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선택 ( 3 )
"마레도, 그 학살에 동의했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는 꿈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네."
"그럼, 알려주겠어요. 마레는 당신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그는 민중을 진심으로 믿고 있어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선함이 있고, 민중을 위해 진심으로 봉사하면, 모든 것이 제 위치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가 모르게 악을 행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에?"
"그는 지금 분명히 정위치에 있다네. 민중의 상식과 선성을 믿고, 그저 자신의 창조성을 열과 성을 다해 발휘하기만 하면 세계의 질서가 회복되어 승리하리라고 믿고 있지. 하지만, 홀로 정위치에 선 마술사는 패배하기 마련일세. 민중은 악하고 부덕해. 민중이, 일반 인간의 의지가 선하다는 것은 그저 지배하는 자들의 언어일 뿐이야. 정위치에 선 마술사 따위, 스스로의 언어에 속아 넘어간 가엾은 멍청이에 지나지 않아. 홀로 방치하면, 그는 패배하여 한 줌의 밀알로 돌아갈 걸세. 지금까지 민중의 상식과 양심 따위를 믿어왔던 모든 천재들처럼."
아우렐리우스의 말에는 성난 노기, 그리고 체념이 담겨 있었다. 스스로의 광신에 넘어가 민중이 요구한 전쟁이었던 십자군. 그것이 아우렐리우스라는 천재를 한 번 패배시켰다. 이것은 그때 배운 체념의 언어였다. 아우렐리우스는 말을 이어갔다.
"그럼, 창조를 포기한 마술사는 어떻게 되는가. 기만과 속임수로 스스로를 위장한 채, 어둠 속에서 작은 선을 행하기 마련일세. 마치, 자네와 만나기 전의 마레처럼 말이야."
"아..."
아이는 처음 만난 날의 마레를 떠올렸다. 그는 위악을 망토처럼 두른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아우렐리우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마레 델피에로. 그 자는 분명히 천재였으나,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역위치에 있었다. 인간에게 절망해 있었다. 그리고, 자네가 그것을 돌려놓았지. 다시, 정위치로."
아우렐리우스는 말없이 아르카나를 뒤집었다. 아이는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순수한 기쁨과 정열에 찬 채, 창조를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 주께서 바라던 대로, 신성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의 이성을 북돋을 연구를. 그 창조성이 앞으로 오십 년, 아니 삼십 년이라도 제국에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세계의 역사는 분명히 불가역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걸세. 그래, 좋은 방향으로."
아우렐리우스는 덧붙였다. 정위치에 선 마술사는 창조를 할 수 있으나, 어린아이처럼 세상 앞에 무력하다. 역위치에 선 마술사는 기만과 속임수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나,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은 하지 못한다. 딜레마였다. 아우렐리우스는 그 딜레마 앞에서 자신이 찾아낸 해답을 들려주었다.
"누군가가 그 정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둠 속에 숨어 지켜주기만 한다면. 결코 민중과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도록, 더러운 일을 대신해주기만 한다면. 그 천재는 우리에게 빛의 시대를 선물해줄 걸세."
"더러운, 일이, 학살이었나요."
"또 여러 건의 숙청이기도 했지. 개혁에는 필연적으로 부조리한 반대가 뒤따르기 마련일세. 레고르는 그 부조리를 숙청하기 위한 좋은 수술칼이 되어주었어. 또, 앞으로도 되어줄 테지."
그리고 아우렐리우스는 또 힘주어 말했다.
"내가 어째서 자네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나?"
"아니오.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순수해서도, 강해서도 아니야. 그저 마레 델피에로의 친구라고 믿었기 때문에, 왕위에 앉히려 노력한 것일세."
아우렐리우스는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그의 경이적인 창조성의 편린을 엿본 사람이기에. 또, 그가 의지를 이 세계에 관철하도록 앞길을 지켜주는 것이, 충분히 한 시대를 바칠 만한 보람이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자네를 추대한 걸세. 도와주게. 함께, 마술사가 끝까지 정위치에서 빛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사도의 업을 짊어지자는 걸세."
아이는 잠시 침묵했다. 아우렐리우스의 제안에는 깊은 현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마레가 자신의 연구를 세상에 마음껏 펼치는 것이 세계선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이는 그 황당해보이는 대안에 동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 굳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결국 레고르 보르지아가 계속 학살과 숙청을 반복하도록 하자는 말씀 아니십니까. 그는,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이 세계를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데도."
"자네..."
"학살을 용인하는 것. 수천 가지 선행을 위한 단 하나의 악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서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 악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누적되어 운명의 궤도를 비틀어서, 마침내 파멸로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을.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조소하듯 되물었다.
"그 학살당한 자들이, 무슨 구호를 외쳐댔는지 알고나 있나?"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그들은 폭정의 불만을 신생 제국에 덤터기 씌우려 들었어. 그들은 너를 악종의 씨앗에 고아라고 비난했다. 애인인 성녀는, 흡혈귀에 창녀라고 비난했지. 자네가 지키려는 민중은, 누가 자신들을 구했는지도 모른 채 그런 선동에 영혼을 맡기고 자네의 목을 치자고 행진가를 불러댔단 말일세."
"괜찮습니다."
"자네가 괜찮고 말고는 중요한 일이 아닐세. 마레 델피에로라는 남자가 믿는 민중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앞으로 오십 년동안, 그 민중이 마레의 등을 찌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가? 이런 추잡한 정치에 휘말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가? 오 년을 버티면 다행일 걸세."
아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우렐리우스의 비난은 단순히 힐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호소력이 짙었다.
"자네가 그가 세상에 선이 있노라고 믿게 만들었어. 자네가 그가 둘러싼 껍질을 벗기고, 이 저주받은 동산에 그를 풀어놓았어. 그럼, 마땅히 그를 지켜주어야 할 것 아닌가."
아이가 입을 다물자, 아우렐리우스의 목소리도 한 풀 인자하게 변했다. 그는 아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네는 이미 이 나라의 왕이야. 왕은 곧 국가일세. 국가의 도덕은 필부의 도덕과 마땅히 달라야 하는 것이야. 묻겠네. 자네 내면의 국가이성은, 정말로 '살인을 하지 말라'는 그 피상적인 율법을 굳게 믿고 있는가?"
책임을 지라는 말. 그것은 언제나 아이를 움직여 왔던 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고, 식물과 같은 상태에 빠져 있던 아이를 최초로 움직인 것도 그 말이었다. 이 말 앞에서 아이는 쉽게 거절을 표하지 못했다. 아우렐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란스러운가 보군. 그렇겠지. 이 방에서, 기다리겠네. 부디 다음에는, 불분명한 멸망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어포슬의 동료를 인정하겠노라는 대답을 가져오길 기대하겠네."
아이는 유령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며 문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간에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 날, 북서 자치령에서 죽였던 카나기의 무반. 바우얀의 환영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다란 대태도로 아이의 뱃가죽을 찔러왔다. 배가 베이는 아릿한 격통을 참아 넘기며, 아이는 바우얀의 환영을 뚫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환영을 관통했기 때문일까, 몸의 온도는 더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추위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더욱 더 심해졌다.
혈관 아래에서 삭풍이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더없이 추웠다. 아우렐리우스의 처소에서 빠져나와서, 비척이며 별궁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10분간. 아이의 몸은 사각 부빙이 부유하는 겨울 바다를 뚫고 온 듯 싸늘해졌다.
"돌아왔어요? 이렇게 늦게..."
밤이 깊었는데도 륜은 잠들지 않고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난로가 타닥이는 집 안에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온 몸은 추웠다. 몸은 따뜻함을 갈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마가 얼음장이에요!"
아이의 몸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부축하듯 아이를 침실로 데려간 륜은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호들갑을 떨었다. 륜의 손이 닿은 이마에 따뜻함이 번져갔다. 륜의 체온은 이 죽을 듯한 추위를 녹여낼 수 있었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륜의 팔을 끌어당겨 얼굴에 가져갔다. 어린아이 같은 살내음이 비강 깊이 흘러들었다. 속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아."
륜의 얼굴은 살짝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팔꿈치에 코를 가져다 댄 채로, 아이는 점점 륜의 몸을 끌어당겼다. 곧 륜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아이의 품에 담기듯 안긴 상태가 되었다. 그 가벼운 몸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끌어안고, 아이는 귓가에 속삭였다. 륜과 살을 맞닿은 곳마다 봄바람 같은 온기가 번져왔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추워요."
"대체 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나요."
륜은 말없이 아이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길다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갈라지며 은빛 곡선을 그렸다. 아이의 입술은 연한 푸른빛으로 질려 있었다. 두 뺨을 붙잡고,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깊은 입맞춤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등을, 아기처럼 거세게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압력에 부드럽게 무너지면서, 륜은 침대 위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불로 하얀 나신을 얄포롬하게 가린 채로, 륜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벽난로의 불꽃이 세차게 타올라 륜의 옆얼굴에 주홍빛 그림자를 남겼다. 사랑을 나누어서 추위가 진정된 후에, 아이는 천천히 오늘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우렐리우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마지막에, 그는 정말로 격노한 듯 보였습니다."
"아마도 연기일 거에요. 되짚어보면, 굳이 아르카나가 새겨진 카드를 준비한 것도 대본의 일환일 수도 있겠군요. 분명히, 그럴 거에요."
륜은 눈을 감고 아우렐리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품고 있는 모략을 읽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흐릿해서 잘 읽히지 않았다. 아나테마이자 성좌인 레고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당연했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도록 조력한 것이 아우렐리우스라는 뜻이었으니까.
"그 사람은, 분명히 위험해요."
이불을 더 꼭 끌어안은 륜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아잘록을 무찌르고 난 후에는 지은 적이 없었던 표정. 필연적인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사명을 받고, 현신한 아나테마로서 활동할 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이었다. 아이는 그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륜의 그 표정을 바라보는 아이의 심홍색 눈에는 슬픔이, 또 희미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륜이 올바른 선택지를 제시해 줄 것이라는 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