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70화 (270/279)

45. 순례 ( 3 )

나사렘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수난곡 속에 박제된 것처럼 개성 없고 규격화된 종교적 건물만이 도열해 있던 도시는, 그 음울한 빛깔을 벗은지 오래였다. 상인의 천막이 곳곳에 내걸려 손님을 맞고 있고, 짐을 가득 싣은 짐마차가 나무바퀴를 삐걱거리며 한 때 고행자들만이 오갔던 다리를 넘고 있었다. 너무나 번잡스러웠기에, 명백히 특이한 행색인 아이의 모습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아."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동상이었다. 그때 한없이 핏물을 흘려 이 땅 전체를 잠기게 만들었던 박애의 외신을, 이 자들은 동상으로 만들어 전시해놓고 있었다. 물론, 그 원본의 흉악한 모양새는 상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생김새는 영 딴판이었다. 그것은 그저 흔한 영웅극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와 아주 닮은 것도 있었다. 그 박애의 외신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는 자신의 동상. 그것은 아이의 모습을 아주 빼다박아 있었다.

"엄마, 저것 좀 봐!"

멍하니 동상을 들여다보던 아이를 보고 그 주위를 지나가던 꼬마 하나가 손가락질했다. 주변 사람들 여럿이 수군대는 것이 들렸다. 아이는 얼른 뒤돌아서서, 혼잡한 거리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한산한 곳에 있다가는 이 동상 때문에 정체를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처 없이 걷던 아이는 곧 후미진 구석에 접어들었다. 수해로 무너진 나사렘의 저지대는 천막과 급조 주택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조금 더 어두운 이야기와 소식들이 돌아다녔다. 피난민들이 한가득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알지도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아무 곳에나 불을 피우고 모여서 어두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기, 꼬마야."

아이는 결코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 놓고 앉아 있는 꼬마에게 물었다. 꼬마는 생기 잃은 눈으로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이 후드, 얼마니."

꼬마는 입을 뻐끔거릴 뿐 제대로 된 가격을 말하지 못했다. 동전을 보여주며 몇 개냐고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꼬마는 이해할 수 없는 마술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동전을 보았다. 아무래도 화폐라는 개념이 없는 벽지에서 올라온 모양이었다. 어째서 이 곳까지 오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레고르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자가 변방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있으므로, 허겁지겁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이는 후드값으로 금화 한 닢을 건네주었다. 이런 다 떨어진 후드 따위는 몇백 벌을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는 별다른 감사 인사도 없이 받아들였다.

그 까만 옷을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고, 아이는 정처 없이 나사렘을 헤매기 시작했다. 아셀라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일선에서 물러나서 이 곳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쉬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사렘 전체를 일주하느라, 한낮을 모두 보낼때까지도 찾을 수 없었다. 비로소 실마리를 찾은 것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건."

담벼락에서, 낙서처럼 보이는 금색 선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지나쳤을 것이지만, 아이는 그 금색 선에서 분명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셀라이의 마력이었다. 그 금색 선은 담벼락을 따라서 죽 이어져 있었다. 외신이 등장해서 폐허가 된 구 중심지 쪽으로.

"오라는 건가."

어쩐지 이 선은 자신의 방문을 예비하고 그려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그 선을 따라 죽 걸었다. 망가져 파헤쳐진 도로를 지나고, 버려진 건물과 병원을 지나고, 마침내 도시 바깥까지 선은 이어져 있었다. 울창한 숲의 가지마다 어스름이 맺혀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 끝에, 아이는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어떤 자매에게 조각을 선물해주었던 공터였다.

"도착했구나, 제자야."

낯익은 음성이 아이를 반겼다. 그녀는 공터의 나무둥치에 뒤돌아 앉아 있었다. 석양은 그 연한 백금발에 주홍색 띠를 그렸다.

"이떄쯤 나를 찾아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우유부단한 녀석이니까. 마지막 순서로 나를 남겨두었겠지."

"스승님..."

아셀라이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럴 법도 했다. 그는 아우렐리우스의 심복이었으며, 또 길 아잘록과의 전쟁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이는 후드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비끄러맨 천갈궁의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알고 있다면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얌전히, 인마궁을 건네주세요.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건네주면, 무얼 할 생각이냐."

"당신의 인마궁을 건네받으면, 이제 레고르 보르지아의 검을 제외한 모든 베루스가 한 자리에 모입니다. 그것으로, 나는 묵은 원한을 끝내고 전쟁의 진정한 막을 내리려고 합니다."

"아니, 내가 묻는 건 그 다음이다."

아셀라이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름다웠다. 석양빛 아래서, 그녀는 여느 여인과 똑같이 보였다.

"그렇게 레고르를 죽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뭘 할 생각이냐."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셀라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눈빛에는 회한과 자조가 섞여 있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거냐?"

아이는 여전히 침묵할 뿐이었다. 아셀라이는 손을 내뻗었다. 지금까지 아이가 따라온 금색 줄이 모두 떠올라 나비검의 형상을 갖추고, 아셀라이의 팔에 모여들었다. 자그마한 검들이 추는 원무 속에서 아셀라이의 긴 머리칼은 커튼처럼 흔들렸다.

"나만은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나만이 짐작할 수 있을 거다."

"무슨, 말인지요."

"죽을 생각인 게 아니냐."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셀라이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어느새 모여든 나비검은 길다란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아셀라이는 그 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가볍게 휘두르며 말했다.

"레고르 보르지아. 카나기의 왕을 죽이고 나면, 이제 이 세상에는 아나테마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겠지. 그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마지막 사람은 네가 된다. 그것을 용납하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겠지. 네 이 목적 없는 순례의 끝은, 결국 그런 슬픈 결말인 것이 아니냐."

아이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안다는 거죠."

"너와 같은 생각으로 이 세상을 헤맸으니까. 그리고, 네가 나를 구해주었으니까."

아이는 말문이 막혔다. 죽을 생각으로 세상을 유랑하던 아셀라이가 떠올랐다. 이어, 시체가 산처럼 뒤덮인 언덕에서 홀로 노을빛을 받던 아셀라이가 떠올랐다. 지금, 결연한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보는 아셀라이의 얼굴 위로 그 두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미안하지만, 이 인마궁을 그냥 넘겨줄 수는 없다. 나는 네가 마지막까지 지켜내지 못할 한 사람을 위해 너와 대적하겠다."

"그게... 누구죠."

"너 자신."

아이는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이런 때까지도 나잇값을 못하고 소년처럼 행세하는 스승이 한심해서, 그래서, 사랑스러워서. 갈라진 웃음 사이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 그 모든 감정을 떨쳐버리고, 천갈궁을 세게 쥐어잡았다.

"너무 늦었어요."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강렬한 검풍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이것 역시 익숙한 기풍이었다.

"안 늦었어!"

단검, 앳된 목소리. 그 주인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에바였다. 한때는 아셀라이와 적이었던 그녀가, 지금 같은 목적으로 힘을 합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는 간신히 몸을 빼냈다. 공중제비를 돌며 뛰어오른 에바는, 아셀라이 옆에 착지했다. 아셀라이는 한 팔로 에바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조력자다. 어때, 이 정도면 이 쪽도 승산이 있지 않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유령처럼, 검을 비껴잡고 달려들 뿐이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 했잖습니까."

밤이 깊을 무렵, 승부는 났다. 처절한 승부였다. 하지만, 승자는 역시 정해져 있었다. 아이였다. 아이는 비척이며, 아셀라이의 인마궁을 천갈궁으로 거두어들였다. 그녀는 마지막 일격으로 정신을 잃은 듯,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혼절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천갈궁은 나비검을 모두 집어삼켰다. 그러자 천갈궁의 검면 위로 금빛 띠가 새겨졌다. 이것으로, 베루스는 7개가 모였다. 남은 것은 레고르의 백양궁, 단 한 자루 뿐이었다.

"쿨럭, 커헉."

아이의 몸상태도 멀쩡하진 못했다. 암석을 붙잡고 검은 피를 쏟아내던 아이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가려진 시야로 보이는 하늘은, 녹내장에 걸린 화가가 그린 하늘처럼 뿌옇게 보였다. 비척이며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가지 마..."

무언가가 자신의 다리를 붙잡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에바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녀는 아이의 다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

"놔."

아이는 짐짓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에바는, 오히려 더욱 세게 매달리듯 아이의 발을 붙잡았다. 그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가지 마아아..."

아이는 가만히 에바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반쯤은 아나테마였다. 두냐의 검은 개. 운명을 바꿀 요소를 완전히 제거해야 미래를 지킬 수 있다면, 그녀 역시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어떤 감촉이 손끝에 되살아났다. 륜의 심장을 찌르던 때의 감촉이었다.

"네가 떠난 이후로, 똑똑해지고 싶어서... 많은 책을 읽었어. 대부분은, 싫은 이야기 뿐이었어. 네 이야기도, 그렇게 끝나게 두고 싶지 않아. 착한 사람이 벌 받는 이야기는 싫어.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마..."

에바는 울먹거리며 두서 없이 중얼거렸다. 아이는 검 손잡이에서 힘을 뺐다. 대신 발에 힘을 주었다. 매몰차게 에바를 뿌리치고, 아이는 숲 속으로 걸어나갔다.

*"그 고양이를 닮은 여자아이는 죽이지 않는 건가? 차별적이군."

"저런 녀석 때문에 멸망할 세상이라면, 딱히 손대지 않아도 멸망할 거에요."

아잘록의 비꼬는 듯한 말에 아이는 조용히 응수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잘록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뭔가 걱정거리가 늘어난 듯한 모습인데. 뭔가."

"닥쳐요."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였다. 에바 단독으로는 운명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자신이 엮이면 달라질 수 있었다. 에바나 아셀라이처럼, 운명을 바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흔적과 접촉하는 것,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운명이 바뀔 것이 두려워진 것이었다.

"아."

잠시 웅크려 앉아 고민하던 아이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법 또한 본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아이는 깨달았다는 듯한 탄식을 흘리고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동안 승강기는 끊임없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아잘록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래, 이 승강기에게 말해 보게. 이번에 가고자 하는 행선지는 어디인가."

한참을 망설이던 아이는 마침내 대답했다.

"제도의 대법원. 그 곳으로 보내 주세요."

그 곳은, 다나가 기다리는 곳이었다.

어둠 속에서 대법원의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물끄러미 그 날렵한 유선형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법원마저 눈을 감고 잠에 든 것처럼,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단 하나의 방만이 예외였다. 최상층에 있는 다나의 방이었다. 꼭대기에서 희끄무레한 빛 하나만을 흘리는 대법원은 죽어가는 등대처럼 보였다. 아이는 천천히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은 옅은 냉기를 토하고 있었다. 그 표면은 희미한 달빛을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게 반사했다. 아이는 소리없이 발을 옮겼다. 발걸음은 무거웠다. 만나러 가야만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막 다나와 함께 신전을 빠져나와서, 거두어졌을 때였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가위를 망가뜨렸던 날이었다. 멍하니 움직이던 아이는 잠시 기둥에 이마를 대고 멈추어섰다.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죽을 때가 되면,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는 말이 진짜였나. 잠시 후, 기둥에서 이마를 뗀 아이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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