했던 물건일세. 규칙은 대충 알고 있는가?"

아르카나로 이루어진 카드들. 륜과 함께 했었던 그 게임의 카드들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아무 말 없이 카드를 펼쳐 내려놓았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게임을 한 판 하자는 권유였다. 아이는 조용히 카드패를 받아들였다. 서로, 쉽사리 본론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필요했던 여흥이었다.

"그것으로 세계의 아르카나를 뒤집으면, 자네의 승리군."

게임은 아이의 승리로 끝났다. 아우렐리우스는 게임을 먼저 권했음에도, 딱히 게임을 플레이하려는 의지가 없는 듯했다. 모래시계 모양으로 그려진 세계의 아르카나를 뒤집으려 하자, 아우렐리우스는 나지막히 말했다.

"축하하네. 세계가 정위치를 찾았군."

"그렇습니까."

하지만 아이는 카드를 뒤집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의 눈에는 미혹이 서렸다. 세계의 아르카나를 손등으로 받친 채로, 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왜 게임을 끝내지 않았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거든요. 세계를 완전히 정위치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무언가."

"레고르 보르지아. 제 사형을 죽여야 합니다."

아이는 그 말을 마치고 세계의 카드를 뒤집었다. 아우렐리우스는 손에 깍지를 낀 채 물었다.

"무슨 연유인가."

긴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아이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선주와 먼 옛날의 성녀의 이야기부터, 샘에서 보았던 레고르의 모습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는 길었다. 아우렐리우스는 품위 있게 무릎에 깍지를 긴 채로,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샘의 예언은, 믿을 만한 것인가?"

"예."

"소니아 아바키렌의 예지보다도 더?"

"분명히."

"그렇지만, 확정되지는 않았다는 말이군. 레고르 보르지아를 살려둔다 하더라도, 세계가 멸망하지 않을 공산도 분명히 있다는 말일 터."

아우렐리우스의 논조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이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 다시금 설득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만 제거하면, 세상은 분명한 안정을 찾게 될 겁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은 없으니까요."

"자네도, 아나테마가 아니게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천갈궁의 주인이겠지. 그럼 자네도 운명을 뒤흔들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지만, 그 자는, 이미 제국의 안녕을... 학살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 학살은 내가 사주한 것일세."

"예?"

갑작스러운 아우렐리우스의 선언에 아이는 찻잔을 손에서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 찻잔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파편을 흩날렸지만, 두 사람 중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지. 자네의 요청은 들어줄 수 없다네. 왜냐면, 레고르 보르지아. 그 또한 어포슬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일세."

대조적으로, 아우렐리우스는 찻잔에 남은 마지막 찻물을 마시고 선언했다.

"내가 일부러 그가 카나기의 왕국을 만들어 독립하는 것을 허락했다네. 이, 정신에 비해 너무 비만한 제국을 절개해 잉여물을 도려내줄 칼날로 삼기 위해."

학살이 일어난 지역은 민란을 꾀하던 지역이다. 그래서, 제국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아이는 마레가 푸념하듯 한 말을 떠올렸다. 또, 번번히 거절당한 구휼의 제안서들을 떠올렸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주먹을 꼭 쥔 채로, 아이는 말했다.

"해명을, 요구합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그 섬에서, 기나센에서, 방에서 지어 보였던 미소와 똑같은 미소였다. 일부러 학살을 조장했다는 말을 꺼내고도 그 미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사실이 오싹했다.

"아탕칼리가 어떤 신인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나?"

"신을... 믿지 않는 신."

분명히, 아탕칼리는 스스로를 천사라고 생각하는 신이었다. 다른 신들 역시 신이 아닌 천사일 뿐이며, 언젠가 도래할 진정한 신을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들의 교리였다.

"이 세상에서 그 사도에 한없이 가까운 자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늙은이겠지. 그 마음가짐을 본받아, 나도 신을 믿지 않는다네. 나는 마술을 그저 도구적 이성으로 파악하고 있어. 그래, 나는 스스로를 마술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아탕칼리의 마술사의 정점인, 성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시를 읊듯 말을 이어갔다.

"또, 나는 인간도 믿지 않지. 정확히는, 민중을 믿지 않아."

민중의 광기로 점철된 전쟁이었던 십자군을 겪어낸 끝에 형성된 사상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짙은 회한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아우렐리우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이 믿는 건, 무엇입니까."

"천재. 내가 믿는 것은, '천재'일세."

아우렐리우스는 생경한 답을 내놓았다.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천재를 낳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민중이란 그 천재를 벼려내기 위한 거푸집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네. 그렇게 탄생한 천재의 자아는 곧 시대정신을 집약하며, 세계의 역사란 곧 그의 역사가 되기 마련일세. 그런 소수의 천재가 언제나 역경을 뚫고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해나갔기에, 이 세상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노라고 나는 믿고 있어."

"어포슬이라는... 비밀 결사를 꾸린 것도."

"내가 인정한 천재들을 그러모은 것일세. 인간도, 세계도, 하나의 인간이 감당하고 통제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혼돈이야. 하지만, 소수의 천재를 그러모은 결사는 충분히 스스로를 경영하고, 또 통제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어. 그것이 나의 대안이기에, 나는 언젠가 올 천재를 기다리며 어포슬의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던 걸세."

"그래서, 레고르가 당신이 기다리던 천재입니까?"

아이의 가시돋힌 말에 아우렐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이름이었다.

"마레 델피에로."

"아."

아우렐리우스가 마레를 양자로 삼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창조성을 처음 인정한 것이, 아우렐리우스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는 천재 중의 천재일세. 하지만, 마술사였지."

아우렐리우스는 카드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술사의 아르카나를 꺼내들었다. 지독하게 익숙한 아르카나였다. 어린 시절, 늘 꿈에 나왔던 녀석이었으니까.

"마술사의 아르카나가 각자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나?"

"정위치에서는...창조. 역위치에서는, 속임수와 기만."

이것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잊을 수 없는 날, 나하트가 했던 말이었으니까. 아우렐리우스는 마술사의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아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성난 목소리로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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