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선택 ( 4 )
륜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 때, 인격이 둘로 나뉘었던 때처럼, 어조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륜은 영락없이 그 때의 그녀였다. 멸망의 예언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손녀처럼 키워 주었던 통령을 죽이자는 말을 거리낌없이 꺼내던 때의 그녀.
그녀의 조소는 우선 아우렐리우스의 자의식을 향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빌어서, 스스로조차 속이고 있군요."
"속인다는...말은."
"아탕칼리가 신을 믿지 않는 신이듯이, 자신 역시 마술사를 믿지 않는 마술사라고 했지요. 그는 그 말을 통해 마술이 이 세계에 가하고 있는 비극으로부터 스스로를, 어쩌면 스스로의 책임을 분리하려고 하는 듯 보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륜은 단호하게 단언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술사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뭐죠."
"의지를 작용해서 세계에 경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데, 그가 어떻게 마술사가 아닐 수 있을까요? 그는 여전히 마술사에요. 마술사의 이름을 천재라고 바꾸어서 믿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생각은 위험합니다."
비유컨대, 들판에 갖가지 꽃과 화초가 어지럽게 피어있는 것이 보기 싫어서 몇 가지의 꽃만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겠다는 정원사와 같다. 륜은 그렇게 말했다.
"그런 정원은 아름답겠지만, 마치 들판 전체가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한가지로 피고 또 한가지로 저물겠지요. 억척스런 잡초가 사라진 정원의 겨울은 아무런 생명도 꽃필 수 없는 혹한의 동토가 될 것이고, 봄이라 한들 한 가지의 질병에도 쉽게 쓰러질 터에요. 그 정원을 한 명의 정원사가 영원히 가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자는 천재라는 미망으로 스스로를 속여서, 함께 그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의 업을 짊어지자고 권유하고 있어요."
민중의 의지를 혼돈으로 치부하고, 천재 한 사람의 단일한 이성으로 세상을 가득 메꾸자는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륜은 전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팔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따뜻한 온기가 팔 전체에 전해져왔다.
"세상은 절대로 민중의 손에 의해 멸망하진 않아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멋대로 세계를 노름판에 판돈으로 올리고 도박을 시작했을 때 멸망하는 법이죠. 그 말을 듣고 오히려 확신이 생겼어요."
"확신이라면, 어떤 확신인가요."
"레고르 보르지아. 그가 간신히 안정시킨 이 세계의 운명을, 다시 멸망으로 이끌어갈 사람이라는 확신."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륜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륜은 쉽사리 확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여자로 살기를 소망했지만, 또 분명히 오직 세계를 구하기 위해 외신으로 타락한 자애의 신이기도 했다. 륜은 세계와 관련된 얘기에서 왠만해선 틀린 결정을 하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는 레고르 보르지아를 그저 제국을 수술하기 위한 수술칼 정도로 여기고 있지만, 그래서 일부러 카나기의 독립을 인용하고 왕이라는 자리를 쥐어주었지만, 그 자는 순순하게 이용당해 줄 사람이 아닙니다. 놔두면, 분명히 제국의 배를 가르고 세계를 먹어치워 황제의 자리를 노리겠지요."
레고르는 륜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에페 바체 시절, 몇 번이나 마주했기 떄문이었다. 그는 권력욕 하나 때문에, 사제를 죽이고 륜의 남편이 되어 레이븐사이드의 단장에 오르려고 했었다. 그 선연한 악의에 노출되어본 적이 있는 륜이었기에, 그 말에서는 분명한 설득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결국 황제가 된다면, 그가 만들 나라의 풍경을 상상해보세요."
레고르의 그 끝없는 권력욕은, 불안의 다른 표현이었다. 언제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고 유기할 수 있다는 불안. 그것은 결국 인간이 혼자인 한 채워질 수 없는 불안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권력욕은 무한했다. 이 센디엘에서 제국은 곧 세계였다. 그런 그가 만들어갈 세계의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아이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그 날의 방을 떠올렸다. 안개로 가득했던 레고르의 방을.
"죽음의 나라."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그 방에서 그 남자가 보았을 풍경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는 것이 당연하고,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나라가 되겠죠."
"동감이에요. 그리고 그 세계는, 절망하고 잊혀지는 것들로 끓어넘쳐 수없이 외신을 발생시킬 것이고, 이 세계는 그것과의 끝없는 전쟁 끝에 침몰해가겠죠."
륜은 단언했다.
"어쩌면, 목적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던 길 아잘록보다도, 그가 더 세계에 분명한 위협이 될 지도 몰라요. 그에게는 이룰 수 없는 목적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륜은 이미 레고르를 아잘록과 동급의 위험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아우렐리우스와는 상반되는 이야기였다. 아이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조심스레 손을 내뻗어 아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함께할 건가요? 저와."
"당연히. 그리고 이 싸움은 분명히 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사형과 저한테는, 아직 해야 할 승부가 남아 있으니까요."
헤카톤 케이레스가 탄생하던 날, 레고르와 자신은 마지막 대결을 남겨두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헤카톤 케이레스의 난입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레고르도, 자신도, 그 미완의 대결을 끝마쳐야만 한다는 의식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최고의 전장이 마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륜은 살며시 웃으며, 아이에게 몸을 기대왔다. 이불이 흘러내려 그녀의 하얀 상반신이 드러났다. 푸른 달빛에 젖은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다. 또, 가볍게 떨고 있었다. 아이는 그 이마에 다시 한 번 작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렇다면, 안심이에요. 조금 지난한 작업이 되겠지만, 저는 이래뵈도 모략의 신이니까요. 할 수 있어요."
륜은 아이에게 몸을 기댄 채로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주적은 레고르,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비밀 결사, 어포슬. 그들이 당신에게 선물한 왕이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내부에서부터 붕괴시켜가면 되겠지요."
어포슬인가. 그런가. 아이는 가만히 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는 학파간의 주도권 싸움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우선 아우렐리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을 하면서... 왕이라는 명분을 거머쥐고. 그 주도권 싸움을 이용해서 내분을 일으키면 되겠지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고, 마침내 암살을 주고받게 만든 다음, 때를 보아 하나씩 손발을 잘라가듯 숙청하면 될 거에요."
가을이 되면 벼를 수확해야 한다. 그런 당연한 상식을 말하는 것처럼, 륜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학파의 수장과 요인을 모두 죽인 후에, 제국의 총력을 기울여 카나기와 전쟁을 일으키면 되겠지요. 국력의 차이는 명확해요. 나라대 나라간의 싸움으로 몰아가서, 보급전으로 전쟁으 전개한다면, 질 리는 없을 겁니다."
모두 죽인다. 아이는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꿈 속의 탑에서 보았던, 두 개의 텅 빈 관 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또 아잘록의 불길한 말도 뒤이어 떠올랐다.
'글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어떤 불길한 상상이 아이를 사로잡았다. 아이는 륜의 어깨를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모두... 모두라고 한다면. 설마."
"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지를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인 마레 델피에로. 그리고 어포슬의 일원이자, 라달라리아의 수장인 다나 아니스. 두 사람 역시, 숙청해야 합니다."
'재수 없는 소리를.'
그렇게 대답했을 때, 아잘록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관짝과 돌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던 그 음산한 웃음소리가, 륜의 말에 겹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듯싶었다. 간신히 깊이 떨어지려는 마음을 붙잡고, 아이는 다시금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분명히, 제 친구니까. 잘 대화하면, 믿음을 주면...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면."
"안 됩니다. 정치란 본질적으로 그런 거에요."
륜의 목소리는 냉엄했다. 자신의 혈육이나 다름없던 통령을 죽인 적이 있던 그녀이기에, 그 말에는 더욱 서릿발 같은 호소력이 담겨 있었다.
"세계의 운명에, 친교나, 우정 같은. 그런 값어치를 수량화할 수도 없는 것을 저울질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마레 델피에로. 그 자는 이미 수 많은 정책적 위업을 세워서 아탕칼리 전체에게 큰 권위를 부여하고 있지요. 거기에 어포슬의 수좌인 아우렐리우스의 양자이기까지 합니다. 그와 성인이 나눈 친교가, 당신과 그 사람이 나눈 친교보다 값어치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그 자 입장에서는, 당신이 자신을 배신하고자 하는 것으로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륜은 빠르게 말했다.
"다나 아니스. 그녀는 제국이 무너져내리면서, 그간 쌓은 방만한 판결과 부패가 드러나 백척간두에 빠져 있는 라달라리아의 마지막 기둥입니다. 그리고 그 지위는, 어포슬에 가입했기에 유지되고 있지요. 그녀가 기백만에 달하는 신도 동지보다, 당신을 우선할 거라고. 과연 진정으로 믿을 수 있나요?"
"믿,어요. 저는, 믿습니다.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아우렐리우스와는 해결하지 못했잖아요. 그 사람도,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친구라고 생각했었죠."
륜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웅변하는 동시에 호소하는 듯하기도 했다. 진한 달빛으로 음영이 지워진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운 동시에 잔혹해 보였다. 아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민중을 학살하는 것을 용인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을 죽이라고 하는군요."
아이의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힘을 주며 떨림을 참은 끝에 쉬어버린 것이었다. 그 끝에 꺼낼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륜은 그런 아이를 위로하듯이, 앞에서부터 안겨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을 위해 소멸한 림이 어떤 신인지, 알고 있지요."
"마술사 살해의 신..."
"예.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술사에요. 당신은 분명히, 마술사를 모두 죽이겠다고, 그 신 앞에서 서원하지 않았나요."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륜은 더 세게 아이를 끌어안으며, 등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그저 미뤄왔던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에요. 부디, 죄책감을 갖지 말아 주세요. ...아."
그리고 꺠달았다. 반응이 전혀 없었기 떄문이었다. 아이는, 이미 기면증에 빠져 깊이 혼절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