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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9화 (10/270)

9화

전쟁에서 가장 힘든 것은 퇴각이라고 했던가.

때문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지장(智將)이 후미에서 퇴각을 진두지휘하는 법.

그러나 굳이 나누자면 맹장(猛將)에 속하는 파천마왕 패범휘로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퇴각 진형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큰소리를 치는 것밖에 할 수 없을 뿐이나, 맹장인 자신의 위용을 너무 내세운 탓에 솔선하여 가장 중요한 일에 지원을 한 것이 문제까지는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차경철이 고위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뛰쳐나간 이후로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가는 무인들을 보며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을 후회했다.

이것으로 퇴각의 진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었다.

“저런 망할 새끼! 공을 세우라고 데리고 왔더니 진형 전체를 무너뜨릴 줄이야.”

패범휘는 갈현평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앞으로 나가 먼저 나간 사람들을 구해 올 동안 갈현평이 진형을 새로 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같이 활동을 해 온 육대 가문의 마왕답게 갈현평은 패범휘의 눈빛만 보아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함정인 줄 알면서도 뛰쳐나가려는 패범휘에게 갈현평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내가 정리하지. 무운을.”

“빨리 다녀오겠다.”

그러나.

함정을 판 사람도 이후의 일을 한 수 정도는 앞을 예상하는 법이다.

패범휘가 앞으로 나설 것이라는 것쯤은 모두 무림맹의 예상의 안쪽.

앞으로 나서려는 패범휘의 앞을 종남파의 장문인 청진이 막아섰다.

공을 세우고 종남파의 이름을 알리기 위하여 참전하였는데, 청진은 마교 육대 마왕 중 가장 이름값이 높은 파천마왕 패범휘를 먹잇감으로 처음부터 찍어 두었던 것이었다.

청진은 오랜 종남파의 유산인 낡은 검에 검강을 두른 채 검을 부딪혀 왔다.

채채챙!

“저들을 구하고 싶으시다면 저부터 쓰러뜨려야 하실 겁니다.”

“네놈이 그 종남의 장문인인가.”

“제가 제법 유명한가 봅니다. 마교의 호랑이라 불리시는 파천마왕이 저를 아시는 것을 보니.”

“이름값을 팔아 유명해지려는 애송이의 소문이 듣던 참이다.”

“그렇습니까. 그럼 애송이의 검부터 받아 보시고 이름값을 직접 매겨 보시죠.”

챙! 챙챙! 챙채챙!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중원에서 그 활동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종남파.

그러나 패범휘는 청진의 천성검(天星劍)과 천성쾌검(天星快劍)을 상대하며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가벼운 듯 보이는 검이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내공은 패범휘를 짓누르고 땅바닥으로 내리꽂았기 때문이었다.

‘크윽. 장문인이 천재라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였는가. 내가 밀리다니!’

잠시 청진의 능력을 가늠하는 사이, 순간 청진은 검의 결을 바꾸고 또 다른 검로로 다가왔다.

또 다른 종남파의 검법인 무극검(無極劍).

세 가지의 검법을 서로 이어 붙인 초식에 패범휘는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의 모든 종남파의 검법이 짧은 시간에 터져 나왔다.

챙! 촤라라라락! 챙!

“마교의 호랑이가 상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세 가지의 검법을 모두 받아 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상대를 너무 우습게 보았군요. 죄송합니다.”

“허헛……. 죄송? 죄송이라고 했느냐!”

청진의 말에 패범휘의 얼굴이 종이 구겨지듯 온통 주름을 남기며 일그러졌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떨리는 손을 내려 보자니 패범휘는 목울대가 울렁일 정도로 침을 삼켰다.

짧은 시간 검법을 막아 내기만 했을 뿐인데 이미 팔의 근육이 폭발하는 기를 버티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졌다.

내공뿐만 아니라 외공도 훌륭하다는 평을 듣는 패범휘 자신으로서도 믿기지 않은 일이다.

“다음은 태을무형검(太乙無形劍)입니다.”

“흥! 와라. 이번에는 네놈의 목에 칼을 꽂아 줄 테니.”

이제 와서 물러설 수 없는 일.

패범휘가 또다시 자전탄기(紫電彈氣)를 몸에 둘렀다.

자전탄기에 방어를 맡기고 공격 일변도로 바꾸겠다는 말.

순간 청진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에 실험을 해 볼 수 있겠다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 자전탄기가 자신의 검을 얼마나 버텨 줄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순간 그 표정을 본 패범휘의 바닥난 자존심이 신경질적으로 기운을 끌어 올렸다.

숨겨 둔 기운을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우습게 보이는 것도 여기까지다. 애송이 놈!’

패범휘가 자전탄기로 몸을 두르고 기운을 끌어 올려 새로운 공격의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었다. 패범휘의 등 뒤에서 생각도 못 한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까지는 모두 예상한 대로다. 모두 사전에 말해 둔 위치로 이동하라!”

“네!”

이것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여기까지 모두 예상한 대로라고?

차경철이 뛰쳐나간 것도, 내가 밀리고 있는 것도 예상대로란 말인가?

패범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적을 두고 미친 짓이라면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적보다 확인이 먼저다.

자전탄기로 몸을 두르고 있으니 공격은 튕겨 나갈 것이고, 그보다 왜 이런 상황을 무명암살대의 쓰레기 놈이 예상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저 도현이란 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타타탓! 타닷!

휙! 휘이이익!

어느새 몸에 두른 말가죽을 거둬 내고 일천 명의 무명암살대의 대원들이 각자의 자리로 신형을 날렸다.

암기와 장거리 무기에 익숙한 자들은 후방에 진형을 만들고, 검과 살수에 능한 자들이 앞으로 나서며 또 다른 진형을 만들어 냈다.

패범휘가 언뜻 보기에도 퇴각에 잘 맞춰진 그야말로 이상적인 진형.

갈현평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불안했는데 이 모습을 보자 패범휘는 화가 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의 마음도 잠시, 뒤를 돌아본 것의 대가는 참혹했다.

휘리리릭! 쐐애애액! 채앵!

순간 기습해 오는 청진의 일격.

하지만 예상대로의 검로에 패범휘는 몸을 뒤로 빼며 청진의 검을 튕겨 냈다.

그러나 튕겨진 검은 마치 예상했다는 대로 패범휘조차 처음 보는 이상한 검로를 보이며 살을 뚫고 몸 안으로 박혀 들었다.

“크악!”

“저를 상대하시면서 다른 곳을 볼 여유가 있으셨습니까?”

“크윽…… 자전탄기가!”

단 일검. 고위 가문의 자제가 비웃었던 청진의 낡은 검이 자전탄기를 뚫고 패범휘의 폐부를 깊숙이 베어 냈다.

베는 공격이 아닌 찌르는 공격.

자전탄기의 성질을 단 한눈에 꿰뚫어 본 깨끗한 한 수였다.

“파천마왕의 명성(名聲)은 이 애송이가 종남파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잘 쓰겠습니다. 이제 그만 무간업화(無間業火)가 있는 곳으로 가시지요.”

“크윽!”

휘이이익.

패범휘의 눈이 청진의 검줄기를 따랐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될 광경이다.

이곳에서 자신까지 무너진다면 천마신교의 퇴각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생각보다 강한 무인을 만나 죽는 것은 중원에서 흔하디흔한 일.

‘죽는 것은 내가 적보다 강하지 못한 탓이지. 다만…….’

패범휘의 눈길이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당하고 있는 차경철과 고위 가문의 자제들에게 향했다.

앞으로의 천마신교를 책임질 세대들.

비록 일을 크게 망쳤다 한들 어찌 버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앞으로 다가오는 검날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마음이 꺾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순간이었다.

채애애애앵! 찌르르르르르르르릉!

길게 울리는 검의 울음소리가 패범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강한 기로 둘러싸인 검을 베고 기의 안쪽 쇳덩이까지 쪼갤 듯 갈라지는 울음소리.

검강까지 쪼개어 버린 검에서 나는 소리다.

패범휘는 어째서 이런 소리가 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놀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쪽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명암살대의 천일영이 종남파의 장문인 청진의 검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감히 이 싸움에 끼어들다니! 네놈은 누구냐!”

“살수일 뿐입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상대를 해 드리겠습니다.”

“놈! 이 싸움이 어떠한 것인데 감히 살수 따위가!”

청진의 목소리는 다 이긴 싸움을 빼앗긴 분노로 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조금 아까의 공격은 검강을 두른 채 팔에 모든 기를 모아 내려치는 일검이었다.

분명 마교의 호랑이 정도쯤 되면 무릇 이 정도의 공격을 해야 숨겨 둔 수에 당하지 않는 법이기에 청진도 낼 수 있는 모든 기력을 다하여 내리친 공격이다.

그런데 밑에서 올려친 살수의 검은 분명 청진의 기와 힘을 모두 능가했다.

검법과 무공의 깊이 이전에 힘과 기에서 청진을 밀어 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청진은 팔의 근육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미친…… 무슨 힘이…… 아니…… 내공과 외공 모두에서 밀린 것인가.’

청진은 꺾여 버린 팔로 기를 모았다.

지금 당장 치료를 할 수는 없어도 임시방편은 해야 했으니까.

꿀꺽…….

청진은 문득 긴장으로 땀에 몸이 젖어 있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보이는 살수의 겉으로 읽혀지는 기운이나 무공의 경지가 모호한 것이 긴장하게 만든 것이었다.

살수로서 능력을 감추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능력.

상대의 실력을 읽을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청진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눈앞에 새로 나타난 살수는 분명 초고수임이 분명했다.

“도현, 파천마왕님을 지켜라.”

“네.”

간결한 명령에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도현과 무명암살대 대원이 패범휘의 곁을 둘러쌌다.

패범휘는 피를 흘리면서도 기운을 거두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의 입이 작게 달싹이다 이내 마음을 먹었는지 이를 악물고 천일영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입장을 생각하자면 안 할 수도 없는 지독한 말이었다.

“앞에 나가 있는…… 방계 혈족 가문의 자제들을 구해 주겠나……. 내 조카도…… 부탁하네…….”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고맙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이곳은 내가 지키겠다.”

패범휘가 몸을 일으켜 다시 한번 칼을 움켜쥔다.

큰 부상을 입었지만 전장의 가장 앞에서 등을 돌리고 안전한 곳으로 후퇴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는 마왕이다.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만큼은 지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밀리고 있는 형국의 전쟁을 더 나쁜 상황으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천일영이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크윽……. 도현이라고 하였느냐. 지금부터 내 곁에서 밀고 들어오는 자들을 막도록 하라. 내가 선두에 서겠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파천마왕님의 명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지요.”

“푸하하핫. 네놈, 잠시만 내 명령에 따른다는 말처럼 느껴지는구나.”

“…….”

기를 폐부로 모아 출혈을 막고 당당히 검을 들고 서 있는 파천마왕의 모습에 청진은 침음을 삼켰다.

종남파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계획의 일환이 틀어지는 것 때문에 속이 쓰린 탓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제가 그것뿐이랴.

눈앞의 살수는 끊임없이 청진에게 계속되는 몸의 경고를 불러일으켰다.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

“방금 들었겠지만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바쁘거든요. 그러니 빨리 시작하겠습니다.”

“실력이 조금 있다고 해서 건방지구나. 내가 네놈 따위에게……!?”

마치 눈앞으로 빨려 들어올 것만 같은 움직임이 순식간에 청진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얼마나 부드럽고 빠른지 하마터면 눈앞의 신형을 놓치기까지 할 뻔했다.

또한.

카앙! 까가가강! 카아아앙!

보통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다르다.

훨씬 무겁고 육중한 소리. 검강으로 검을 둘렀거늘 청진의 검은 이내 부러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동작은 빠르고 부드럽지만 검에 실린 힘과 기가 청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네…… 네놈? 진정 살수가 맞느냐!”

“살수입니다. 그나저나 시간이 없으니 방법을 바꾸겠습니다.”

“방법을 바꾼다고?!”

휘이이잉. 파방. 카앙! 카아아아앙. 카강캉!

‘이…… 미친!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이놈이 갑자기 종남의 무공을 쓴다니, 이게 무슨 일……?!’

살수가 느닷없이 종남의 검술로 공격해 오는 모습에 청진은 하마터면 입으로 비명을 지르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그만큼이나 청진은 놀랐다.

느닷없는 천성검과 무극검, 그리고 천성쾌검의 연이은 공격.

도대체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종남의 장문인인 자신에게 타 문파의 사람이 종남의 검법을 사용하다니!

“네놈! 감히 종남의 장문인인 나에게 종남의 무공으로 덤비는 것이냐! 도대체 종남의 무공을 어디에서 배운 것이냐!”

“종남의 무공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뭐라고? 그럼 네놈이 종남의 무공을 어찌 사용하는 것이냐.”

“보았을 뿐입니다. 다음은 태을무형검(太乙無形劍)입니다.”

“뭐…… 뭐라고? 태을무형검?”

청진의 얼굴이 충격과 경악에 일그러지며, 흥건히 젖은 이마 위로 차가운 땀이 솟아올랐다.

청진의 평생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공포라는 감정.

그것을 방금 느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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