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69화 (269/279)

45. 순례 ( 2 )

아이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게 남겼던 발자국은, 모래바람 몇번에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사막의 밤은 추웠다. 온기도 냉기도 잡아둘 수 없는 모래들은 쉽게 달아오르는 만큼 쉽게 차가워졌다. 밤에 움직이는 짐승들이 가끔 노란 인광을 뿌리며 곁을 스쳐지나갔다. 아이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어느새, 낮에 가로질렀던 소금 호수 앞까지 다다랐다.

밤의 호수는 낮과는 또 달랐다. 먹물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호수 위로 새하얀 별이 점점이 떠올라 있었다. 아이는 그 무거운 검은빛 위로 발을 들이밀었다. 죽어서, 별이 되어 은하 사이를 거닐면 이런 느낌일까. 끝없이 이어진 별하늘 속을 걷던 아이는, 문득 멈춰섰다. 누군가가 호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찾았다."

그 남자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처음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바로 알아챘다. 가슴 한 켠이 무거워졌다. 아이는 고개를 옅게 숙이고, 중얼거렸다.

"누구죠."

"누구긴 누구겠냐."

그 남자는 그 말과 함께 머리를 덮은 후드를 벗어던졌다. 깔끔한 금발과, 오랜 시간 헤매온 듯 단정하진 못한 얼굴이 드러났다. 마레였다.

"네 친구다. 찾으러 왔다."

마레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어왔다. 그 목소리는 한없이 가볍고, 그리고, 따뜻했다. 약속에 늦은 친구의 집 앞에서 할 법한 목소리였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름드리 나무처럼, 수직으로 치솟아 가지를 뻗은 은하가 마레의 발 밑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마레의 금발은 유독 밝게 빛났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지? 돌아가자."

마레는 손을 내밀어왔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어렴풋이, 듣기를 기대하고 있던 말이어서, 아주 조금 눈물이 배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억눌러 참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침묵 뿐이었다. 그 침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마레는 곧 목소리를 진지한 톤으로 바꾸어 설득을 이어나갔다.

"소문도, 뒤처리도, 전부 신경 쓸 것 없다.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를 직접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으니까. 내가 책임지고 전부 처리해뒀다. 모두가 너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부디 이 손을 잡아다오."

아이는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하늘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날, 북서자치령에서 보았던 밤처럼, 맑고 깨끗한 별하늘이었다. 그 때는 자신이 손을 내밀었었다. 무언가를, 용서했다고 생각했었다. 마레는 아마도 이번엔 자신이 손을 내밀 차례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손을..."

하지만 아이는 침묵했다. 희끄무레한 별빛들이 뭉쳐, 어떤 형상을 그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환영이었다. 그 사람들은 또다시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책망하고 있었다.

"특히, 그 율사 아가씨가 너를 너무 보고 싶어해."

다나의 근황을 전하는 말을 듣고, 아이는 결심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한 발자국을 나아가자 두 발자국도, 세 발자국도 쉽게 내딛어졌다. 아이는 내뻗은 마레의 손을 무시하고, 곁을 스쳐지나갔다.

"돌아가세요."

"잠시, 잠깐만."

"소문과 다른 것도, 오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아이는 낼 수 있는 가장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레의 표정이 굳었다.

"사정도, 오해도 없어요. 당신의 양부가 더 올바른 인간일 테죠."

"이봐, 그게 무슨..."

"레고르 보르지아. 나의 사형은 내 모든 것을 가져갔어요. 나와 늘 함께였던, 잊혀진 신의 힘을 강탈해서 학살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어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준 그 녀석도, 그래서는 편히 안식을 찾지 못할 거에요. 그래서,"

아이는 잠시 침을 삼켰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레고르를 죽여서,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의 양부는 이미 전란으로 혼란해진 제국에 또 다른 전쟁은 안 된다고, 저를 막았죠. 그래서, 싸웠습니다. 그 결과가 그 날의 일이에요. 사정도, 뭣도 없어요. 그냥 제 복수를 가로막았기에, 베었던 것 뿐."

마레는 말이 없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너..."

"사라지세요. 당신까지 베어버리기 전에."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별밤이 고인 호수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 손을 마레는 붙잡지 못했다.

*"그 어줍잖은 복수귀 흉내는 뭔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또 승강기 위였다. 쇠사슬은 육중한 유음을 일으키며 아이와 아잘록을 탑의 끝으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또 어느새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이미 승강기는, 텅 빈 관이 있던 층을 멀리 지나쳤다. 아이는 끝없이 가까워지는, 하지만 도저히 도달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대답했다.

"거짓말이니까요."

"거짓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습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그랬다면, 좀 더 많은 수행원과 함께 왔겠지요."

마레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우렐리우스를, 그리고 륜과 빌헬름을 죽였던 그 일은, 수습이 가능한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거짓말이에요... 알 수 있어요."

그냥, 아무런 대책도 복안도 없이, 그저 자신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온 대륙을 헤맨 끝에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저를 데리고 가면."

마레는 분명히 위험해진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그저, 아우렐리우스가 최대의 피해자이자 올바른 성인으로 기억되는 지금의 세상 속에 남겨주고 싶었다.

"내가 그냥, 복수에 미친 걸로 하면. 성인의 양아들이니까, 마레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을 만큼 큰 권력을 얻을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안전할 거에요. 그러면, 나 대신 별이 되어 줄 거에요. 왜냐면, 나랑은 비교도 안 되게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것 하나만큼은, 아우렐리우스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껏 올바른 위치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마레가, 자신을 위해서 위치를 바꾸지 않았으면 했다.

아잘록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이 그대의 목적대로 되었다는 것 아닌가."

"조용히 하세요."

"그 마레라는 자는 분명히, 뛰어난 이성을 가진 자처럼 보이더군. 축하하네. 자네 덕분에 세상은 조금 더 진보된 지식을 향유할 수 있게 되겠어."

"닥치라니까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아잘록이 더없이 성가셨다. 아이는 돌조각을 주워 아잘록에게 집어던졌다. 정면에서 그 돌조각을 얻어맞고도, 아잘록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내가 또 실언을 했나. 미안하네. 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는 몸이라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잘록에 관한 보고서 중 그런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잘록의 재능은 평범, 범재 그 자체였다고. 그럼에도 이 자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것 하나뿐이라고. 그렇기에 그가 살아 있다는 체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학구열밖에 없었으며, 그 놀랍고도 집요한 성취는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어렸을 때도 자주 꾸지람을 듣곤 했지. 형과는 영 딴판이라서 말이야."

"형? 당신한테 형제가 있었나요."

"있었지."

길 아잘록의 가족.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일 텐데도 어쩐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것에게도 피붙이가 있다는 생각은 쉽사리 연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별의 죽음이나, 바다의 고갈처럼, 분명히 존재하기는 할 것이나 막연했다. 하지만 아잘록은 아랑곳않고, 사방을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은... 그래, 아주 영민한 사람이었지.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다정한 사람이었다네. 한 번은, 들판에 약초를 채집하러 함께 들린 적이 있는데 말일세. 메마른 들판에 죽어 있는 물소 떼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네."

"물소 떼라니..."

"한 무리의 마법사가 그저 재미로 죽이고 버려둔 것이었지. 가장 부드러운 옆구리살 한 움큼만 그 자리에서 구워서 먹고 시체는 버려두었어. 종 전체의 생태 구성에 있어서는 비효율적일지 모르나, 분명히 합리적인 행동이었어. 물소 고기래봤자 몇 푼 하지도 않는데, 운반할 가치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형은 그 구더기가 들끓는 물소 떼가 가엾다고 했었지."

아잘록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째서 나의 형처럼 영민한 사람이 그 죽음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다정함이란, 오히려 이성을 가리는 장막이 되는 것인가. 그 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네."

"당신다운 생각이군요."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길 아잘록다운 예화였기 때문일까, 방금 전까지 아이를 사로잡던 침울함은 그 답답함에 휩쓸려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당신의 형도 아지프의 마술사였나요?"

"그랬었지."

"그랬었다는 말은..."

"죽었다네. 어렸을 때."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실례되는 말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잘록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다음 목적지가 가까워졌군."

"벌써요?"

"벌써라니, 이 곳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자네의 의식의 흐름에 기반하니, 아마 체감하기 힘들겠지만 말일세. 바깥에서의 자네는 벌써 75시간째 잠들어 있다네. 쌍어궁과의 싸움에 여간 지친 모양이야."

아잘록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얼핏 듣기에는 인자한 중년의 음성처럼 들릴 정도로 부드러운 웃음소리였다.

"그동안 이 승강기는 쉴새없이 걷고, 추적을 뿌리치고, 또 걸어서 자네가 말한 장소 근처에 이르렀다는 걸세."

"그랬군요."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닥치세요. 당신은, 이제보니 꽤나 뻔뻔하군요."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마술사 같은 일을 어떻게 하겠나."

아잘록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승강기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치솟던 사슬의 속도가 줄어들어서, 그 고리의 형상이 선명히 보일 정도가 되었다. 아잘록은 뒤돌아선 채 말했다.

"분명히, 목적지는 이 곳이었지."

덜컹, 큰 소리와 함께 승강기는 멈춰섰다. 다음 순간, 아이는 현실에서 눈을 떴다.

"아."

자신은 검푸른 표지석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고딕 양식의 건물들과, 그을음이 배인 색유리로 뒤덮인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나사렘."

신이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표지석에 적힌 글귀를 중얼거리며, 아이는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확인했다. 에바와, 그리고 아셀라이와 처음으로 만난 도시. 나사렘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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