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79화 (279/279)

8권 후일담 #1. 잊혀진 숲

잊혀진 숲에도 꽃이 피었다.

봄이었다. 하얀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핀 잊혀진 숲을 걸으면서, 다나는 작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이백년 전만 해도 앙상한 침엽수만 가득한 불모의 숲이었는데. 이렇게 탐스러운 사과가 영그는 숲이 되었네. 다나는 풋사과 하나를 따서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분홍빛 머리칼을 정숙하게 틀어 묶은 그녀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선생님! 얘네들 또 싸워요!"

그러나 그런 다나의 감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가 가르치는 꼬마아이 하나가 헐레벌떡 고자질을 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림의 신전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인 후, 200년. 20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이 마을에서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제 과수원이 된 이 숲으로 나들이를 나온 것이었다.

"왜? 또 무슨 일인데?"

"그게요..."

다나는 얼른 풋사과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신을 잡아끄는 고사리 같은 손을 따라 싸움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근처에 다다랐을 때부터 여자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현장에 도착한 다나는 듣지 않고도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금 잘생긴 꼬마아이, 그리고 그 손을 붙잡고 우는 두 명의 여자아이. 치정 문제가 틀림없었다.

"뭔데?"

"썽생니, 그게, 이 녀석이요..."

여자아이들은 히끅대면서 마구 사연을 털어놓았다. 어지러워서 잘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대충 개요는 파악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 남자아이가 양다리를 걸친 모양이었다. 둘 모두와 함께 점심을 먹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었다.

"그게 다야?"

다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세 꼬마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꿀밤을 한 대씩 쥐어박았다.

"그냥 대충 같이 먹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어디서 벌써 치정싸움이야."

"그치만..."

"뚝!"

다나의 단호한 외침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다나는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을 불러모아 각자 도시락을 꺼내도록 시켰다. 곳곳에 보자기가 펼쳐지고, 꼬마아이들은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다나 역시 준비해온 도시락을 열었다. 거기에는 큼지막한 사과파이가 두 개 들어 있었다. 한 입 베어물자,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다나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 사과파이를 문 채로 돌아보니,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딱 세 사람을 빼고. 아까 치정싸움을 하길래, 머리를 쥐어박았던 꼬마들이었다.

"왜 그래?"

"그게요, 제가 이 녀석 몫까지 도시락을 준비해왔는데, 글쎄 얘도 준비해왔잖아요! 요리도 못하는 게! 분명히 하인이 만들어 줬을 거에요!"

"아니야! 내가 만들었거든!"

두 여자아이 사이에 껴서, 남자아이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누가 만들어온 도시락을 먹느냐로 싸움이 난 것 같았다. 사과파이를 우물거리며 한심하게 그 광경을 보던 다나는, 곧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앗! 선생님!"

"이리 줘요!"

여자아이들의 여분의 도시락을 모두 빼앗아서, 모두 먹어버린 것이었다. 텅 빈 도시락통을 돌려주면서 다나는 개운하다는 듯 손을 털었다.

"자, 이걸로 됐지? 각자 자기가 준비해온 걸 먹으렴!"

"치사해!"

"자기는 연애 한 번도 못 해봤다고, 이렇게 훼방을 놓는 거에요?"

"엉?"

다나는 눈썹을 꿈틀했다. 여자아이가 한 말이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선생님, 소문 다 퍼져 있어요! 선도 거절하고, 남자랑은 접촉도 안하고, 평생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연애 한 번도 해본 적 없죠?"

다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차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말했잖아. 내 남자친구는, 아니지, 남편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 녀석은 아주 강하고, 착하고, 천사로 착각할 정도로 잘생겼고, 다정하고... 아무튼 그렇다니까?"

"거짓말!"

"그런 거짓말을 하면 누가 믿어요!"

"진짜인데?"

다나는 팔짱을 끼고 어린애들과 기싸움을 했다.

"그런데 왜 한 번도 안 나타나요?"

"그게...세상을 위해 아주 무서운 적과 싸우다가, 큰 병에 걸려서, 잠자고 있어서 그래."

"잠을 수십 년씩 자요?"

"피, 거짓말. 어린애들도 안 속겠다."

진짜인데. 다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꼬마아이들은 손을 입으로 가리고 키득거리며 다나의 상처를 물어뜯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선생님, 맨날 사과 파이 몇 개씩 구워다가 혼자서 다 먹고 그러니까, 많이 먹는 거 보고 질려서 도망쳤죠?"

"맞아. 겉모습만 보고 다가왔다가, 정 떨어져서 도망쳤을 거야."

"이것들이!"

"도망쳐!"

그 말에 다나가 짐짓 화내는 흉내를 내자, 꼬마아이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달아났다. 어느새 나들이는 숨바꼭질로 변했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진정으로 평화로운 시대에만 들을 수 있는, 밝은 웃음소리였다.

그렇게 한바탕 아이들과 놀아주고, 나들이를 끝마친 후에, 다나는 잊혀진 숲의 언덕에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에선 저녁놀이 내려앉고 있었다. 잠시 그 노을빛을 응시하던 다나는, 품에서 자그마한 검을 꺼냈다. 아이가 만들어준 검이었다.

"그 꼬마들의 웃음소리, 들었어? 네 덕분에, 세상은 이렇게 평화로워."

더 이상, 이 대륙에 외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국으로 돌아간 마레는 그 자신의 천재성으로 수 많은 개혁을 이루어냈다. 아우렐리우스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훌륭하게 스스로의 선성을 경영해나갔으며, 결국 위인전에 남았다. 마레의 개혁 덕분에, 이성의 영역은 확대되었고 신앙은 많이 축소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문제와 갈등을 만나도 서로 증오하지 않는다. 서로를 절멸해야하는 적으로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내려진 축복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다나는 가르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이 싸우고, 반목하고, 화내지만, 그만큼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다.

다나는 잠시 그 검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서늘한 감촉이 번져왔다. 이 감촉을 즐기는 것은 아이의 버릇이지만, 요새는 다나에게도 그 버릇이 생겨버렸다.

다나가 든 검은 치유의 검이었다. 아무리 심한 부상이라도, 선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면 씻은 듯 낫게 해 주는 검. 이 검에 힘입어서, 다나는 시야를 회복하고, 그리고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다나는 물끄러미 그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깨달은 걸, 모두가 잊지 않도록, 쭉 노력해줘.'

그 날, 아이는 자신을 뒤에 남기고, 홀로 외신과 싸우러 걸어들어갔다. 이런 당부를 남기고. 그간 다나는 그 당부를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이 검을 들고, 지난 200년간, 정말 많이 노력해왔다. 세상이 오늘날처럼 평화로워질 수 있도록, 다시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전쟁에 나간 일도 있었다. 봉사를 한 일도 있었다. 율법을 뜯어고치기도 했고, 몇 가지 중요한 계약을 주선하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정말로 성녀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세상이 비로소 평화를 되찾은 지금, 그녀는 은퇴해서 자그마한 학교의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네 이름과 똑같은, 그 마을에서.

"그럼, 오늘도 가 볼까."

푸르스름하게 녹아드는 어스름의 빛을 받으면서,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호젓한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만이 아는 장소, 림의 신전을 향해서.

신전의 입구는 말끔해져 있었다. 검은 오수도, 살덩이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먼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했다. 다나가 늘 와서 청소를 해주었으니까. 어렸을 적, 겁먹은 채 나하트를 따라 이 신전의 복도를 걷던 때를 떠올리면서, 다나는 천천히 복도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탁 트인 방에 도착했다.

"잘 있었어?"

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신전의 한 가운데에는, 지금 한 사람이 잠자고 있었다. 아이였다.

외신, 아이우르드와의 승부에서, 아이는 결국 승리했다. 외신을 베어내고, 알집을 소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그 싸움에 모든 힘을 소진한 것인지, 깊은 잠에 빠져서 눈을 뜨지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흘이면 깨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일주일. 그 다음에는 한 달, 일 년, 십 년... 그리고, 200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이는 그 날의 소년의 모습 그대로, 이 신전에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혹시나 깨지 않았을까 이 신전에 들리는 것은, 다나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다나는 의자를 끌어다 아이가 누운 제단 앞에 앉고서, 턱을 괴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잡티 하나 없이 아름다운 피부가 눈에 띄었다. 어쩐지 심통이 나서, 검지손가락으로 그 볼을 콕콕 찔렀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누나를 언제까지 과부로 만들 셈이야? 벌써 이백 년이나 지났는데. 너 때문에, 꼬맹이들한테까지 놀림받잖아.'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영 딴판인 말이었다.

"힘들지? 조금 더 자도 괜찮아. 응. 이 손으로, 너는 모두를 지켜냈으니까."

아이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나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머리를 쓰다듬고, 다나는 그 입술에 자그맣게 입을 맞추었다.

"더 푹 쉬어."

앞으로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더 기다릴 테니까. 다나는 바구니에서 사과파이 하나를 꺼내서, 아이 옆에 올려놓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잘까. 하품을 크게 한 다나는, 잠든 아이를 끌어안고, 자신도 모르게 곁잠에 빠져들었다.

*"흐아아암!"

다음 날이었다. 느긋하게 하품을 한 다나는, 자신이 신전 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 사방을 살펴보았다. 잠시 곁잠만 자고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하루 종일 잠들어버렸다.

"어떡해. 학교에 선생님이 늦어버리겠다."

잠시 부산을 떨던 다나는, 식탁을 바라보고 갑자기 정지했다. 분명히 그 곳에 올려놓았던 사과파이가,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그리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누워 있는 제단이 있는 곳이었다. 그 곳은, 텅 비어 있었다.

"어."

다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떨림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신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들어올 때 닫았던 그 문은, 지금, 열려 있었다.

"설마."

다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또, 가버린 걸까. 떠나버린 걸까.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마음으로, 다나는 부리나케 문을 나섰다. 길고 긴 복도를 지나서, 신전의 입구를 향해 빠져나왔다. 강렬한 햇살이 호수의 수면을 뚫고 다나의 눈을 찔렀다.

"아."

그 입구에, 사과파이를 들고 서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얼빠진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분명히─

"다녀왔어, 누나."

< 메이지 슬레이어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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