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뿌득.
갈현평의 답답한 마음이 이를 갈게 만든다.
후방에서 무림맹의 무인들을 상대하며 진형을 유지해야 할 무인들이 고위 가문 자제들의 명령으로 개죽음을 당하고 있다.
수천 명이 있는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멍청한 짓일 뿐.
‘망할 놈의 방계 놈들, 죽으려면 혼자서 죽으면 될 것을.’
무명암살대가 퇴각 진형을 만든 것을 재차 확인한 갈현평은 천일영의 뒤를 쫓아 재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살아 있는 방계 혈통 놈들이 넷이다. 나머지 일백오십의 무인들은 어찌하겠는가.”
“버립니다.”
짧은 한마디.
그러나 그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모르는 갈현평이 아니다.
시간상 이미 퇴각을 했어야 하는 시점인데 진형이 무너져 퇴각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었다.
선두 집단은 후미가 안정되어야 퇴각을 시도할 것인데 무조건 퇴각부터 하면 수천의 사람들이 엉켜 모두 죽는다고 봐야 했다.
“무명암살대가 퇴각 진형을 만들었지 않나. 명령 한마디에 수천의 무림맹의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든 사람들이다. 죽게 할 수는 없다! 이 내가 명령하겠다. 저들을 구하거라!”
“이제 두 시진 후면 해가 집니다. 이미 우리는 늦었습니다.”
펑~~~!
갈현평의 등 뒤에서 흰 연기와 함께 신호가 피어올랐다.
퇴각을 해도 좋다는 신호를 선두 집단에게 보낸 것이었다.
도현이 천일영의 명대로 계획한 일을 충실히 진행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제가 적진으로 들어가자마자 신호를 보내라고 해 두었습니다.”
“네놈, 처음부터 저들을 버릴 생각이었구나.”
“익숙한 일입니다.”
“뭐…… 뭐라고?”
“살수란 그런 법입니다. 다름 아닌 천마신교에서 저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
말의 끝에는 어쩐지 원망이 섞인 듯한 느낌.
그러나 그것을 신경 쓸 사이도 없이 적진에 도착한 천일영의 손이 차경철의 뒷덜미부터 쥐어 잡아 뒤로 날려 버렸다.
파바바밧.
“뭐…… 뭐야, 이 새끼! 감히 어디에 손을 대!”
그러나 차경철은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러 온 천일영에게 곱지 않은 시선부터 보냈다.
감히 직계에 가까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용서받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뒤로 날려 버리다니.
“이 새끼가 감히!”
“그만하거라.”
“사…… 사독마왕님.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시면 될 텐데 어찌 여기까지…….”
“너희에게 맡겨? 네놈이 저지른 일을 아직도 모르느냐. 앞으로 그 입을 다시 한번 열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입을 열면 안 된다는 것쯤 차경철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사독마왕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차경철은 끓어오르는 모욕감에 천일영의 신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파바밧.
그러나 천일영은 차경철의 곱지 않은 말과 시선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천일영의 무공은 인정사정없었다.
가히 극악무도(極惡無道).
휘이익! 휘리릭!
동시에 짧은 검 두 개를 등에서 꺼낸 천일영은 수십 줄기의 빛처럼 빠른 속도로 사방을 가르기 시작했다.
살수들이 몸에 숨기기 좋도록 만든 이 작은 검 두 개는 공간째 찢을 듯 가르며 무림맹의 무인 수십 명을 삽시간에 쪼개 버렸다.
그 동작이 얼마나 빠르고 신속하게 연결되는지 갈현평조차도 눈을 뜨고 있었으면서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크악.”
“커헉.”
“저…… 저놈부터 막아라.”
검줄기가 허공을 가르고 무림맹의 무인들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지는 그 짧은 틈을 놓칠 리 없는 천일영이었다.
갈현평이 손을 쓰기도 전에 천일영은 또다시 신형을 날려 남은 방계 혈족들을 뒤로 날려 버렸다.
정확히 갈현평이 있는 방향이다.
그리고 붉은 혈광이 떠오르는 눈빛으로 자신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있는 가문의 자제들에게 서슬 퍼런 목소리를 보냈다.
이놈들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자니 곱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뛰어라. 살고 싶다면.”
“으…… 으힉!”
“헉!”
천일영의 곱지 않은 명령에도 방계 혈족들은 갈현평이 있는 방향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지위나 신분을 따지고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저 살아남은 것만이 감사할 뿐이다.
열 명이 넘는 방계 혈족의 자제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겨우 넷.
나머지는 모두 시신조차 건지기 어려울 지경으로 당했다.
자신의 실력을 알지 못하고 과용을 부린 탓.
살아남은 자들의 몰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실전은 처음일 테지.’
적을 쓰러뜨리지도 못하고 온통 막기만 한 자국이 몸에 가득했다.
그러고도 꼴사납게 천일영이 나타나자 자존심도 버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경철만은 시뻘건 눈알을 굴리며 천일영에게 소리를 질렀다.
화를 못 이겨 사독마왕의 말조차 잊었다.
아니, 잊은 척이다.
삼촌인 파천마왕의 힘이 사독마왕보다 훨씬 강하다.
차경철은 삼촌의 후광을 이용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망할 새끼가 어딜 감히 명령 질을 하는 것이냐. 누가 네놈의 도움 따위 필요…… 쿠에에엑.”
콰직!
검자루에 감정을 가득 담은 일격이 차경철의 목을 반쯤 꺾어 뒤틀어 기절시킨다.
그리고 천일영은 차경철의 뒷덜미를 잡아 갈현평을 향해 거칠게 집어 던졌다.
“데리고 가십시오.”
“알겠다. 내가 이놈들을 데리고 퇴각할 때까지 뒤를 부탁하마.”
차경철을 데리고 갈현평이 신형을 날리자 천일영은 다시 전황을 살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백여 명.
영문도 모른 채 차경철의 명령에 따라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림맹의 무인들과 검을 부딪치면서도 천일영을 눈으로 좇았다.
자신을 살려 줄 방도가 무엇인지 궁금할 터다.
그러나 천일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희망을 무참히 꺾어 버렸다.
“미안하다.”
“……!”
지금부터 뛰어서 돌아가면 등에 칼에 꽂혀 죽을 사람이 오 할.
또한 살아남은 자들이 퇴각 진형으로 뛰어들면 애써 정비한 후미가 다시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도망치는 무인들에게 섞여 무림맹의 무인들이 퇴각 진형으로 같이 뛰어가는 것.
그것을 막기 위해서 아군은 화살을 날려 무림맹의 무인과 함께 도망치는 천마신교의 무인들도 같이 죽일 것이었다.
‘역시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하지만…….’
심하게 떨린다.
천일영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종남의 장문인과 고수들을 상대로 빠르게 결판을 내기 위하여 폭발적인 기의 운용을 했던 터라 상당한 내공을 소모했다.
앞으로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이건 정말로 미친 짓이다. 미친 짓인데…… 그걸 잘 아는데…… 젠장…….’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었다.
말이 좋아 천마신교지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마교의 인간들이다.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납치했다.
자신을 돈을 주고 사 와 인간이 할 수 없을 만큼의 악독한 일을 시켰다.
사람의 생명을 벌레처럼 취급했다.
미웠다. 원망스럽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저들에게 개죽음을 당해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저들도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일 뿐이니까.
“빌어먹을. 아주 잠깐 시간을 벌어 주겠다. 퇴각을 하는 진형으로 달려라.”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다 살아라.”
검을 거두고 몸을 돌리기 시작하는 천마신교의 무인들.
“놈들이 도망친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죽여라!”
때마침 좋은 기회가 눈에 보인 무림맹의 무인들이 그들의 등에 칼을 꽂으려 일제히 덤벼든다.
천일영은 예상했다는 듯 몸을 위로 날리며 암기를 꺼내 들었다.
독침이 들어 있는 연통.
사천당문에서 사용하는 만천화우와 비슷했지만 크기는 훨씬 작았다.
말 그대로 살수가 쓰는 독침이다.
만천화우처럼 화약이 들어 있지 않고 오직 사람의 힘으로 날리는 무기.
천일영은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무림맹의 무인들에게 날렸다.
휘익. 파바바바밧!
“크학.”
“으헉!”
“독침이다. 뒤로 물러서라.”
백여 명의 무림맹 무인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동안 도망가는 천마신교의 무인들과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이 정도면 저들이 퇴각 진형까지 가는 데 문제는 없을 터다.
다만 그들이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무림맹의 무인들을 천일영 혼자서 막아야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얼마나 견딜 수 있으려나.’
이제부터 일 대 수천 명의 싸움.
천일영 혼자 무림맹의 무인들을 막아야 한다.
천일영의 얼굴에 가느다란 웃음이 남는다.
남은 기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버티면 저들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러다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살수의 삶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
마교에 미련도 슬픔도 남아 있을 것은 없다.
그리고 이 마교에 자신의 이름 석 자 남을 일도 없을 터다.
쿠우웅.
천일영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 모습에 무림맹의 무인들이 잠시 멈칫했다.
다름 아닌 혈광이 눈에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게 물든 눈동자의 테두리로 더욱 진한, 핏빛보다 더 붉은 원형의 고리처럼 보이는 것이 서서히 돌아간다.
그 모습이 마치 업화(業火) 속에 서 있는 듯한 귀신의 형상.
꿀꺽.
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무림맹의 무인들은 침을 삼켰다.
극살태마신공(劇殺台魔新功).
신공(神功)이 아닌 신공(新功).
현대의 천마가 수련을 하여 살심에 미치도록 만든 무공이기도 하며 천마신교 내에서도 그 마심이 너무도 강해져 금기(禁忌)까지 된 무공이다.
절학(絶學)이기는 하나 피에 미친 살인귀가 되는 금기를 어찌하여 천일영이 익히고 있는가.
다름 아닌 흑뇌마왕 마염지가 강제로 가르친 것이었다.
그리고 천일영이 살심에 미처 마교를 떠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금제(禁制)이기도 했다.
살심이 서서히, 그리고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피 냄새. 심장이 뛰는 소리.
뼈가 꺾이는 소리. 검을 쥐는 소리.
그리고 또다시 피 냄새.
감각이 예민해지며 천일영은 극도의 피 냄새에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피의 냄새를 맡고 싶어졌다.
새로운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욕망이 심장을 움켜쥐고 머리를 잠식하는 순간.
천일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휘이이익!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이 미친놈이! 다들 공…… 으악.”
뼈를 베는 감각. 칼이 근육을 자르는 소리. 혈관이 터지고 심장이 멈춘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따라 손에 전해지는 극한의 쾌감이 더할 나위 없는 쾌락에 잠기게 해 준다.
한 명, 두 명…… 열 명…… 스무 명…… 삼십 명…… 오십 명…… 팔십 명…….
하나씩 자신의 손에 스러지는 무인들의 죽음이 마심에 취하게 하고, 또한 극락의 경지가 손에 닿을 듯하다.
그러나 천일영은 현대의 천마와는 달랐다.
마심에 취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분명 살심에 잠기면서도 천일영은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이제 거의 모든 기가 다 소모되었다. 그리고…… 저놈들도 퇴각 진형까지 거의 도착해 가는구나.’
천일영의 눈길을 따라 백여 명의 등을 확인하자, 또한 그 너머의 도현을 바라보며 모든 상황은 파악되었다.
아직 도현이 지휘하는 퇴각 진형이 지리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것이 눈에 보인다.
지대가 높은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지리적인 우위를 점하면, 천여 명의 무명암살대가 무림맹의 수천을 상대로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을 벌어 줄 것이었다.
무명암살대의 단주로서 단 한 명의 대원이라도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
‘일각. 일각만 더 버틴다. 무명암살대를 위해 네놈들의 육신을 제물로 내놓아라.’
모든 기가 소모되자 천일영의 눈에서 혈광으로 물들던 붉은색 고리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더 이상 극살태마신공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일영은 이제부터 기도 없이 수천의 무인을 상대로 혼자 싸워야만 했다.
정말로 일 대 수천 명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