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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14화 (15/270)

14화

갈현평이 술을 들이켜며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 그때, 천일영도 갈현평만큼 심란한 마음으로 고민에 빠져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구나. 이런 난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신중해야 했다.

결코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만큼 천일영의 마음은 간절했다.

오죽하면 한 손을 턱에 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과거의 기억들을 모두 뒤져 가며 진땀을 흘리고 있을 지경이다.

탈마의 경지에 오르고 난 이후 처음으로 흘리는 진땀이니 그 심정이 어떠할까.

그러나 천일영은 일각의 시간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천일영조차도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난…… 도저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군. 그냥 전부 주시오.”

“어이쿠! 알겠습니다. 쉽게 어찌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 옷들은 오늘 모두 가져다주실 수 있겠소?”

“당연합지요. 제가 얼른 잘 싸서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두 시진 전.

천일영은 넝마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던 천이영과 혜령의 옷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찾은 시장의 모습은 제법 활기차고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가 물씬 풍겨 와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수없이 많은 옷가게 중에서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부터 고민에 빠지게 했다.

베와 무명을 취급하는 포목점(布木店)과 명주와 비단을 취급하는 주단(紬緞) 가게도 분별하지 못하는 천일영에게는 처음부터 어느 가게로 들어서야 할지조차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 가게를 잘못 들어서며 고생 끝에 찾은 옷가게.

이곳에서 천일영은 주인이 권해 준 옷들 중 가장 여동생과 조카가 기뻐할 만한 옷을 고르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은 권해 준 옷을 전부 다 사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얼마인가?”

“여성 어른 옷 10벌과 여아 옷 10벌. 모두 최고급 비단으로 고르셨으나 은자 20냥만 주십시오. 원래는 더 받아야 하는데, 한 번에 이리 많이 구매해 주시니 감사의 마음으로 조금 깎았습니다.”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일월 객잔에 묵는다고 하셨지요? 오늘 중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비단옷 중에서도 최고로 고급인 옷이기에 한 벌에 은자가 한 냥이나 했다.

보통 한 가족 생활비의 석 달 치가 넘는 옷.

이렇게 비싼 옷을 서슴없이 산 이유는 돈에 여유가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천이영과 혜령에게 오라버니로서도 삼촌으로서도 그간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단옥에게 부탁하면 될 일을 굳이 직접 손수 나선 것도 처음으로 해 주는 옷인데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골라 준 옷을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해 전부 다 사게 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웃음을 지으며 배웅을 한 주단 가게의 주인이 안으로 들어서자 천일영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시장의 초입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당과를 사 가지고 혜령에게 주려 마음을 먹었었다.

분명 혜령은 아직까지 한 번도 당과를 먹어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어쩐지 당과를 파는 곳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것 같군.’

옷을 샀다는 만족감에 기분이 좋을 때, 하필이면 거슬리는 기운 몇 개가 천일영의 기감에 걸려든다.

그것도 가장 맛이 좋아 보이는 당과 가게의 앞에서 풍겨 오는 거슬리는 기운이다.

그리고 이내 예상했던 대로의 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창!

보기 좋게 늘어서 있는 당과가 담긴 상품대가 박살이 나며, 먹음직하게 만들어진 당과가 흙바닥 위를 굴렀다.

“오늘도 돈을 못 낸다고?”

커다란 창과 비슷한 쇠막대를 들고 있는 흉악한 인상의 거구 세 명이 위협적인 근육을 움직이며 당과 가게의 여주인에게 큰소리를 질렀다.

“이번 주뿐만 아니라 지난주의 상납금이 아직도 안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지?”

“나리, 장사가 잘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미뤄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올해 들어 상납금이 밀린 것이 족히 열 번은 되는군. 그러게, 이런 당과나 팔지 말고 우리 말대로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니까?”

“아……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정신을 못 차렸구만. 밀린 상납금 대신 오늘 당장 네년을 끌고 가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순간 천일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한다 해도 이렇게 흉악한 협박을 하지는 못할 터다.

그런데 마땅히 내지 않아도 되는 상납금을 뜯어내는 것도 모자라, 그 상납금이 밀렸다는 이유로 여인의 몸을 함부로 다루려 한다는 말인가.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딸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끌려가면 제 딸은 누가 돌봐 준단 말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네 딸년도 같이 넘길 테니까. 어차피 기루에 들어가면 네 딸도 좋아할 거다. 어렸을 때부터 손님을 받는 교육을 받을 테고, 크면 큰돈도 벌 수 있을 테니. 네년 얼굴이 반반하고 몸매가 좋으니 이런 말이라도 꺼내 주는 것이다. 고맙게 생각하거라.”

“안 됩니다. 기루에 팔려 가는 것만큼은……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울며 매달리는 여주인의 얼굴이 너무도 간절하다.

자신은 어찌 되든 귀하고 소중한 딸이 기루에 넘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기에 여인은 손을 비비며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이득에 눈이 먼 협잡배에게는 여인의 간절함도 소용이 없다.

“팔리지도 않는 당과나 붙잡고 상납금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 훨씬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니 포기하고 따라오거라.”

시커먼 속내가 그대로 보인다.

말이 좋아 기루에 상납금 대신 넘기는 것이지 모녀를 넘기면 그 돈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밀린 상납금이야 기껏해야 동전 한 냥도 안 되는 철전 몇십 개겠지만 기루에 팔면 은자 다섯 냥은 족히 받을 터.

‘예나 지금이나 인신매매는 똑같구나. 힘없으면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고. 무림맹 이놈들은 말만 번지르르할 뿐, 하는 일은 쥐뿔도 없는 것 역시 변한 게 없구나.’

천마신교 안에서도 벌어지지 않을 말도 안 되는 일에 천일영은 심사가 크게 뒤틀렸다.

마교라고 욕하는 그곳에서도 배를 곯은 아이가 있으면 밥을 주고, 돈이 없는 자에겐 갚을 돈의 기한을 유예시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줬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라고? 어렸을 때 팔려 나간 기억까지 겹치자 천일영의 눈에 조금씩 혈광이 떠오른다.

뿌득.

갈리는 이를 악문 천일영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그 순간.

“이 새끼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가게 여주인에게서 그 더러운 손 안 떼?”

파파팟. 퍽. 퍽. 퍼어어억!

와장창창.

느닷없이 협잡배의 정면으로 뛰어 들어오는 신형 하나.

아까부터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어 천일영이 기감으로 주시하고 있던 사람이었고, 경공술을 쓰고 있기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는 신형을 드러내자마자 협잡배들에게 주먹부터 휘두른다.

“으억!”

“어이쿠.”

마르고 길쭉한 신형 하나가 무극현공권(無極玄功拳)으로 협잡배 둘을 날려 보내자, 한 놈은 이빨이 세 개 날아가며 피를 토해 냈고, 또 한 놈은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선명하게 내며 땅바닥을 굴렀다.

앞으로 한 달은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강한 일격이다.

‘제법이군. 저놈들과 한패일까 싶어서 내가 나서려 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듯싶구나.’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제법 무재가 있어 보였다.

천일영이 보기에도 딱히 흠을 잡기 힘든 상당한 수준의 권법이다.

“여기는 내가 관리하는 구역이라고 했지 않더냐. 죽어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날카로운 안광을 뿜어내며 남자가 검을 뽑으며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영 희한하고 괴상하기까지 하다.

‘시장에서 파는 제일 싸구려 칼에, 다 낡아 넝마가 된 도복. 이 기운은 무당인가.’

경지는 일류 고수의 끝자락. 또한 절정의 고수로 들어서기 직전이다.

이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 넝마가 된 도복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꽤나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터다.

그런데 다 낡은 도복은 입고 싸구려 칼을 들고 있다. 게다가 말하는 내용은 또 어떠한가.

‘이 구역이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이라고?’

무뢰배가 세력권을 나눌 때 쓸 법한 말을 하는 것 또한 이상하다.

저 무당의 도사가 이곳을 자신의 구역으로 삼아 무엇을 하려고 한다는 말인가.

돈을 원하여 구역권을 두고 싸우고 있다면 저런 넝마 같은 도복을 입지도 않을 터.

스르릉.

고집스러운 눈매에 가득 들어간 힘이 안광을 토해 내며 무당의 도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분명 청운검(淸雲劍)의 자세다.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 말했을 터다. 그런데 아직도 이곳에서 협잡질인 것이냐.”

“이 시장은 이십 년 전부터 삼천흑룡의 것이다. 네놈이 무공 좀 한다 해서 이 구역이 네 것이 될 줄 아느냐. 삼천흑룡의 단원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단원 같은 소리. 단원이 아니라 흑도가 아니냐.”

“놈!”

휘이이익. 휘익. 카앙. 카앙.

구역을 빼앗기면 분명 저 협잡배도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 터다.

때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삼천흑룡의 흑도가 제법 날카로운 공격을 무당의 도사에게 퍼부었다.

그러나 쇠몽둥이는 모조리 무당의 도사가 휘두르는 검에 막혔다.

시장에서 수금을 하는 협잡배가 무공을 사용하는 것이 놀랍기는 하지만 삼류 무인의 수준.

일류 고수의 끝자락에 있는 무당의 도사를 당해 낼 리는 없다.

휘익! 쓰걱!

순식간에 무당의 도사에게서 검이 뻗어 나온다.

그 빠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구역이라고 외치던 협잡배는 봉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릴 정도다.

“으…… 으힉!”

“가서 분명히 전해라. 또다시 네놈들이 나타나면 내가 찾아간다고.”

퍼억! 퍼억! 퍼억!

검을 집어넣고 주먹으로 패는 모습이, 애써 살생을 참고 분노를 푸는 듯하다.

이내 무당의 도사가 세 명의 협잡배에게 몇 번의 발길질을 더 하고는 시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나 시장 밖으로 나가기 전, 무당의 도사가 잠시 안타까운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 당과 가게의 여주인을 향했다.

안타까운 그 모습에 무당의 도사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하오…….”

무당의 도사는 자신이 좀 더 빨리 알아차리고 달려왔으면 당과 가게의 상품대가 망가지지 않고 일이 끝났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었다.

시장의 상인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상품대다.

그것을 도복 하나 사지 못하고 검도 제일 싸구려를 들고 다니는 도사가 금전으로는 도와주기는 만무한 것이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아직은 협(俠)을 잊지 않는 자가 있다는 말인가.’

천일영은 당과 가게의 여주인이 딸을 안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욱신거려서, 돈이 든 주머니에 손이 슬그머니 들어갔지만 이내 멈췄다.

무당의 도사가 해 주지 못한 금전적인 지원을 하고 싶었지만 여주인의 입장도 생각을 해야만 했기에 손을 멈춘 것이었다.

‘내가 직접 돈을 주자니 명분이 없고 저 여주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것 같아 차마 그렇게 못 하겠구나.’

그러나 잠시 시장의 길목에서 고민을 하던 천일영의 입가에 이내 웃음이 지어진다.

직접 나서지 않고도 당과 가게의 여주인을 도울 방도가 생각난 것이었다.

게다가 천일영이 지금 절실히 찾고 있는 것이 있었다.

‘잘만 하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겠군.’

천일영의 발걸음이 시장의 좁은 길목을 벗어나 객잔을 향했다.

혜령에게는 미안하지만 당과는 다음에 사 줘야 할 듯하다.

저 당과집에서 꼭 사 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며칠 후에 새로 만들어져 있을 당과 상품대를 생각하며 천일영은 객잔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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