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74화 (274/279)

45. 순례 ( 7 )

"그대는 영웅이며, 데몬스폰이며, 고결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소재가 있을까?"

아잘록은 도취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다. 그 때, 헤카톤 케이레스가 저항하기 전에, 자신을 붙잡고 영안을 열고 삶의 본질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할 때 이런 목소리를 했었다.

"이런 자를 절망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이 세계에 개별자가 무가치함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부터 안배해왔던 것인가.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려 들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치켜뜨는 것이 전부였다. 아잘록은 그 보람없는 저항을 음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그 마지막에, 나는 그냥 죽지 않았지. 내 특기를 기억하고 있나?"

특기. 어떤 인간의 비극적 결함을 쑤셔서,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는 것. 귀르겐처럼, 단테처럼, 타락시키는 것. 길 아잘록이라는 망령에게 특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밖에는 없었다. 아이는 짧게 속으로 탄식했다. 아.

"같은 작업을 위해서, 그 유리검에 꿰뚫릴 때... 나는 그대의 영혼에 내 정신 모두를 심었다네. 그대를 절망시키기 위해서, 그대를 이 결말로 인도하기 위해서."

말을 멈춘 아잘록은 뒤돌아서 걸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장례탑 전체에 메아리쳤다. 까치발을 선 길 아잘록은, 곧 하나의 관의 문을 열어젖혔다. 륜의 관이었다. 아이가 누워 있는 자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에 그것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들켰지."

길 아잘록은 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다.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내 계획을 대충 짐작하고 말았어."

그리고 길 아잘록은 반응을 살피듯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입을 움직일 수 있다면, 아이는 말하고 싶었다. 알고 있었노라고.

륜의 돌연한 배신 이후, 아이는 늘 밤을 새며 그 이유를 고민해왔다. 왜 자신을 죽이려 했을까, 왜 죽여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길 아잘록밖에는 없었다. 하필 자살이라는 끝을 선택한 것도, 륜의 판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약속했다. 자신은 이미 어떤 광기에 침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끌어안고 함께 소멸해야만 한다...

"아니야!"

아잘록은 껄껄 웃어젖혔다. 마치 아이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하늘을 보고 미친 듯 웃고는, 박수까지 치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자네를 살리고 싶었단 말일세!"

아잘록은 륜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뜬금없는 아잘록의 말에, 아이는 멍하니 륜을 올려다보았다. 석관에 누운 륜은, 여전히 그저 잠든 듯 아름다웠다.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심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 그 유일한 방법은 아나테마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어서, 스스로 희생하게 만드는 것일세. 이미 그녀가 한 번 제시한 해답이니 알고 있겠지. 그녀는 자네의 치료약이 되고 싶었기에, 죽음을 자처한 거란 말일세!"

아이는 멍하니 아잘록의 해답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나한테 말을.

"하지만 그녀는 또한 잘 알고 있었지. 그 사실을 말해봤자, 그대가 그녀를 죽일 리가 없다는 걸 말일세. 그러니 죽을 수밖에 없도록, 가장 알맞은 무대를 만들어 제공해야만 했지. 아, 동시에 세계를 위협할 아우렐리우스도 제거하고 말이야. 어때, 굉장한 계획이 아니었나?"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귀에 깊숙이 남은 륜의 유언. 하필 심장을 찔러달라고 부탁했던 것과, 부디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말. 그리고 그 이후 갑자기 진행을 멈춘 기면증까지, 모든 것이 길 아잘록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는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듯, 웃으며 다시 아이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계획에 유일한 헛점이 있다면, 자네일세. 자네가 삶을 저버리는 것 말이야. 그것만큼은 그녀도 모략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서, 자네의 친구들에게 걸었지. 자네가 정말로 사랑하는 친우가, 스승이, 그리고, 자네가 정말로 사랑하는 누나가. 자네를 붙잡아 세워줄 것이라고 믿었어. ...하지만, 자네는 어떻게 했지?"

아잘록은 아이의 턱을 두 손으로 붙잡아 들어올렸다. 그 외알안경에 아이의 얼굴이 비쳤다. 경련하는 아이의 심홍색 눈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네의 선택은 그냥 도망치는 거였지!"

길 아잘록은 들끓어오르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모략에 미친 악녀를 연기하면서까지, 연적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면서까지 널 살리려고 들었다. 하지만 그대는 여자의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해서, 죄를 짊어지고 살아달라는 소망을 무시하고, 자살한다는 멍청한 계획을 세웠다."

아잘록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온 힘을 다해 길 아잘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인가, 어째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잘록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결 달콤해진 목소리로 말을 꺼낼 뿐이었다.

"그대는 오늘을 피할 수 있는 모든 손길,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든 손길을 다 뿌리치고, 내 곁에 당도하고 말았군."

시야가 혼탁해졌다. 아까 보았던 광대의 카드가 어른거렸다. 속아 넘어가는 자. 자신은, 언제나 광대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아니면, 인간이란 결국 언제까지나 광대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게, 이것은 자네의 잘못이 아니야. 이것은 인간의 나약함이 낳은 엇갈림일세."

아이는 아잘록의 생각이 자신의 마음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진정으로 산파였다. 대화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내면에 깃든 생각을 읽어내고, 그것의 분만을 유도하고 있었다. 아잘록은 다시금 아이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던 자네와 그녀 사이에서조차..."

소통은 불가능했다.

"소통은 불가능하지 않았나?"

실존은 고통일 뿐이다.

"실존은 고통일 뿐이지 않았나?"

하나로 동기화된 정신 속에서, 아이는 아잘록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폭로하면서, 절망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허무와 마주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이 녀석의 의도대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검게 물들어가는 마음은 이미 아잘록이 취할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의 삶은, 그 선하고자 애썼던 모든 노력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아잘록은 천천히 석관이 가득한 벽을 향해 걸어갔다. 아잘록은 그 석관 중 하나를 움켜쥐고, 거세게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이토록 많은 실패와."

또 다른 석관을 열어젖혔다. 블뢰유의 얼굴이 보였다.

"실패와,"

단테의 얼굴이 보였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소중했던 사람들의 시체가 계속해서 석관 속에서 드러났다.

"실패 밖엔 없었잖나?"

한동안 장례탑의 벽을 일주하며 석관을 모두 열어젖힌 아잘록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전부 무의미하지 않았나?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았나?"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아잘록이 말을 그쳐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잘록의 목소리는, 절망을 찬미하는 싯귀처럼 감미롭게 계속해서 귀에 감겨들어왔다. 한참이나 장광설을 늘어놓던 아잘록은, 곧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곁에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어때, 내가 맞았지. 우리 모두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던 게 아닌가."

이것은 아이가 인간에 진심으로 절망하도록, 자신이 빠져 있는 나락으로 아이를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이 세상이 결국 부조리, 불통, 죄와 증오로 가득하다면, 그런 불완전한 다수의 종양이 버글대는 것보다는,"

그 속셈을 알고 있음에도, 아이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텅 빈 눈동자는 눈물을 흘리는 것도 멈추었다. 검은 파도 같은 속삭임에 침식된 마음은, 굴복을 마쳤다. 아잘록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꺾이지 않았던 그 마음이, 마침내 무너지려고 하고 있었다.

"하나의 신이 영생함이 옳지 않겠는가."

아잘록은 아이의 몸을 묶고 있던 주박을 풀었다. 아이는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눈에 아잘록에 대한 적의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허무가 고여 있을 뿐이었다. 아잘록은 마치 새로 탄생한 아이를 받아내듯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그것을 신호로, 승강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아잘록은 아이의 어깨를 쥔 채로, 나지막히 말했다.

"자네를 결과물로 하여, 내 마지막 증명은 끝났다. 영혼은 결국 고통을 피하기 위한 장기에 불과하며, 삶은 무의미한 것일세."

우르릉 소리와 함께 솟구친 승강기는, 탑의 천장을 쳐부수고 옥상에서 멈추었다. 이 승강기에 틀어박힌 이후 처음으로, 탁 트인 세계의 전경이 아이의 눈에 들어왔다.

잿빛에 파묻힌 세계. 모든 생명이 사멸한 곳. 자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어떤 것도 탄생하지 않고,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는 우주. 폐허가 된 세계였다. 언젠가 꿈 속에서 걸었던 사막을 닮은 그 세계에서, 아이는 길게 울부짖었다. 아잘록은 그런 아이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일어나라."

모든 것을 사랑하려 애썼으나, 결국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 자.

초인의 외신, 아이우르드.

그는 피와 울음소리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련이다. 신기하네요. 지금 피는 계절이 아닌데, 참 잘 돌보셨나 보네요?"

미안해.

"우리는 동료가 될 겁니다. 반드시."

미안해.

"그래서, 당신은 그 아이가 한 질문의 답을 찾았나요? 뭐가 되고 싶은 건가요."

미안해.

다들 너무 소중해서,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아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한 상태에서, 의식 깊이 가라앉아 사과만을 반복하던 아이는 입을 멈추었다. 가슴과 등에 따뜻함이 번져왔다.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감촉만으로 알 수 있었다. 륜이었다. 온기로부터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왔다. 그런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륜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으면서, 륜의 신기를 받아들여 잠에서 벗어났다. 그때 륜의 일부 역시 아이의 마음 속에 흘러들어왔다.

하나의 경이가 된 아이의 정신 속에 남아 있던 것은, 아잘록 뿐만이 아니었다. 륜도 늘 함께였다. 그녀가 언젠가 했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해주고 있었다.

"아직 너한테는 할 일이 남아 있다. 일어나야 하지 않겠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도 알 수 있었다. 선주였다. 그 역시 아이의 마음 깊숙한 곳에 흘러들어서,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아이는 사과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무섭게 들려도, 누구보다도 따뜻한 목소리였다.

"어린 순례자야, 검을 집어라."

*"윽, 헉."

아이는 식은땀에 젖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낯선 나무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잘록은, 세계는. 중얼거리며 가슴을 매만지던 아이는, 잠시 멍하니 주변 환경을 살펴보았다. 오두막집이었다. 북서 자치령의 화전민촌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었다. 자신은 나무를 베어 대충 만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여기는?"

아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 곳에서 눈을 뜬 것인지, 지금 이것이 현실은 맞는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런 아이를 일깨운 것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젠장, 사흘 밤낮을 퍼질러 자더니 이제야 일어났냐?"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일까, 갈색 더벅머리의 남자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가왔다. 아이는 그 남자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 곳이 어디인지..."

"아이."

"예?"

이 자는 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인 것일까? 아이는 놀란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젊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곳이 어디냐며. 여기, 아이라는 마을인데. 북서 자치령 촌구석에 박혀 있는 곳이야."

"아."

떠올랐다. 먼 옛날, 어떤 남자가 죽어가면서 그렸던 고향. 자신의 이름의 기원이 된 마을. 그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아이는 기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침대 옆에 털썩 걸터앉은 젊은 남자는, 그런 아이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뭐야, 댁 이름도 아이였어? 나 참. 이거 대단한 우연이네."

"그렇,지요."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도슨이라고 소개했다. 작은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놀고 있는 도슨에게, 아이는 또다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저, 도슨 씨..."

"그냥 도슨이라고 불러."

"도슨. 저는 왜 이 곳에 있던 거죠?"

"그건 널 업고 온 여자한테 물어야 하는 거 아니냐."

"여자?"

"뭐야, 모르는 척 하는 거냐? 맹인인데도 어찌나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던지, 나는 분명히 연인이나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과 함께 도슨은 침대 구석을 가리켰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곳을 바라보았다. 때를 탔음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분홍빛의 머리가 보였다. 자신의 침대 끝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다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