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순례 ( 4 )
나선으로 이어진 계단을 한참 걸어올라간 끝에, 마침내 다나의 방 앞에 도착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아이는 잠시 그 문 앞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십여 분을 망설인 끝에 문을 두들길 수 있었다. 한 번. 반응은 없었다. 힘을 내어, 세 번 두들기자, 비로소 반응이 있었다.
"누구죠?"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은 열렸다. 먼젓번에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초췌해진 다나가 드러났다. 피곤에 절어 있던 얼굴이었던 다나는, 잠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떨리는 손을 내뻗어서, 아이의 뺨을 만졌다.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알 수 없어서, 그저 가만히 침묵했다. 뺨을 매만지던 다나는 곧 말없이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흐느꼈다.
"보고, 싶었어요..."
얼마나 좋았을까. 웃으면서 다녀왔다고 할 수 있었더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저 하얀 어깨를 붙잡아 줄 수 있었더라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몇 분이 지난 후에야, 아이는 다나를 진정시키고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다나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신을 잊으라구요?"
"예."
아이는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검증된 해답이었다. 자신이 잠적해서 소멸한다 해도, 에바나 아셀라이 같은 자들이 자신을 찾아 헤매서 운명을 왜곡할 수 있었다. 선주에 의해 운명이 뒤바뀌는게 두려워서, 선대의 성녀는 선주를 역사에서 지워냈다. 마찬가지의 일을 다나가 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아무도 당신을 찾지 못하게 해 달라구요?"
"이 역사의 무대에서, 저는 그만 내려가고 싶습니다."
다나는 충분히 그걸 해낼 수 있는 권력과 마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7위계에 도달하면,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지워줄 수 있을 것이었다. 세계의 운명에 대한 염려. 그 날 이후로, 강박처럼 아이를 붙들고 있는 염려를 해소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왜요. 대체, 왜?"
그리고, 절대로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사람 또한 그녀였다. 다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세계를 위해서라거나, 운명을 위해서라거나. 그런 말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사적인, 또 어두운 동기가 아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성자 흉내를 내는 말을 꺼내서 다나의 입을 막고 싶지 않았다.
"그걸, 나한테 부탁하는 건가요."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다나와 함께 걸었던 길들이 생각났다.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과수원길도, 사위어가는 어둠 속에서 빛나던 별밤도 떠올랐다. 소중하게 생각하던 기억들을 모두 흩뿌리면서, 한 발자국씩 나아가던 그 날의 복도에서 느꼈던 슬픔들 그것을 다나에게도 강요하는 건가.
"싫어요."
"하지만, 해야 합니다."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다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어린아이 같았다. 앙다문 입술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인지, 방에 가득했던 꽃은 모두 죽어 있었다. 다나와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워서, 고개를 돌렸다. 황갈색으로 물든 유리 꽃병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유령 같았다. 그 떄, 귀에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을 풀어헤치는 소리였다. 멍하니 고개를 든 아이의 눈에, 새하얀 다나의 나신이 비쳤다. 옅푸른 밤공기 속에서 그녀는 하얀 섬처럼 떠올라 있었다.
"아."
아름다웠다. 여전히. 다나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더듬어 아이를 끌어안았다. 온 몸에 전해져오는 따뜻함 사이로 작은 슬픔이 솟아올랐다. 하얀 손으로 목을 더듬으면서 다나는 말했다.
"사랑해요."
무엇이든 할 테니까. 떠나지 말아 주세요.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그런 말을 덧붙였다. 아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같이 도망쳐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아이의 온 몸은 늘 무감각 속에 잠겨 있어서, 이렇게 온 몸에 번져오는 온기로만 자신의 형태를 추론해낼수 있었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자신을 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지,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불처럼 부드럽게 늘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아이는 말했다.
"놓아 주세요."
"안 돼요. 절대로, 절대로 안 놓을 거에요."
요지부동이었다. 다나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린 팔을 풀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품에 안긴 채로 보낸 5분은 영원처럼 길었다. 고민한 끝에, 이 팔을 풀게 할 방법을 찾았다.
"둘이서, 작은 마을에서, 오두막에서 숨어 살아요.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이미 그랬었잖아, 누나."
아이의 어조는 담담했다.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나...라면."
"그때, 북서 자치령에서, 할머니의 오두막에서 함께 지냈었잖아. 이름도, 서로 지금과는 달랐고."
"설마."
"그 때, 그날 밤에. 오두막에서, 나한테 죄를 덮어씌우고 도망쳤었잖아. 뭘, 둘이서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배를 항구에 정박시키기 위한 닻줄처럼, 견고하게 자신을 옭아매던 다나의 팔이 힘없이 스러졌다. 따뜻함 대신, 떨림이 전해졌다. 다나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괴로웠어."
"아..."
"차가운 감옥에 앉아서, 매일 생각했어.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아...아..."
다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듯이 무릎을 꿇었다. 아이는 입술을 악물었다. 간신히 낸 목소리는 기괴하도록 평이한 음조를 품고 있었다.
"어째서 누나는 날 버렸을까."
"미안..."
한참이나 침묵하던 다나는, 망가진 인형처럼 중얼거렸다. 그 빛을 잃은 동공은 다시 한 번 빛을 잃은 듯, 텅 비어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럼, 그 속죄로. 내 말을 들어줘."
"그런..."
"잊어줘. 다른 사람처럼, 나에 대한 모든 걸. 그게 유일한 방법일 거야."
아이는 분명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붙잡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푹 떨군 다나는, 망연히 읊조렸다.
"알겠,습니다..."
불 꺼진 방에는 다나만이 하얗게 남았다. 아이는 뒤돌아서서, 천천히 그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빠져나가는 아이의 오른발은 절뚝이고 있었다.
*"이거 놀랍군. 자네가 설마 자네의 누나를 증오하고 있었을 줄이야."
승강기에 돌아오자마자, 아잘록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것과 정서에 관한 얘기를 섞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사실을 통렬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끝없이 말려올라가는 쇠사슬을 등지고 앉아서, 어둠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닌가? 예전의 말대로, 그녀는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나?"
"닥쳐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왜 그런 짓을 해야 했던 건가. 자네와 엮이면 파멸하기 때문인가?"
아잘록의 입꼬리는 즐겁게 실룩거렸다. 아이는 그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무기력이 앞섰다. 그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을 뿐이었다.
"누차 깨닫지만 말일세. 사랑이란 건 정말 이해하기 어렵군."
"당신에게는 그렇겠죠."
"흠, 그런가. 그럼 자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내 이야기를 한 번 꺼내보아도 괜찮을까."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잘록의 넓은 등이 보였다. 석관으로 가득한 벽면을 올려다보면서, 그것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꺼내고 있었다. 아잘록이 자신의 생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언제의 일이죠."
"내 어린 시절의 일일세. 그래, 나와 형의 이야기지."
아잘록은 아이의 허락을 구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나와 형은 쌍둥이였다. 그리고, 함께 아지프의 징병에 당했어. 당대의 학장이 주선한 실험에 억지로 참여하게 되었지."
"무슨, 실험이었죠."
"귀조. 거짓을 말한 영혼을 먹는 새를 인간에게 접붙이기 위한 실험이었다."
귀조 세네터. 그것이 어떻게 아잘록의 동반자가 되었는가. 그 연유를 밝히려는 모양이었다. 어찌되든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는 성의 없이 말을 받았다.
"형은 천재였다. 그리고 나는 무능했지. 무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파탄난 존재였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는 몸이니 말이야."
"그런가요."
"아지프답게, 실험은 잔혹했지. 귀조의 주인을 찾기 위해 여러 시험과 실험을 진행했다. 그것은 씨를 솎아내듯 인간을 솎아냈다. 매 주마다 가장 재능 없는 것, 가장 쓸모 없는 것부터, 도태시켜가는 룰이었다... 그리고, 귀조는 벌써 첫 주간에 주인을 정했지."
아잘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귀조는 형에게 붙었다."
"예?"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의외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아니라요?"
"나처럼 재능 없는 범재에게 귀조의 왕이 어째서 영혼을 허락하겠나. 독수리가 살이 많은 시체에 붙듯이, 그것은 형에게 붙었다. 위기였지. 주인이 정해지면, 나머지는 모두가 폐기 처분을 당하는 룰이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살아남았지. 형이 나와 자신을 바꿔쳤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멍하니 아잘록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에서는 짙은 공허함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세네터가 나를 선택하기 위해 깃을 고르고 있노라고, 거짓으로 보고를 하고, 자신은 재능으로 매 주간을 버텨나갔다네."
"하지만... 귀조를 달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래서 죽었지."
아잘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담담함은 어떤 분노보다도, 무섭고 비인간적으로 들렸다.
"내가 귀조의 주인이라고 말하던 형은 결국 마지막 주간을 넘기지 못하고 영혼을 파먹혀서 백치가 되었고, 죽었다네.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 구덩이에 던져졌지."
아잘록의 어조는 여전히 평이했다.
"나는 형의 이름을 빌린 채로 그 실험을 빠져나왔다네. 형의 영혼을 다 파먹은 귀조는, 내 어깨에 붙었지. 우리 형제가 유독 맛이 좋았던 모양이야."
"그럼... 당신은."
"그래. 길 아잘록은, 원래 형의 이름일세."
아잘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을 표정이었다.
"길 아잘록이 귀조의 주인이다. 그렇게 말해야 했으므로, 나는 이름을 잃었지. 나는 내 이름을 길 아잘록으로 바꾸었어."
"그럼... 당신의 원래 이름은."
"잊었다. 나는 형의 망령이야."
아잘록은 툭 말했다.
"나는 비존재다."
승강기는 우르릉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렸다. 다음 층에 거의 다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어둠으로 가득한 이 장레탑은, 벽에 매달린 석관마다 끈적한 침묵을 토해냈다. 고요가 범람하고 있었다. 아잘록은 작은 말로 그 고요를 깼다.
"이해할 수 없었다네."
아잘록은 매달린 석관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이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아잘록이 이제부터 무슨 말을 꺼낼 것인지를.
"말해 보게. 내게 영혼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왜 타인과 이다지도 다른 것인가."
어느새 승강기는 멈춰 있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곳이 최상층이었다. 아잘록은 멈춘 승강기의 널판을 가로질러, 벽면의 관을 향해 걸어갔다.
"형은 왜 무능한 동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일까. 내가 죽는 것이, 진보에 더 걸맞았을 텐데."
"당신..."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그 뻔한 해답에 도달하지 못해, 세상 전체를 죽음으로 물들이려고 했던 광인. 길 아잘록은 고백하듯 말했다.
"그 해답을 듣고 싶어서 나는 영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네."
그리고 길 아잘록은 관을 열어젖혔다. 관에서 드러난 것은, 전혀 의외의 얼굴이었다. 마리아 칼벨레인, 아잘록이 거두어들인 나하트의 딸. 그녀가 심장에서 피를 흘리며, 인형처럼 고요하게 누워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는 실험을 하고 있었지."
아잘록은 마리아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형은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내가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잘록의 외알안경에 마리아의 갸름한 얼굴이 비쳤다. 횃불은 크게 흔들렸다. 역광 때문에, 아잘록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 같은 사람도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실험의 주제였다네."
아이는 그에게 압도된 채로, 멍하니 아잘록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의 관 앞에 선 채로, 아잘록은 담담하게 말했다.
"마리아 칼벨레인이라는 개체는 세간에서 통용되는 사랑이라는 상호작용에 가장 걸맞은 개체처럼 보였다. 괴팍한 나하트 칼벨레인을 버텨냈고, 아름다웠으며, 마술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희생정신과 봉사의 마음으로 가득했지."
아잘록은 마리아를 비호했으며, 장례탑에서 마리아 칼벨레인이 단테에게 찔려 죽을 때 뒤늦게 나타났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머릿속에 어떤 가설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목숨을 잃는다면, 나는 애틋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 설마."
"불가능했다."
그 모든 상황이, 그저 마리아 칼벨레인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실험을 위해서 유도한 것이었다면.
"끝까지,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자는 진정 괴물이었다. 가엾은 괴물. 아이는 길 아잘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통할 수 없었다. 그 기분은, 아마도 아잘록이 평생 세계에게 가져왔던 기분일 것이었다. 아잘록은 마리아의 눈꺼풀을 감겨 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는 같은 탯줄을 타고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받는 광증의 세례를, 나는 최후까지 받을 수 없었다."
세계는 나를 거부했다. 아잘록은 중얼거렸다.
"내 세계는 나 하나로 닫혀 있었다."
아이는 끝없이 펼쳐진 겨울바다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잘록이 품고 또 키워왔을 절망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감정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연민이었다. 자신의 무의식은, 저 자마저도,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더 바라보다간 그 연민이 더욱 거세게 피어오를 것 같아서, 아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잘록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부조리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마지막 진보를 보았다네. 누군가는 그 광증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나."
"당신은, 틀렸어요."
"다른가?"
아잘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는, 아잘록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린 아이의 턱을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그 때처럼.
"자네와 나는 닮은 꼴이라네. 거울의 양면처럼."
"무슨... 망언을."
"자네가 결국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미워할 수 없었듯이, 나는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었을 뿐."
"헛,소리를."
"그런가. 그럼 이건 어떤가."
길 아잘록은 또 다른 석관의 문을 열어젖혔다. 낯익은 관이었다. 맨 처음 륜을 만났을 때, 약혼을 위해 마련했던 관. 아이는 눈을 떼지 못했다.
"자네는 지금 자네를 배신한 이 여자를 미워하고 있는가?"
그 관에는 한 명의 신부가 누워 있었다. 살아서는 한 번도 입지 못한 드레스를 입은 채로. 아이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니오."
최소의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한다.
그 관의 끝자락에는, 언젠가 새긴 두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이는 몸을 일으키면서,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그녀도, 저도, 서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에요. 서로 방식이 달랐을 뿐."
"근거는?"
있었다. 지금까지 아이를 괴롭혀왔던, 아이가 죽여온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 륜은 그 환영으로 나타나면서도, 한 번도 아이를 괴롭히지 않았다. 언제나 그 작은 손으로, 꼭 안아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 말을 들은 아잘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돌벽에 울려퍼져 기괴하게 메아리쳤다.
"그런가. 그럼 자네 둘은 소통에 성공했단 말인가?"
"예!"
"어렵군... 어려워."
아이의 대답에, 아잘록은 륜의 관을 닫고 뒤돌아섰다.
"그럼 내 승강기로서의 업도 이것으로 마지막이군."
대화를 나누는 새에, 어느새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카나기의 땅, 달빛 속에서 갈대가 물결치는 들판. 최후의 적, 레고르 보르지아를 만나기 위한 장소였다.
"이것이 마지막 싸움일세. 그럼, 무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