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75화 (275/279)

45. 순례 ( 8 )

초췌해진 아이가 방문한 다음 날.

하루. 단 하루동안 죽은 듯 쓰러져 있었던 다나는, 새벽이 밝아오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녀의 상징인 장신구를 벗어던지고, 율사의 옷마저 곱게 개어 남겨두고, 그저 여염의 평범한 아낙과 같은 옷을 입고 법원을 빠져나왔다. 아이를 뒤쫓기 위해서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결계가 다나의 앞을 막았다. 의장을 벗어던졌다 한들, 다나의 몸에는 여전히 블뢰유로부터 계승한 혼이 남아 있었고, 고로 그녀는 성녀였다. 제도를 둘러친 금빛의 결계는 성녀가 함부로 바깥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색빛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결계의 표면을 매만지던 다나는 곧 결심을 했다.

"스승님, 부디 용서해주세요."

그녀가 아는 스승이라면 흔쾌히 허락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길로 다나는 제도의 뒷골목, 부랑자들과 무법자들이 사는 어두운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빈민굴의 버려진 공원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에게로. 그는 신분을 위장한 가미온의 사제였다. 처음 다나가 그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악사는 자신을 체포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극도로 긴장했다. 하지만, 곧 다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성, 성녀님. 정말입니까?"

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던 악사는, 결국 다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가미온의 사제들이 들고 다니는, 계율을 깨는 단도였다. 다나는 지금 아이를 찾기 위해서, 율사의 자리도 성녀의 자리도 내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악사는 조심스럽게 팔뚝 어림에 단도를 그었다. 푸른 빛이 단도에서 흘러나와 그녀의 핏줄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일을 마친 악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이제 성녀께서는 가미온의 신도가 되셨습니다. 그 분은 신도에게 어떤 공물도 원하지 않으시며, 그저 신도가 마음 가는 길을 따라 방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부디, 자유로워지시길."

"감사,합니다."

파계 율사가 된 다나는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피를 삼키며 간신히 말했다. 다나가 품은 마력의 양은 보통이 아니었으므로, 개종에 따른 내상 역시 심했다. 한참이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신음하던 다나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한 줄기 새어나왔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가미온의 사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주제 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체 왜 갑자기 이런 선택을..."

"꼭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입니까? 성녀의 직위를 버려야 할 정도로?"

"목숨을 버리더라도, 찾아야 해요."

그 결연한 대답에 악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자그마한 부적이었다.

"받으시죠. 이건 가미온의 신도에게만 허락되는, 방랑하는 자에게 길을 인도하는 부적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목적지가 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지요."

"이런 걸..."

"꼭, 목적을 이루시길 빌겠습니다. 그럼."

악사는 다나의 손에 부적을 쥐어주고 사라졌다. 다나는 그 부적에 마력을 불어넣어보았다. 그 말대로, 어둠으로 물든 그녀의 시야에 하얀 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선은 제도의 개구멍에서, 대법원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이가 더듬어 헤매온 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다나는 사라진 악사에게 꾸벅 인사하고, 조심스럽게 그 선을 더듬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성녀가 아니게 되어버린 다나를 결계는 더 이상 가로막지 않았다. 그 날부터, 다나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하얀 선은 그저 아이가 헤매온 길을 정직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다나는 그 선을 따라서, 아이가 헤매왔던 길을 그대로 더듬어 헤맸다. 소금으로 하얗게 뒤덮인 사막 위를 걷고, 망가진 폐허와 시체가 가득한 초원을 걷고, 전쟁으로 불타 반쯤 죽어가는 수림을 걸었다. 순탄한 길은 결코 아니었다. 다나는 맹인이었다. 마력으로 희미하게 주변의 형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력이 떨어지면, 다나는 스스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숨죽여 밤을 지새워야 했다. 탈진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아마도 제도에서 파견되었을 추격대를 피해서, 진창과 시궁창에 몸을 뉘여 숨은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전쟁의 여파로 시체가 썩어가는 초원을 헤매던 어느 날은, 마력이 떨어졌는데도 더듬거리며 움직이다가 커다란 구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흣, 흐읏... 으윽."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는 것을 커다란 충격음으로 알 수 있었다. 떨어지면서, 발목을 삔 것 같았다. 시큰한 아픔 때문에 눈물이 배어나왔다. 다시 일어서려던 다나는, 발목의 통증 때문에 몇 번이나 구덩이에 다시 쓰러졌다.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발목 뿐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혹사에 시달린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나는 잠시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막처럼 검은 시야 위로,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그 날의 풍경이었다. 그 날, 대법원에서, 자신이 동생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모진 말을 쏟아내던 때. 그 때 아이의 표정이 시야 가득히 떠올랐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래서 보이는 것도 있었다.

"굳이, 표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신을 원망한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아이. 그 녀석은, 분명히,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어떤 절망적인 적과 싸울 때에도,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녀석이.

"응, 가야지. 누나니까."

다나는 격통을 참으며 일어섰다. 더듬거리며, 구덩이의 벽을 짚기 시작했다. 쓰러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언제나 그 방의 풍경이 되살아나 다나를 움직였다.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동안 그녀가 몸을 바쳐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왔지만, 미련 따윈 없었다.

"율사가 되었던 것도, 싸웠던 것도, 모두 다. 너를 보고 싶어서 했던 일이었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다나는 구덩이의 요철에 발을 들이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끄러졌다.

"꺅!"

아무래도 이 구덩이는 시체를 묻는 구덩이였던 모양이었다. 벽을 기어올라 탈출을 시도하다 창에 꿰뚫린 남자. 그의 시체가 물컹거리며 다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한 번 바닥까지 떨어진 다나는 심호흡을 길게 했다. 코가 떨어질 것 같은 악취가, 오히려 다나에게 힘을 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다나는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눈 앞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빛을 향해서.

"세상의 운명이 일그러지고, 뭐고, 필요없어. 나는 이 세상보다도 네가 더 소중한 걸."

잊겠다는 약속 같은 거, 내가 지킬 거라고 생각했어? 네 누나는, 약속을 어기는 건 특기잖아. 다시금 눈 앞에 떠오른 아이의 얼굴에게, 실없는 농담을 하고, 다나는 마침내 구덩이를 벗어났다. 잠시 숨을 돌린 다나는, 삔 발목을 절뚝거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흔적을 쫓아서.

"왔군."

그리고 한참을 헤매인 끝에, 도착했다. 나사렘에. 아셀라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나를 마중했다. 꼴이 말이 아니라면서, 그녀의 처소로 데려가서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주었다. 왜 성녀의 자리를 저버렸냐는 꾸중 따위는 없었다. 아셀라이 역시, 한 마음이었으니까.

그 날 저녁, 아셀라이는 다나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모든 것을 들려주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입술을 짓씹으며 이야기를 듣던 다나는, 결국 마지막에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세상의 운명을 위해서, 아이가 스스로 자진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런... 바보 같은, 멍청한..."

그날 밤, 다나는 울었다. 세상이 꺼지도록 울었다. 한참이나 흐느끼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일을 치르기 전에, 빨리 찾아서, 이번에는 구해줘야 하는데. 다시 만난 다음에 있었던 일도, 어렸을 때의 일도, 사과해야 하는 일들 뿐인데.

"어디로 간 거야, 바보야..."

그렇게 한참이나 흐느끼던 다나는, 문득 울음을 멈추었다. 어떤 장소가 마음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잊혀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다면, 자결을 한다면,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장소... 아."

있었다.

마술사의 카드와 바보의 카드를 뽑았던 두 사람.

그 두 사람을 빼면, 이 세상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장소가.

*마침내 림의 신전에 도착한 다나는, 그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막힐 정도로 강한 신기가, 마력이, 검고 무서운 무언가가 입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힘을 풍길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알기로는 이 세상에 한 사람뿐이었다. 다나는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신전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돌벽을 짚으면서, 조심스럽게. 어렸을 때 한 번 왔었던 길이라서 구조를 알고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이건... 뭐지."

그리고, 통로의 끝자락에 다다른 다나는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물컹한 무언가가 발 감촉 가득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력을 집중하여 형상을 살펴본 다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장 같은 촉감의, 검은 살덩이가 신전의 마지막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고랑마다 검은 오수가 질퍽거렸다. 생물의 위장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다나는 몰랐지만, 이것은 아이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길 아잘록의 알현실, 헤카톤 케이레스를 초인의 외신으로 만들려던 그 부화실을 가득 메운 오수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윽...윽."

그 살덩이를 헤집으면서, 다나는 간신히 신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기감을 예민하게 세우고 신전 내부를 살펴보았다.

"아."

그리고, 맥이 풀려 쓰러질 뻔 했다. 희끄무레한 형체가, 가슴에 검을 꽂은 채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미, 아니야. 다나는 손을 떨며 황급하게 그 형체를 향해 달려갔다. 얼굴을 더듬었다. 아이가 틀림없었다. 자신이 들고 다니던 천갈궁으로, 스스로의 심장을 찌른 채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너질 듯했던 다나의 얼굴은, 곧 확 밝아졌다.

"살아, 있어."

심장의 박동이 있었다. 대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칼에 심장을 꿰뚫리고도,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따뜻한 기운이 심장 어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지켜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프지? 누나가, 이거, 뽑아 줄게."

다나는 더듬어 베루스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베루스는 주인 아닌 자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다나의 하얀 손은 바로 불길에 휩싸였다. 다나는 비명을 질렀다. 격통 때문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까짓, 거!"

팔꿈치까지 까맣게 불타오르면서도, 다나는 어떻게든 베루스를 뽑아냈다. 바닥에 떨어진 베루스는 더 이상 불을 일으키지 않았다. 칼집으로 베루스를 감싸 수습하고, 다나는 쓰러져서 숨을 색색 내쉬었다. 그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품에는, 칼에서 풀려난 아이가 꼭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깔리듯이 안긴 채로, 다나는 팔의 부상을 치유했다. 그리고 일어서서, 엉거주춤 아이를 업기 시작했다. 다나는 그렇게 어둠과 죽음으로 가득한 통로를 안간힘을 쓰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먼 옛날, 아이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일이었다.

그렇게 호수를 빠져나와서, 봐 두었던 작은 마을을 향해 걸어나가면서, 다나는 자신의 등에 업힌 채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 자그맣게 속삭였다.

돌아가자.

그 때로,

우리가 살던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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