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67화 (267/279)

44. 선택 ( 7 )

그 날의 대담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

아이는 어색한 의장을 갖춰 입고, 천갈궁을 허리에 찬 채 새로이 지어진 왕궁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목표는 알현실이었다.

"검은 제가 맡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 하나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말을 걸어왔다. 아이는 손사래를 쳐서 말렸다. 천갈궁은, 그리고 성도 8궁은 모두가 무의 신인 베루스의 흩어진 조각들이었다. 서로 합쳐질 수 있는 것도, 자격 없는 자가 손을 대면 그 자를 불태워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종이 손을 대면 순식간에 잿가루로 만들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알현실에 들어가기 직전,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벗어던졌다. 단출하게 새로 꾸며진 알현실에는 이미 아탕칼리의 요인들이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륜 역시 결혼식의 드레스처럼, 화려하기 그지없는 옷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그 중, 재상의 자리에 앉은 아우렐리우스는 짧게 말했다. 아이는 그 옆에 마련된 옥좌를 향해 걸어나갔다. 이 자리는 출정식을 위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아탕칼리의 대신들의 주관 아래 군대의 출정이 결정되고, 그리고 아이는 퇴위를 선포하도록, 약조가 끝나 있었다. 륜은 그 퇴위의 증인으로서 이 자리에 함께했다.

"그럼, 자리에 앉게."

아우렐리우스는 왕관을 쓰고, 기름을 머리에 부은 아이에게도 하대를 했다. 어차피 잠시 앉았다 내려올 옥좌이기에, 유감은 없었다. 아이는 천천히 연단을 밟고 걸어올라갔다. 신기했다. 몇 단 되지 않는 옥좌에서 내려다보는데도, 알현실 내부의 풍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륜은 옥좌로부터 가장 먼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얼굴만큼은, 이 자리에서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 자리를 빌어, 나라 전체에 퍼질 포고를 시작하겠네."

아이는 고개를 끄덕여 행사의 시작을 용인했다. 아우렐리우스는 포고령이 적힌 두루마리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사전에 아이가 본 내용대로라면, 거기에는 아이가 왕위를 내려놓으며 카나기에 선전포고를 하는 이유가 미려한 문장으로 적혀 있을 것이었다.

"기나센의 통령 아이 우르드는, 수많은 영웅적 기상을 펼치며 대륙 전체에 그 명성을 떨친 바, 마침내는 제국에 끝없는 죽음을 일으킨 7위계의 마술사를 토벌하여 만민의 동의 하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싸움의 상처로 긴 잠에 빠졌을 때, 만민 중 그의 회복을 간절히 기원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아이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낯간지러운 찬양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아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그 찬양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온 그는 이미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광증에 침식당하여 이유 없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일이 잦아졌고, 극도의 망상과 공격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쟁으로 제국의 내외부가 핍진해진 가운데서도, 오직 그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한 목적으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노라고 선포하기까지 했다."

"당신, 무슨."

"고로 아탕칼리의 성인, 아우렐리우스의 이름 아래, 미친 왕 아이 우르드의 주살령을 포고한다. 한때는 찬란했던 그 자가 최소한 죽음만이라도 명예로울 수 있도록, 제국의 만민은 협조하라."

그 말과 동시에, 알현실 가득 천사들이 솟아올랐다. 아이는 천갈궁을 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무슨 짓이죠."

"말 그대로일세. 자네가 거절할 줄 알았더라면, 잠들어 있을 때 진작에 암살자를 파견했을 것을."

아우렐리우스는 자신 역시 거대한 천사를 불러내며 말했다. 검을 세게 움켜쥔 아이는 분노에 가득찬 눈으로 아우렐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자는, 레고르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던 듯싶었다.

"당신..."

"이 쪽에 눈 돌릴 틈이 있는가?"

그리고, 강렬한 충격에 아이는 바닥을 굴렀다. 육감으로, 몸이 도끼검에 둘로 찢어지기 전에 피해낼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약속한 대로, 죽을 시간이다."

그 특징적인 도끼검의 주인은 뻔했다. 사자궁 빌헬름, 데몬스폰을 사냥하는 업을 짊어진 자. 그 때, 컨쿼러의 동체에서 쓰러진 아이에게 말했던 '적절한 때'가, 바로 지금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우렐리우스가 비장의 한 수로 그를 준비해둔 것이 틀림없었다. 저 육중한 도끼검에 자그마한 생채기라도 나면, 그 다음에는 끝장이었다. 아이는 헛웃음을 지으며 천갈궁을 양 손으로 세게 움켜쥐고,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아탕칼리의 주교들과 천사들, 그리고 사자궁이 자신을 둘러싸고 원진을 그리고 있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겠네만, 지금 투항하면 포고문을 취소하고 병사로 처리해주겠네. 어떤가."

아우렐리우스는 마지막 자비라는 듯 말했다. 아이는 피식 웃으면서, 의자를 아우렐리우스에게 걷어차 날려보내고 말했다.

"덤벼."

다음 순간, 알현실 전체에 검과 마술의 폭풍이 불어닥쳤다.

*"쿨럭, 커헉."

세 시간여 후. 기껏 새로 지은 알현실은, 싸움에 휩쓸려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제국의 알현실이란 언제나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지도 몰랐다. 승자는 아이였다. 비록 왼팔에 잘리기 직전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피에 전신이 젖어 은발마저 피얼룩이 묻어 있어도, 분명히 아이는 승자였다.

"괴물 새끼. 쿨럭."

사자궁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고 있는 것이,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가슴을 꿰뚫린 빌헬름은 역류하는 핏물을 아이의 얼굴에 뱉었다. 그리고 가르랑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말했다.

"뽑아라. 네가 승자다."

아이는 칼을 뽑아들었다. 핏물이 터져나가며, 검푸른 내장 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이전이었다면 공양으로 시체를 깔끔하게 불태웠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림이 없어졌으니까. 이 죽음은, 온전히 아이에게 봉헌된 것이었다. 검을 질질 끌며 나아가서, 아이는 사자궁의 도끼검을 집어들었다. 천갈궁에 도끼검을 맞대자, 도끼검은 검붉은 연기를 흘리며 천갈궁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단테에 이어, 벌써 세 개째의 성도 8궁을 흡수한 것이었다. 아이는 가만히 천갈궁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불타오르지 않는군."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렐리우스의 목소리였다. 그는 천사와 함께 가슴을 비스듬히 베이고도, 아직도 절명하지 않았다.

"벌써 세 개째의 베루스를 합쳐 손에 쥐고도 감당하는 건가. 어쩌면, 세계는 곧 베루스의 완성을 볼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 칭찬의 어조는 너무 평안해서, 잠시 자신을 칭찬하는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는 천갈궁을 질질 끌면서, 아우렐리우스 앞으로 걸어갔다. 그 질긴 목숨을 끊어주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의 힘이면, 충분하겠지."

"뭐가 말입니까."

"자네도 운명을 바꾸어 세계를 파멸시키기엔 충분할 정도로 강하다는 말일세."

"무슨, 말입니까."

"레고르 보르지아. 그 자가 아니라, 자네가 세계를 파멸시킬 원흉일 수 있다는 말일세. 아니, 그게 사실이겠지."

"마지막 농담이라기엔 재미가 없군요."

"자진하는 게 어떤가? 자네가 정말로 세계를 지키고 싶다면."

마지막까지 같잖은 수작을.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어느 쪽을 가리켰다. 륜이 앉아있는 자리 쪽이었다.

"빈말이 아닐세. 그대는 내가 왜 이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가."

"미쳤으니까요. 당신도, 나도."

"좋은 대답이네만, 아니야. 자네의 아내 때문일세."

"또, 같잖은, 수작을."

"자네의 아내가 세계의 파멸을 그대에게서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일세. ...욱."

아우렐리우스는 핏물을 토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한 아이가, 천갈궁을 아우렐리우스의 심장에 꽂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고, 칼을 비틀었다. 심장을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서였다. 이 사람의 내부를 완전히 짓밟아 부숴서, 거꾸로 치솟을 피로 그 입을 막아서, 그 혓바닥이 읊조릴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어리석군. 정말로... 생각해보게."

"닥쳐요."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천갈궁을 뽑아들었다. 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아우렐리우스는 그 말을 유언으로 절명했다. 아이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가 남긴 말은 피 향기에 스미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아이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서, 아직도 원탁의 끝에 앉아 있는 륜을 바라보았다.

"아니죠?"

그 희망 섞인 말과 달리, 아이의 머리는 이미 불길한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이 아탕칼리의 암살자들은, 륜을 인질 잡지도, 륜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륜은 모략을 읽을 수 있는데도, 이런 모략이 꾸며지고 있다는 걸 아이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그런 생각이 자꾸 머릿속 한 구석에서 피어올랐다.

"아니잖아요. 그렇죠."

어느새 아이는 륜의 눈 앞까지 걸어온 상태였다. 부정해주길 바랬다. 어설픈 거짓말이라도, 변명이라도 해 준다면, 속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륜은, 어설픈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부정하지 않았다.

"실수했네요."

무엇을 실수했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륜이 계속해서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을 들어 달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제 말을 거부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말은, 부정할 수도 없이, 아이의 귀에 사실을 꽂아넣고 있었다.

그녀는 배신했다.

어포슬을 숙청하고 영원히 암중에서 통치하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게 이유일까.

아니면 아잘록 때문일까.

어떤 이유 때문이든, 아마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륜은 배신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 날, 그렇게 슬프게 울면서 매달렸던 이유는, 이런 결말을 은연중에 예상했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조용히 륜의 부탁을 기다렸다. 살려달라고 부탁한다면, 살려주고 싶었다. 배신한 사람을 용서하고, 살려 주는 것. 이미 수없이 해온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륜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것을 부탁해왔다.

"죽일 때에는, 깔끔하게. 심장을 찔러서 죽여주실 수 있을까요."

체념한 사람의 어조였다. 그 말에선 삶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는 조용히 천갈궁을 집어들었다. 길다란 칼날은, 그 바람대로 예쁘게, 륜의 심장을 관통했다.

"아...아."

흰 드레스에 붉은 핏물이 번져갔다. 핏물을 삼키면서, 륜은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피로 얼룩진 뺨을 가로질러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싫은데,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 우는 얼굴인 건.

"부디, 행복하기를."

천천히 검을 뽑았다. 의자에 앉은 륜의 시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는 절뚝이며 피로 물든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그 그림자를 따라서, 피발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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