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십만대산의 끝자락에 있는 산 정상.
그곳에서 천마신교의 천마인 천일영이 마교의 본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탈마의 경지에 이르자마자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지랄 난리를 피우니…… 천마 없이 네들끼리 잘해 봐라. 퉤.”
탈마의 경지에 오르자마자 마교 육대 가문은 매일같이 천일영을 찾아와서 괴롭힘에 가까울 정도로 정마대전을 벌이자고 말해 왔다.
육대 가문이 매일같이 전쟁을 하자고 하는 이유는 마교에서 탈마의 경지에 오른 천마가 나타날 때마다 중원을 피로 물들이고, 중원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파에서도 현경에 이른 무인이 나타날 때마다 또다시 마교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지배했으니 서로가 서로를 쓰러뜨려 가며 차례로 권력을 쥐어 왔었다.
무림의 역사에서 탈마의 경지에 오른 천마가 두 명이었고, 정파에서도 그동안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두 명 나왔었다.
그 후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현경이나 탈마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등장하지 않다가 이 년 전 천일영이 탈마의 경지에 오르자 마교는 매일같이 잔치 분위기였다.
이제 다시 마교가 중원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니 육대 가문에서도 정마대전을 벌이자고 천일영을 매일같이 졸라 댈 법도 했다.
“이젠 살생을 해 가며 천마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작은 집에서 조용히 사는 것이 더 좋으니 어쩌겠느냐. 나는 나의 길을 가고, 너희는 너희의 길을 가야지. 그러니 따라오면 죽일 거고.”
천일영은 다른 마왕들은 몰라도 흑뇌마왕 마염지만큼은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무림맹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백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정파의 거친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십만대산에서 중원으로 나가지 못한 채 살아왔다.
맺힌 한도 많을 것이고 억울할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수만의 목숨을 담보로 다시 중원을 지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천일영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천일영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천일영이 마교 출신의 천마가 아니기 때문도 있었다.
천일영은 7살에 가난 때문에 마교로 팔려 왔었다.
정마대전이 일어나면 수많은 무인들이 다치고 죽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는 전쟁 때문에 고생하게 될 민초들의 삶이 걱정되었다.
언제나 전쟁은 가난한 사람부터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마교가 무림을 통일하고 강호를 지배한다 하여 크게 바뀔 것도 없지. 그것 때문에 수만 명이 죽어 간다면 차라리 지금 그대로가 나을 것이다.”
천일영은 아버지가 돈 몇 푼에 마교로 팔아넘긴 후 죽기 싫어 죽도록 무공을 연마했고, 살기 위해 미친 듯 칼을 휘둘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사이 천마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가 천마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탈마의 경지에 오른 지 어느새 이 년.
그동안 천일영은 천마의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천일영은 현대의 절대지존.
주변의 욕심은 그가 천마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천일영은 천마의 자리에서 그 어떠한 일을 해도 상관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자신이 누울 거처 하나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남은 일은 남은 놈들이 알아서 할 일이긴 한데.”
천일영은 떠나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든 발걸음 닿는 대로 가면 그만인 일이다.
다만 천일영은 천마신교에 남겨 두고 온 한 사람이 걱정이었다.
도현.
천일영이 아끼고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두 명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천일영은 천마신교를 떠날 때 도현을 데리고 나오려 했지만 도현은 웃는 얼굴로 배웅하며 말했었다.
‘저는 못 갑니다.’
‘이곳에 남은 미련이라도 있느냐.’
‘천마님도 떠나시는데, 무슨 놈의 미련입니까?’
‘그럼 같이 가야지, 왜 안 가고 버텨?’
‘상황을 보아야 할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천마님께서 떠나신 게 알려지면 마교 전체가 미쳐 돌아갈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미쳐 돌아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일 텐데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저는 상관이 없지만 그로 인해 피해가 갈까 걱정되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들이 안전한 것만 확인되면 저도 따라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거라.’
‘알겠습니다.’
언제나 마교인답지 않게 마음 씀씀이가 옳은 도현이었다.
천일영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 그를 곁에 두었다.
하지만 그 마음 씀씀이 때문에 따라오지 못한다는 말이 천일영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천일영도 자신이 없어지면 천마신교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하지만 천일영은 그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이었고, 도현은 그것이 마음이 아파 천일영 대신 남는다는 말이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천마신교가 있는 본산 방향을 바라보던 천일영이 고개를 돌렸다.
33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천마신교다.
그러나 그 33년의 세월은 괴롭고 힘든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발길이 잘 안 떨어진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동안 정이라도 든 것일까.
손에 피를 묻히며 살아왔는데, 무엇이 그토록 아쉬운 것일까.
그러나 천일영은 마음속 깊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을 죽이고 몸에서 피비린내가 빠지는 날이 없었다.
그것이 마음을 죽이고 없애서 끝내는 미쳐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전대의 천마가 그러했다.
그러나 천일영은 탈마의 경지에 오른 인물.
마땅히 살심이 사라졌고 마심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은 죄의 무게가 세상을 나가는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람을 죽여 높은 자리에 오른 그다.
그런 그가 세상에 나갈 자격이 과연 있는가.
수없이 많은 각자의 정의를 가진 사람들이 천일영의 검 앞에서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이 쓰러졌다.
천일영이 나가는 세상은 쓰러진 그들이 지켜 온 세상이다.
그러니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질 리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쉽지 않아도 발걸음을 해야만 했다.
“갈 곳을 정해 두지 않으니 별 이상한 미련이 생기는군.”
천일영은 고개를 세게 가로젓고 흔들리는 마음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을 했다.
넓디넓은 나라 안에서 천일영이 갈 만한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일까.
그러나 며칠 전부터 딱 한 곳이 천일영의 마음을 계속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가 태어난 집.
천일영을 팔아먹은 아버지가 살고 있고, 천일영이 팔려 나가는 날 집 밖으로 단 한 번도 나와 보지 않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그곳.
그곳에서 좋은 기억이 있을 리 없었지만 단 하나의 기억이 자꾸만 천일영의 발목을 잡았다.
천일영의 여동생 천이영의 생사.
천일영이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있던 여동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계속 마음에 걸려 왔다.
“결국 이것을 확인하지 못하면 계속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 있을 테지.”
천마신교의 육대 마왕도 천일영의 생가가 어디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운이 좋다면 안전하게 여동생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곳이 항주였던가.”
천일영의 기억 속에 있는 집은 항주라는 것과 바닷가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많았다.
마교라는 굴레가 더 이상 천일영의 발목을 잡지 않으니 자유롭게 살아도 될 터였다.
“천마 안 하니까 좋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거기에서 살면서 찾아봐도 되고.”
천일영은 무형백면갑으로 인상을 흐리게 만들었다.
용모파기가 이제 곧 마교에서 널리 퍼져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
인피면구(人皮面具)가 없어도 무형백면갑을 사용하면 마교의 육대 마왕이 보지 않는 이상 천일영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가는 길에 좋은 음식을 하는 객잔이 있으려나.”
갈 곳이 정해진 이상, 그를 망설이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일영은 빠르게 마교의 본산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 * *
항주.
천일영의 어릴 적 기억 속에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항주의 바닷가에서 살았던 기억만이 남아 있는 천일영은 항주에 도착하자 바다를 따라 나 있는 관도의 가장 끝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섰다.
“어서 옵쇼.”
키가 제법 크고 반듯하게 생긴 점소이가 얼른 튀어나와 천일영을 맞이했다.
천일영의 옷차림은 수수하기 그지없었지만 풍기는 기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본 점소이가 얼른 천일영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었다.
“술? 식사? 아니면 쉬었다 가실 건가요?”
“며칠 쉬었다 갈 것이네. 제일 좋은 방으로 주게.”
“별채는 어떠십니까? 조금 가격이 나가지만 조용하고 아주 편안합니다. 식사도 나와서 하실 필요 없이 그곳으로 가져다드리니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실 겁니다요.”
천일영은 전대에서 은자 다섯 개를 꺼내 점소이에게 주었다.
“은자 세 개는 방값. 나머지 은자 두 개는 자네가 가지게.”
“아! 아이구. 감사합니다요. 제가 최대한 잘 모시겠습니다요.”
점소이는 객잔 주인이 혹시라도 볼까 싶어 은자 두 개를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고 천일영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방을 준비하는 동안에 잠시 식사라도 하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동안 육포만 먹어 입안이 텁텁한 천일영이었다.
오는 길에 육포만큼도 못 하는 객잔만 만난 탓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은 탓이었다.
극마의 경지부터 먹지 않아도 생명에 지장이 없었지만 재미없는 마교의 생활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빼면 유일한 낙이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었기에 천일영은 꽤나 음식의 질에 집착했다.
“제일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저희 숙수께서 무척이나 유명한 분이십니다요. 소면, 만두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지만 제일 유명한 것은 동파육이지요.”
“그럼 전부 가져오게. 그리고 술도 두어 병 내오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요리도 내오고 드시는 동안에 방도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점소이는 환한 미소로 말을 하고는 급히 달려 나갔다.
“바다라…… 오랜만에 보는구나.”
천일영의 눈에 푸른빛 물결이 넘실거리며 파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보였다.
무려 33년 만에 보는 바다는 어렸을 때의 기억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바다를 보며 천일영은 내심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천일영은 극마의 경지에 오르자 뼈가 다시 만들어지고 피부가 새롭게 재생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겪었다.
전보다 훨씬 잘생긴 얼굴과 더 커진 키, 그리고 피부까지 여자보다 더욱 매끈해진 탓에 원래도 잘생겼었지만 지금은 누가 보아도 놀랄 만큼 미공자의 모습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천일영을 여동생이 알아보고 믿어 줄지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살던 곳이 어떤 곳인지 대충이라도 알면 좋을 것인데. 하긴 33년이나 지났으니 변하기도 많이 변해서 알아볼지나 모르겠군.”
천일영이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동안 점소이가 소면과 만두, 그리고 술을 들고 나왔다.
“공자님, 동파육이 나오는 동안 이걸로 먼저 시장기를 달래시지요.”
“고맙네.”
점소이는 무려 월급의 넉 달 치에 해당하는 금액을 천일영에게 받아서인지 얼굴에 핀 웃음꽃이 시들지를 않았다.
계속 웃는 얼굴로 천일영의 곁에 있는 점소이가 조금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천일영은 오히려 편안한 표정이었다.
식사 중에 육대 마왕들이 전쟁을 하자고 떠들어 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천일영은 점소이가 가져다준 소면을 먹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점소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소면의 맛이 대단하다는 음식점과 비교를 해도 뒤지지 않는다.
“이보게.”
“네, 공자님.”
“혹시 말이네. 이 근처에 작은 배들이 가득한 좀 가난한 어촌이 있지 않은가?”
“작은 배들만 있는 어촌 말입니까요?”
점소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이내 머리에 뭔가가 떠오른 듯 손바닥을 쳤다.
“아! 혹시 이곳에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빈민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빈민가?”
“예.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낙원촌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름은 낙원촌인데 실상은 가난한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입죠. 작은 배들이 많다면 분명 그곳일 것입니다. 낙원촌 주민들은 작은 배들로 물고기를 잡아 팔아서 연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맙네.”
“아니구. 아닙니다. 공자님, 혹시라도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점소이는 이미 받은 돈이 있어 추가로 정보료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보통 정보료라고 해 봐야 철전 열 개 정도가 일반적인 점소이의 정보료였다.
이미 은자를 두 개나 받은 점소이는 천일영이 물어보는 것은 계속 대답해 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