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화해 ( 2 )
그러나 다나와 아이의 평화로운 생활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월동 준비를 위해 사냥해온 곰 가죽을 벗기던 아이에게, 누군가가 불길한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잊혀진 숲 근처에서 이상한 걸 봤다던데. 혹시 짐작가는 거 있나?"
"잊혀진 숲이요?"
옆에서 바느질을 하던 다나가 실을 입에 문 채로 물었다. 소식을 들고 온 아주머니는 앞치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 곳에 땔감을 주우러 갔던 우리 애들이 한 말인데, 갑자기 이상한 게 생겼다는데. 시꺼먼 막 같은 것이."
"검은 막이라면..."
"그게, 가까이서 볼때는 그냥 무슨 끈적이는 짐승 내장 같은 건가 했는데, 멀리서 보니까 형체를 이루고 있더래. 높은 나무에 올라서서 봤더니, 마치, 음... 뭐라고 해야 하지?"
가죽을 잘라내던 손을 멈추고 아이는 물었다.
"정확히 뭐 같다던가요."
"알집 같다던데."
그 말에 아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음 날, 아이는 새벽에 홀로 마을을 떠나 잊혀진 숲을 향해 걸어갔다. 다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못 가게 할 것이 뻔했으니까. 여남은 개의 언덕을 넘고, 개울을 넘어서, 아이는 구불구불한 숲길에 접어들었다. 아이는 금세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이 앙상한 숲에서, 유일하게 하늘까지 치솟은 교목 앞이었다.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가지를 연달아 밟으며 뛰쳐오른 아이는 어른 몸통만한 우듬지를 밟고 올라섰다. 고개를 들어 숲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
확실히, 그 알집이었다. 헤카톤 케이레스를 초인의 외신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황궁 전체를 감싸던 알집. 그것이 지금, 림의 신전이 있던 호수를 감싸고 다시 생겨나 있었다. 아이는 맥이 풀려서 나무 아래로 떨어질 뻔 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무에 걸터앉았다.
"어째서?"
다나는 그 신전에서, 칼에 찔려 있던 자신을 데리고 왔노라고 했다.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 불길한 알집은 다시 생겨나 있는가. 갑자기 머리가 도끼로 쪼개는 것처럼 아파왔다. 두통 때문에 발을 헛디딘 아이는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쿵, 커다란 충격음이 울려퍼지고, 버섯을 갉아먹던 회색 쥐 몇이 달아났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누운 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째서."
잠시 팔을 벌려 누운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는, 낙엽을 떨어뜨리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다나에게 그 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전해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일어선 아이는 유령처럼 걸어서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혼자 남겨져 있던 다나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다가 아이를 맞이했다. 그 분홍빛 머리를 한 번 쓸어내려주고, 탁자에 앉힌 채 아이는 말을 꺼냈다. 황궁에서 보았던 그 거푸집이 다시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게, 무슨 소리야?"
다나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아까 아이가 보였던 반응 그대로였다. 이미 충격에서 벗어났기에, 아이는 냉정하게 다시 요구할 수 있었다.
"그 신전을 중심으로 거푸집이 다시 생겨나고 있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빨아들여 외신을 만들기 위한 거푸집이, 다시."
"그런...말도 안 되는."
"그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줘. 하나도 빠짐 없이."
아이의 말에 다나는 더듬거리면서, 아이를 데리고 빠져나올 때의 상황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게... 물로 가득 차 있었고, 살덩이처럼 물컹거리는 게 있고, 그랬어. 그 신전의 복도부터 통로까지, 모든 곳에 물이 있었어... 그리고, 살덩이가 길을 막고 있어서, 억지로 찢고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어."
"물?"
알현실에서 보았던 오수를 떠올렸다. 헤카톤 케이레스가 입을 벌리고 받아마시던, 이 세상의 원한을 집약한 물을. 그것은 오수를 하나도 받아마시지 못한 채 흉곽으로 흘려보냈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가, 아잘록은, 그 때부터 이미 헤카톤 케이레스를 실패작으로 보고 있었나. 다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너라고 착각한 살덩이가 있었어. 사람과 비슷한... 하지만, 그냥 살덩이었어. 응, 만져봤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까, 분명해. 그리고 그 검 덕분에 네 위치를 찾아서, 데려왔어. 그러니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 말에 아이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 날, 길 아잘록이 자신의 몸에 했었던 짓을.
'일어나라. 내 최후의 걸작이여.'
탑의 꼭대기를 뚫고 비로소 도착한 최상층. 그 잿빛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아잘록은 음산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러자 칼에 꿰뚫린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검은 살덩이가 쏟아져나오더니, 곧 꾸물거리며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거무스름한 기운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과 모든 점에서 똑같은 인간이었다. 자신과 탯줄 같은 살덩이로 이어져 있던 그것은, 곧 거무스름한 무언가를 뭉쳐 검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검을 휘둘러 탯줄을 잘라냈다. 참기 힘든 격통이 쏟아졌었다. 치솟는 피 사이로, 자신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 피와 울음소리 속에서, 그것은 몸을 일으켰다. 아잘록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의 세계에서 길 아잘록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외신... 아이우르드."
모든 것을 사랑하려 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 자. 초인의 외신, 아이우르드. 아잘록은 자신의 몸에서 튀어나온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그것은 잿가루가 모래바람처럼 휘날리는 세계를 한참이나 걸어가더니, 풍화된 뼈가 쌓여 이룬 언덕 위에 섰다. 그리고, 칼을 꽂아넣은 채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일어난 재의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것을 감쌌다. 아이우르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잿가루는, 서서히 그것의 피부에 스며들어서 힘을 더해주었다.
'탄생할 때까지, 바라볼 생각인가? 이 세상의 언덕에 선 채로?'
아잘록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그의 몸 역시, 말단부터 하얀 잿가루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이우르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무운을 빌겠네.'
특유의 그 소름끼치도록 맑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길 아잘록은 완전히 재로 흩어져 아이우르드의 일부가 되었다. 자신은 장례탑의 꼭대기에 박제된 채로, 그 탄생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기면증도, 아잘록의 정신 침식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미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어 떨어져나갔으니까. 아이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호흡을 가쁘게 내쉬었다. 자신의 정신 속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 현실에서는 아이우르드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었다.
자신은 무한한 재생력을 가졌다. 심장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그것이 떨어져나가고, 오수를 빨아들여 형상을 이루고... 그것이 반복되며, 초인의 외신을. 아잘록이 그토록 만들고 싶어했던 '진짜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었다. 아이는 잠시 그 괴이한 출산의 과정을 머릿속에 그렸다.
초인의 외신, 아이우르드.
그것은 지금, 림의 신전에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검을 뽑아들고 일어나는 순간, 황궁에서 있었던 것보다도 더한 재액이 세계를 덮칠 터였다. 자신이 보았던 정신 속의 풍경처럼, 잿더미와 뼈만 남은 무채색의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다. 하나의 세계에는 하나의 존재만이 있는 것이 옳다는, 아잘록의 광기에 가까운 유아론을 실현해 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었다.
"최후의 적은, 당신이 아니었네요."
레고르를 떠올리며 아이는 중얼거렸다. 최후의 적은,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과오와, 절망으로부터 태어난 외신.
그로부터 한동안 아이는 다나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들려주었다.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나는 침묵하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다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무릎에 주먹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나."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는 뒤돌아서 벽을 바라보았다. 벽에 덩그러이 걸린 검, 베루스의 검날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난 가야 해."
검을 집어라, 어린 순례자야. 림이 언젠가 했던 말이 귓바퀴에 고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불현듯 떠올랐다.
모든 힘을 잃은 아이가 기댈 수 있는 곳이라곤, 저 검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면 베루스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심호흡을 하고, 아이는 베루스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굳세게 쥐었다.
잠시,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되는 건가? 아이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기쁨은 몇 초도 가지 않았다. 다시 손가락 끝에서부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길 아잘록이 그 날 퍼부었던,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다시.
'무의미하지 않았나?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았나?'
아이의 호흡이 가빠졌다. 치솟은 불길은 이내 팔을 휘감았다. 말린 가죽옷이 검게 타들어가고, 팔꿈치까지 불길에 휩싸였다. 뜨거운 격통이 온 몸에 치달았다. 하지만, 아이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불꽃을 억누르려 했다. 검을 놓지 않았다...
"그만!"
쩔그렁 소리와 함께 베루스는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보다 못한 다나가 억지로 달려들어서, 검과 아이를 떼어놓은 것이었다. 검에서 손을 뗴자 아이의 팔을 휘감았던 불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졌다. 다나의 몸뚱이 밑에 깔려서, 아이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어쩐지 달게 느껴졌다. 살갗이 타서 근육 일부가 붉게 드러난 것이 보였다. 검게 타버린 옷을 털어내고, 다나를 옆으로 밀쳐내고, 아이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미 재생은 시작되고 있었다. 기도하듯 손을 포개고 앉은 다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속눈썹을 가녀리게 떨었다.
"또, 또 하려고?"
아이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팔의 살갗이 완전히 재생되자마자, 다시 베루스를 움켜잡았던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베루스를 억누르려 들었다. 하지만, 베루스는 여전히 아이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엔 어깨까지 불꽃이 올라온 후에야, 다나가 간신히 그 검에서 아이를 떼어낼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새로 마련한 침대는 땀으로 젖었다. 기진맥진한 아이는,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만해... 정말로, 그만해..."
다나는 자신의 품에 매달려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는 가만히 다나의 뺨을 바라보았다. 그 뺨에는 눈물자국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손을 들어 닦아주었다. 자그맣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하지만, 그만둘 수 없어. 그 말에 다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운을 차리고 다시 상반신을 일으킨 아이가, 베루스에 손을 가져갈 때였다.
"그럼, 나도 데려가."
"뭐?"
처음으로 아이는 다나의 말에 반응했다. 다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가슴께에 두 손을 모아쥔 채 말했다.
"나도, 너랑 함께 싸우고 싶어. 데려가줘."
"위험해. 안 돼."
"바보야, 너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돼? 동생을 돕는 건 누나가 해야 할 일이니까, 할 거야."
"안 된다니까. 떼쓰지 마."
"떼쓰는 건 너잖아!"
다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이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검을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진정으로 난처했다. 아잘록은 그 외신을 최후의 걸작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 아마도, 그것은 헤카톤 케이레스보다도 강할 것이다. 그 싸움에 성녀로서의 힘도 거진 잃어버린 다나가 끼어드는 것은, 위험했다.
"나도, 나도 데려가... 아니면, 안 보내줄 거야."
다나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억지를 썼다. 이게 그녀가 아이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참이나 두 사람은 그렇게 기묘하게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초저녁이었다. 옅푸른 달빛이 허름한 천 커튼을 뚫고 쏟아져서 두 사람을 비추었다. 갑자기 노크가 울린 것은 그 때였다.
"들어가도 괜찮냐?"
문을 노크한 그 사람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도슨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도슨은, 난로 앞의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도슨 씨? 어쩐 일이에요?"
그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다나는, 아이의 등에서 얼굴을 떼고 자그맣게 물었다. 아이도 도슨을 쳐다보았다. 벽난로의 불길이 그의 옆얼굴을 주홍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아이와 다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불길을 바라보면서 도슨은 말했다.
"그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도슨은 그 말과 함께 검지로 무언가를 쓸어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쥐고 있던 작은 단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