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제는 모두 소모된 기.
더 이상 천일영에게 남은 내공은 없었다.
피식.
천일영은 자신에게 구름처럼 달려와 주변을 둘러싸는 무인들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일백여 명의 피가 땅을 적신 이후, 이제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 고수들의 모습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서야 나타난 고수들의 언행은 높은 소리를 내며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울려 퍼진다.
그것이 마치 죽은 자들의 혼을 달래 주고 늦게 달려온 스스로의 죄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내공이 떨어졌다. 그런데도 아직 여기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아직도 살심이 채워지지 않은 것이냐. 네 손에 죽은 이 불쌍한 사람으로도 아직 모자란 것이냐!”
“생기사귀(生寄死歸)다. 죽으면 팔열지옥(八熱地獄) 중 하나로 갈 테고 그것은 네놈들도 마찬가지일 터. 죽은 자를 걱정하는 척 개소리 말고 빨리 덤비기나 하거라.”
천일영이 내공조차 실리지 않은 생검(生劍)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눈을 빛낸다.
그리고 그동안 상대해 왔던 세상의 모든 무공을 머릿속에 전부 펼쳤다.
이제부터 일각의 시간을 버텨야 할 터다.
최소한 적의 수를 두 수 이상은 앞서야 할 터.
‘아주 작은 실수라도 하는 순간 죽는다.’
순간 천일영의 표정이 냉혹해지며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챙. 채챙. 촤아아악.
날아오는 검기와 검강이 난무하는 검들.
그것을 단 한 수에 흘려보낸다.
허나 이것은 임시방편.
쏟아지는 검격을 어찌 내공도 없이 전부 막겠는가.
피핏. 촤아아악. 푸확.
천일영의 몸에서 핏줄기가 터지고 살이 벌어지기 시작하며 또한 곳곳에 뼈대가 드러난다.
챙. 채채챙. 채애애앵. 촤아악!
온몸을 찌르는 고통과 피가 터지는 와중에 문득 이상한 느낌이 몸을 파고든다.
분명 내공이 다 떨어지고 이미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며 천일영은 점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점점 뚜렷해지는 정신은 흐릿한 시야를 넘어 온몸의 감각을 깨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몸의 필요한 곳으로 아주 조금 남은 기력을 모아서 응축하고 보내기 시작했다.
피핏. 푸확. 촤아아악.
몸속에 박혀 드는 수없는 칼날들.
그러나 이제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마치 물 위에서 검무를 추는 것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무당의 도사는 무당의 무공으로. 종남파의 도사는 종남파의 무공으로.
또한 머릿속에 그린 무공은 남궁세가, 모용세가.
또한 소림과 화산까지 한 번에 모든 무공을 펼치기도 하고 또 하나씩 나누기도 하며 무아지경에 검을 휘두르는 동안, 온몸의 근육들이 하나씩 그 섬유질까지 느껴지고, 미친 듯이 온몸을 도는 피는 그 한 방울까지 전부 느껴졌다.
“끄아아악!”
“누가 이 미친놈을 막아라! 검으로 안 되면 몸으로라도 쑤셔 박아!”
“화살 공격과 창을 가져와라! 커허허헉!”
상대편의 무공을 아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오직 단 한 수.
천일영은 그것만으로 상대편의 목숨을 끊어 냈다.
그리고 온몸의 신경을 자극하는 느낌은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게 했다.
“쿠아아악.”
“이게 도대체! 저놈은 몇 개의 무공을 사용하는 것이냐!”
이것은 마치 무상살귀(無常殺鬼).
어찌하여 저 많은 검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가.
천일영의 신체에서 생기고 있는 변화를 모르는 무림맹의 무인들은 치를 떨었다.
혈전이 시작된 지 아직 반 다경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반 다경 동안 죽은 무림맹의 무인의 숫자만 이백.
그의 발밑으로는 시신들이 쌓여 하나의 산처럼 형상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무림맹의 무인들은 한 발 뒤로 물러서 침음을 삼켰다.
“개…… 개새끼. 저 지경이 되도록 쓰러지지 않다니!”
“꿀꺽…….”
내공이 없는 눈에는 혈광 대신 핏발이 다 터져 핏빛의 붉은색으로, 시체의 산에서 쓰러지지 않고 아직까지 검을 쥔 채 서 있다.
그것은 기괴한 광경이었다.
자신의 피와 자신이 죽인 자들의 피로 칠갑이 되어 번들거리는 살기를 뿜어내는 모습.
정말로 내공이 없단 말인가.
“미…… 미친……. 저것이 사람이란 말이냐. 저것은 차라리 인간이 아닌 마신이 아니냐.”
“쿨럭…… 쿨럭……. 어째서 덤비지 않는 것이냐. 벌써 포기한 것이냐.”
살수의 입에서 말보다 피가 더 튀어나온다. 그러나 무덤덤한 목소리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그 차분한 목소리에 무림맹의 무인들은 또 한 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들이 보기에 피를 뿜어내며 시신의 산 위에 서 있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마신이었기에.
* * *
“으음…….”
멀리서 상황을 보고 있던 패범휘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 신음 소리는 폐부를 종남의 장문인에게 당하여 고통으로 나오는 신음이 아니었다.
패범휘는 크게 다쳤음에도 사기를 생각하여 천마신교의 마왕다운 패기(霸氣)를 뿜어내며 그 존재를 보였다.
그러나 기를 모아 막아도 심한 상처였기에 그는 크게 움직이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눈으로 모아 천일영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던 터다.
“나와 이 망할 놈의 조카 놈을 구해 준 은인이거늘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 답답하군. 사독마왕, 무명암살대의 단주가 아무래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소. 수천 명이 점점 단주를 감싸고 있는데 이제는 칼을 들 힘도 남지 않았을 것이오.”
“처음 말한 대로 바로 빠져나왔으면 되었을 것을, 결국 백여 명의 무인들을 다 구했군요. 나한테는 매정하게 버린다고 하더니…….”
“어찌 단주를 살릴 방법이 없겠소? 이 패범휘 은인이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소.”
“방법이라……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것이 정말이오?”
조금 전 차경철을 구하러 가는 길에 천일영이 자신에게 은밀히 부탁한 물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천일영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무엇에 쓸지 알지 못했던 갈현평은, 석연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물건을 건넸다.
‘마지막의 수로 생각해 둔 것인가. 무명암살대의 단주는 우리의 생각보다 머리가 훨씬 좋은 모양이군.’
갈현평에게 가져간 물건을 어디에 쓸지는 지극히 자명한 일이다.
침음을 흘리며 갈현평은 패범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무림맹은 지옥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소.”
“그것이 무슨 말이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것만 잘 사용해 준다면…….”
갈현평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 * *
‘피가 없어지면 정신이 혼미해져야 하거늘…….’
하지만 정신은 오히려 점점 맑아졌다.
마치 깨달음을 얻을 때처럼 온몸이 화끈거리며 실핏줄 하나까지 느껴졌고, 그 안을 흐르는 한 방울도 안 되는 피까지 느껴졌다.
뼈와 근육, 더더욱 안쪽에 있는 한 조각의 살점까지 모두 깨어나며 천일영에게 그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이 맑아진들 몸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떨리는 손은 이미 벌어진 검의 날 밑에서 큰 소리를 내게 만들 정도. 내공이 없이 검기와 검강이 실린 검을 흘려보내느라 너덜거리기 시작한 검은, 각각의 부위의 아귀가 벌어져 심하게 덜컥거렸다.
허나 부러지기 직전의 검은 차라리 천일영의 몸 상태보다 나았다.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둔 것과 같은 몸이다.
게다가 흐린 눈앞에 보이는 작은 빛 하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로 연결되는 빛의 길만 같아서 천일영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응시했다.
‘저 빛은 뭐지……?’
휘이익. 체앵.
순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다.
하지만 이것은 천일영이 의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몸이 움직인 것이다.
기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천일영의 몸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결 하나까지 느껴질 정도로 예민해져 날아오는 화살의 궤도가 눈에 잡힐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죽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묘한 감각. 이상한 느낌. 이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살게 해 줄지도…….’
그러나 무림맹도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두고 보지는 않았다.
절정의 고수 밑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뒤로 물러섰다.
그곳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천일영을 바라보던 종남파 무인의 명령 한마디에 실력이 떨어지는 무인들은 뒤로 물러섰다.
“초절정 고수와 절정의 고수 외에는 물러서라. 그리고 저 마교의 살수 놈의 퇴각로를 막아서거라. 이제부터 너희들은 저놈과 칼을 맞대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아직 문주님들은 도착하지 않으셨느냐.”
“거의 도착하셨습니다.”
살기라는 것에 색깔이 있다면 바로 저 마교의 살수와 같은 느낌일 것이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를 뒤집어쓰고 부러질 듯한 검을 들고 서 있는 모습.
온통 붉은색 살기가 사방의 공간을 왜곡시키는 듯하다.
종남의 고수는 등 뒤로 올라오는 소름을 숨기지 못하고 식은땀과 함께 다른 무림맹의 무인들의 얼굴을 보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표정.
비록 마교의 살수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보였다.
진정 괴물을 바라보는 눈이다.
아니, 마신을 바라보는 눈이다.
종남의 고수는 이를 갈았다.
마신이 아니라 살인귀(殺人鬼)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피를 뒤집어쓴 저 괴물은 도대체 언제 쓰러진다는 말인가.
핏빛의 살기에 밀려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공포심을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네놈! 그렇게 출중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악의 편에 서다니, 부끄럽지도 않은 것이냐! 네놈의 손에 죽어 나간 무인들의 시신 위에서 당장 내려오지 못할까!”
“서 있는 자리가 중요한 것이냐. 칼을 든 이상 불살(不殺)의 길을 걷는 것은 불가능이거늘 어찌 무인의 서 있는 자리를 탓하느냐. 내가 서 있을 자리에 명분을 붙이는 짓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개 같은 놈이 끝까지……!”
그때였다.
팽팽하게 뒤로 밀려나는 공기와 함께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두 사람의 신형이 나타났다.
“저놈이더냐.”
“살심에 영혼을 팔아 버린 괴물인가. 무량수불…….”
모용세가의 문주 모세룡.
원래 모용세가의 성은 모용(慕容).
그러나 모용세가의 핏줄이 과거 오호십육국 시대 연나라의 왕이었기에 황실에서는 반란을 이유로 언제나 감시를 했고, 모용세룡은 가문을 위해 모용의 성 중에서 용을 버리고 모세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걸로 인해 자신을 제외한 가문의 성씨를 지킬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곳은 그런 그가 새로운 이름으로 처음 공을 세우는 자리.
모세룡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린다.
그리고 화산파의 최고수 천량도사.
그들이 경공술로 급히 달려와 모습을 드러내자 무림맹의 무인들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천일영의 피색이 감도는 눈빛만 바라봐도 오금이 저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모세룡과 천량도사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고 물러선 것이었다.
그것은 종남의 고수도 마찬가지였다.
“네놈이 이런 짓을 하고도 정녕 하늘이 무섭지 않은 것이냐. 네가 죽인 이 사람들의 원한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천량도사의 내공이 가득 담긴 일갈.
천일영의 전선이 저려 온다.
최상의 상태에서 맞붙어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대.
아니, 정확히는 아마 두 수에서 세 수 정도 차이로 질 수밖에 없는 초고수.
조금 전의 종남파의 장문인과는 격이 달랐다.
종남파의 장문인 청진도 뛰어난 사람이지만 연륜과 내공에서 천량도사에게 한참을 못 미쳤다.
청진은 이제 사십이 된 젊은 무인.
그러나 천량도사는 나이가 구십이 넘은 노괴(老怪)와도 같은 인물이다.
또한 크게 표정의 변함은 없지만 모용세가의 문주 모세룡.
그는 아마 천량도사보다 두 수 정도 더 위일 것이었다.
하지만 무공의 강한 인물이건만 모세룡은 은근히 기운을 퍼뜨리며 서서히 주변을 잠식했다.
내공이 다 떨어진 마교의 살수라 해도 결코 방심하지 않고 적을 살펴보겠다는 의도.
몸을 감겨 오는 모세룡의 기운이 천일영의 몸 안으로 찌를 듯 파고들어 내부를 전부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제가 처리하지요. 천량도사님은 무너진 진형을 다시 세워 주십시오. 이놈의 목을 베고 바로 진격을 할 것입니다.”
“알겠네.”
천일영은 모세룡의 눈빛을 마주하며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과도 같은 존재.
‘젠장…… 여기까지인가.’
천일영은 천량도사와 모세룡을 바라보며 입을 악다물었다.
거대한 두 개의 산과도 같은 존재에게 집어 삼켜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라도 악물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