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66화 (266/279)

44. 선택 ( 6 )

다음 날, 륜은 하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미뤄둔 집안일을 했다. 아이의 옷을 깔끔하게 다림질하고, 절여 두었던 고기를 정리하고, 바닥을 깔끔하게 닦았다. 그리고, 시계의 종이 울릴 때마다 초조하게 아치창 너머로 비치는 정원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아침에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저택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제안을 받겠다는 말도, 륜의 제안을 받겠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륜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선택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일을... 더 마칠 일을."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여느 아내들이 하는 일을 찾아 하던 륜은 문득 손을 멈추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원 위로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둥글게 번져가는 마지막 빛살 뒤편에서 검보랏빛 어스름이 떠올랐다. 스러져가는 황혼은 륜의 머리에 둥근 띠를 그렸다. 륜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문이 열린 것은 그 때였다. 끼익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사람이 걸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였다. 안뜰을 가로질러 륜이 바라보는 거실까지 오는 시간이, 영원이라도 된 듯 길게 느껴졌다.

"어떻게 됐나요."

마침내 집 안에 들어와 륜 곁에 앉은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우렐리우스와의 긴 독대를 마치고 온 아이는 몇 분째 말이 없었다. 조바심이 난 륜은,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혹시, 그 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요?"

"아니오. 거절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륜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뒤따른 말은 다시 륜의 안색을 흐려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당신의 제안도 거절할 생각이에요."

"그럼... 대체, 무슨 대화를."

륜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둘 다 거절할 생각이었다면, 아우렐리우스와는 대체 무슨 대화를 이렇게 길게 나누고 돌아온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노을은 완연히 저물어서, 샛노란 등불만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아이는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왕위에서 조용히 내려오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전쟁을 위한 군대를 소집해줄 것을 요청했어요."

"전쟁이라니요. 설마."

"예. 전쟁을 일으켜서, 카나기를 병탄하고, 레고르와 최후의 승부를 벌일 생각입니다."

아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의 말도, 아우렐리우스의 말도 모두 나름대로의 일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누가 옳은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역사가 판별하겠지요. 제가 할 일은, 그저 그 대립과 투쟁으로 세계가 멸망하지 않도록 막는 일 뿐입니다. 레고르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변수를 한 데 그러모은 집약체 같은 사람이지요. 아마, 그 사람만 없으면 운명이 멸망까지 치닫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조용히 선언했다.

"제가 책임지고, 사형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최선이에요."

그 말을 들은 륜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이었다. 아이가 내세운 대안의 흠결을 잡아 공박하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하지만, 카나기를 병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막 대전쟁이 끝난 참이에요. 사람들은 이제서야 전쟁을 잊고 민생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시기에 전쟁을 일으킨다면, 민심의 이반과 정치적 혼돈은 당연히 뒤따를 텐데요. 그 명분은 어떻게 잡을 생각인가요."

"과거부터 쌓인 원한을 들려주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저 왕 개인의 원한으로 복수전이 일어나는 것으로 처리하도록 약조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명예가..."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말했다시피, 퇴장할 생각이니까요. 레고르를 죽이는 것을 끝으로, 저는 앞으로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고 싶어요."

그 말에 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이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보통 단단히 결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초조해진 륜은 다소 공격적인 언행을 하기 시작했다.

"레고르는, 당신의 검을 모두 가져갔다면서요. 또 백양궁의 주인이잖아요. 당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하루의 절반은 쓰러져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검 한자루 외에는 모든 걸 잃어버린 당신이요?"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단언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중단되었던 그 날의 싸움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기가 칼이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자냐고, 그렇게 소리쳤었지.

"이 싸움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저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싸움이에요. 퇴장하기 위한 무대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아이가 늘 해왔던 선택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두 갈래 길에 섰을 때,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 아이의 삶은 끝없이 그 선택을 반복해왔다. 지금껏 늘 해왔던 것을 큰 규모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할 뿐이다. 아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가장 마음이 편했다. 몸 속에서 울어대는 쇳가루와 뼈의 냄새가 그 마음을 먹을 때에만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안 돼요."

륜은 주먹을 쥐고 말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가녀린 어깨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허락할 수 없어요."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나는, 당신의 아내니까, 그 제멋대로인 행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단 말이에요..."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씩 떨리던 륜의 어깨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며 허물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에요... 또, 또, 싸우러 가면, 이번엔 정말로 죽을 텐데... 당신이 돌아와서, 아직 함께 하고 싶은 일,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

"역시, 그랬군요."

아이는 조용히 륜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륜은 무너지듯이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언제나 논리의 성벽을 쌓은 후에야 말을 꺼내던 그녀답지 않게, 감정적인 이야기들 뿐이었다.

"왜, 또, 그런 방식인 건가요. 당신의 그런 방식은,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처입혀요. 나는, 백만 명이 죽더라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어째서, 또."

그 말을 들으며 아이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고 생각했다. 륜의 제안이 겨누는 목적은, 세계의 존속이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아이를 지키는 것. 만신창이가 된 아이를 이용하려는 모든 세력을 멸절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또 책임을 강요하는 말에 휘말려 싸움터에 걸어나갈 것 같았으니까. 어포슬에 들어가면, 검으로 이용당할 것이 뻔했으니까. 그것을 직감했기에 막아세운 것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요. 흉계를 꾸미고, 거짓말을 하고, 모략을 꾸미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렇지 않은 건, 언제나 당신 뿐이었어요. 믿을 수 없어요. 당신 말고는, 누구도."

"륜."

"당신이 없는 세상 같은 건, 멸망해도 돼요.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요. 그만큼 노력했잖아요. 노력했고, 이겼고, 증명했잖아요. 그러면, 이제는 편히 쉬어도 돼요. 더 이상 무언가를 떠안을 필요 없어요.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니까, 그냥 제 곁에서 웃고만 있어 주세요. 이젠, 내가 지켜줄 테니까."

"륜."

아이는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륜을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륜의 넋두리는 멈추질 않았다.

"당신은 제 스승이고, 남편이고, 그리고 모든 것이에요. 이제부터는, 제가 지켜줄 테니까... 제발,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선택은 하지 말아 주세요."

"륜 우르드."

아이는 단호하게 륜의 이름을 불렀다. 그 말에 륜은 훌쩍이며 말을 멈추었다. 그 눈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아이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천장에서 장난스럽게 얼굴을 내밀던 림을 떠올렸다. 림이 자신한테 그랬듯이, 자신도 이 여자에게 림과 같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림이라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아이는 고민한 끝에 작은 문장을 꺼냈다.

"때로는, 혼자 잠드는 밤이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도 있어요. 때로는, 신이 없는 세상이 참을 수 없이 슬플 때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는 자그맣게 륜의 귀에 속삭여주었다.

"사람에게 신이 되라고 요구하는 건, 그릇된 일이에요."

전해졌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이는 가만히 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훌쩍거리던 륜은, 다시 한 번 아이의 가슴팍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살아서 돌아오세요. 꼭."

아이의 대안을 받아들여준 것 같았다. 그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아이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아침부터 극도의 긴장과 피곤에 절어 있던 아이의 몸은 그 말에 아늑함을 느꼈다.

"예. 반드시."

그 말과 함께, 아이는 잠 속으로 떨어졌다. 륜은 그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쉬이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몇 분이 지나고, 아이가 음조가 없는 기괴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후에야 륜은 고개를 들었다.

"이제, 몸을 좀 빼도 괜찮겠나? 잠을 자러 가야 최상의 몸 상태로 돌려줄 수가 있는데, 이대로는 힘들겠군."

"예?"

륜은 천천히 몸을 뺐다. 아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극심한 두통이 륜을 공격했다. 륜은 머리칼을 움켜쥐고, 의자에 머리를 쳐박은 채 신음을 흘렸다. 아이는 그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인간이란 이다지도 재미있는가."

그리고, 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걸음걸이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듯이 절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리를 움켜쥔 채,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고통과 싸우던 륜은 문득 그 걸음걸이를 보고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저, 사람은. 분명히."

그 정체를 추론하기 시작함과 동시였다. 두통이 사라지며, 알고 싶지 않았던 지식이 빈 자리로 해일처럼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다른 사람의 모략을 읽을 수 있는 권능은, 천갈궁의 주인인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아이를, 정확히 말하면 아이의 육체를 차지한 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길, 아잘록, 아니... 망령."

륜은 그 이름을 읊고, 창백한 얼굴로 계단을 타고 걸어올라갔다. 아이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 입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기까지 했다. 간신히 침대 앞까지 걸어간 륜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끈이 떨어지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어째서. 아직도."

넋두리를 읊조리는 륜의 눈은, 공허한 검은 빛을 띄고 있었다. 기나센에서, 멍하니 죽음을 기다릴 때의 눈동자와 똑 닮은 검은빛이었다. 어느새 날아든 까마귀는, 창가에 앉아 불길한 울음을 울어댔다.

그 아릿한 울음소리에도, 잠든 아이는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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