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하루 뒤.
“여기가 어디?”
눈을 떠 보니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누워 있다.
그나마 곁에는 작은 모닥불 하나.
그 불길이 몸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 준다.
잠시 멍하게 누워 있던 무인은 그 순간 거대한 이빨을 드러내며 얼굴을 향해 달려들던 사냥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살점이 뜯겨 나가며 피가 튀던 그 생생한 느낌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으…… 으아아아아악!”
끔찍한 기억에 튀어나오는 비명 소리.
하지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분명 명부(冥府)로 가는 황천(黃泉)길에 들어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눈을 떴고 목에서는 소리가 나오는가.
“일어난 것이냐. 제법 오래 잤구나.”
“대…… 대협님, 제가 어찌 살아 있는 것입니……?!”
분명 뺨과 입 주변을 사냥개에게 뜯어 먹혀 잇몸이 다 드러나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터.
또 한 번 놀라는 무인이다.
멀쩡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어…… 어째서?”
급히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본다.
그런데 얼굴이 다치기 전 그대로다.
또한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손과 팔은 또 어떠한가.
분명 어깨를 다치고 몸에 난 깊은 상처들 때문에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었다.
그런데 손과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고 심지어 열도 가라앉았다.
“이게 도대체……! 어째서 몸이!”
“왜 그러느냐. 잠들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고쳐 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그게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셨습니까?”
“죽어 가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정도로 못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죄송합니다, 대협님. 저는 제가 죽기 전에 안심하라고 하신 말씀이신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눈앞의 무인이 괜찮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게다가 어떻게 찾은 것인지 황산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동굴.
이곳에 작은 모닥불을 켜놓고 있다.
‘여기는 나하고 친구 복청이만 아는 비밀 장소인데.’
이곳을 찾아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무인은 몸을 일으켰다.
“먼저 제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이 은혜 갚겠습니다. 따르라면 따르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이 은혜 평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무인은 머리를 땅에 박은 채 큰절을 올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제법 익숙한 천일영은 손짓을 하며 무인을 만류했다.
어찌 보면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여 무인의 목숨을 구한 것인데 이런 인사를 받는 것은 더 불편한 일이다.
“절은 됐다. 그보다 왜 사냥개들에게 공격을 당했는지가 더 궁금하구나.”
“그것은…….”
“말하기 싫으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까지는 없다. 허나 여자인 네가 남자의 옷을 입고 목소리까지 바꿔 가며 무엇을 하다가 쫓기게 되었는지 흥미가 생기는구나.”
“……대…… 대협님! 혹시 보신 것입니까.”
무인이 자신의 가슴께를 급히 가리며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천일영은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납작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으…… 대협님!”
“몸 상태가 괜찮다면 이야기나 들어 볼까 했다.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숨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대협님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분명 저는 죽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분명 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고, 사냥개한테 물어뜯긴 제 얼굴은 어째서 멀쩡한 것입니까.”
눈앞의 무인이 하는 말에 천일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궁금할 터.
그러나 모든 것을 전부 이야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천일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기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다. 허나 너는 심하게 다친 상태에서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소모하고 있었지. 그래서 너의 선천진기와 비슷한 성질의 기운을 만들어 네 몸에 넣고 선천지기의 소모를 막았다. 그리고 그 기운으로 네 몸을 고친 것뿐이다.”
“그……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대협님, 제가 알기로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을 리가 있으냐. 지금도 네 눈앞에 있고, 무림에는 이 정도의 상처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그렇습니까!”
천일영은 말을 하면서도 조금 찔리는 느낌이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는 거짓말을 해야 했으니까.
사실 이 여인의 몸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중원에서 천일영 단 한 사람뿐이다.
뭐, 화타가 살아 있다면 그도 가능했겠지만 죽은 지 오래된 사람.
하지만 천일영의 거짓말에도 여인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하다.
끄덕. 끄덕.
여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짚이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인은 과거 스승님이 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무공을 극한까지 연마하면 세상의 모든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어떤 기운이든지 상관이 없고, 심지어 양(陽)과 음(陰)의 기운까지 한 몸에 담을 수 있다고 했던가.
무인은 스승님의 말이 떠오르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초절정 고수라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구나.’
무공을 연마하는 동안 문파의 초절정 고수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 신위를 직접 겪는 것은 처음이다.
무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나 고명한 무인을 만난 것이라면 필시 인연이자 기연일 터.
어쩌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줄 수도 있다.
“제 이름은 금채홍이라고 합니다. 이곳 황산 태생으로 화전을 주업으로 하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8살이 되던 해에 마을에 들른 아미파(峨嵋派) 여승의 눈에 들어 속가제자가 되어 아마산(峨眉山)으로 들어간 지 14년째입니다.”
“아무리 속가제자라고 하여도 수련 중에 나오기 힘들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냐. 또한 이곳에 마을이 있다면 너무 조심성이 없었구나. 네가 휘말린 일이 마을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그 마을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대협님, 이미 제 고향 마을은 없어졌습니다. 어제 사냥개를 풀어 저를 쫓던 자들이 저희 마을을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 부모님과 제 친구들까지 모두 산 채로 불에 태워져 죽었습니다.”
“……!”
금채홍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동안 애써 참아 왔던 눈물이다.
눈앞에 있는 무인에게서 왠지 알 수 없는 안도의 마음이 느껴졌고, 그것이 마음이 흐르는 대로 숨겼던 감정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랬구나. 네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네 실력은 일류 고수의 무공이다. 일류 고수라면 분명 대단한 경지이지만 내가 보기엔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듯하구나. 그것을 너 혼자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다.”
“자살……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희 부모님이 애써 숨기며 지켜 온 영기(靈氣)가 서려 있는 영약의 땅을 약탈해 간 것도 모자라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몰살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그놈들을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제 목숨 따위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습니다. 흑…….”
차마 이후의 말을 잇지 못한다.
슬픔이 깊어지면 악귀(惡鬼)가 될 만큼의 원한이 쌓이는 법.
자신의 목숨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고, 오직 사람을 죽이는 것에 모든 것을 팔아넘긴다.
그것이 자신의 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금채홍의 눈은 아직 악귀의 눈빛보다 슬픔의 마음이 더 짙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영약을 훔쳐 갔다는 것이구나. 그들이 누구더냐.”
“그들은…….”
뿌득.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금채홍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사혈련에서 파견한 영약 채집 창고의 무인들입니다.”
“사혈련?”
“그렇습니다. 그들은 황산에서 영약을 너무 채취하여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자 우연히 알게 된 영기의 땅을 탈취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저희 선조가 몇백 년 전부터 지켜 온 영약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결국 이렇게 된 것인가.”
황산에는 천마신교뿐만 아니라 무림맹과 사혈련까지 모두 영약 채집 창고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며 영약을 먼저 차지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몇십 년간 영약을 채집해 왔으니 아무리 거대한 황산이라고 하여도 이제는 영약이 바닥을 드러냈을 터.
더 이상 영약이 나오지 않자 사혈련 놈들은 손대면 안 되는 영기의 땅까지 손을 대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흑뇌마왕 마염지도 영약 채취에 엄청난 돈을 들였었지.’
잠시 과거의 기억을 되돌아보니 많은 영약을 채집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은 천마신교였는데, 정작 천일영에게 돌아온 영약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영약을 쓰지 않아도 경지에 오르는 데 지장이 없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채집한 영약들이 어디로 갔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할 일.
“끝내 복수를 할 생각이냐.”
“대협님께서 새로 주신 생명과 몸입니다. 그러나 허락만 하신다면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마침 때가 된 듯하구나. 나오거라.”
“네? 지금 말입니까?”
“손님이 왔다. 마중을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천일영의 손에 이끌려 동굴 밖으로 나온 금채홍의 눈에 백 개가 넘는 모닥불이 보인다.
사혈련 영약 채집 창고에 있는 무인들의 절반은 나온 듯한 모습이다.
“어째서 저놈들이 이곳을 알고…….”
금채홍의 몸에 남아 있는 천리미향(千里迷香)을 그대로 두었던 천일영은 사냥개를 푼 자들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시간을 끌기 위해 그들이 오르기 힘든 깊은 동굴을 찾아 그곳에서 금채홍을 치료한 것이었다.
‘딱 예상한 시간에 왔군.’
하루가 지나지 않아도 돌아오지 않는 사냥개.
그 개들의 흔적을 따라 시혈련의 무인들은 추적을 해 왔고 죽어 있는 사냥개들을 발견했을 터다.
그리고 범인을 찾기 위해 천리미향을 따라 이곳까지 오기를 꼬박 하루.
정확히 천일영이 도착을 예상했을 때쯤에 사혈련의 무인들이 도착했다.
“채홍아, 저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말해 보거라.”
“사냥개를 푼 자는 사혈련, 즉 사파의 장로 중 하나인 탁문일의 막내아들 탁영일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선천적으로 무공을 잘 익히지 못해 삼십 세 중반에 일류 고수 정도의 실력을 겨우 얻었고, 아버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받아 모자란 실력을 사냥개로 채운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탁영일이라는 자가 영약을 훔친 놈이냐.”
“아버지인 탁문일이 명령을 했는지는 모르나 전에 화전마을로 찾아온 것이 탁영일이라고 듣기는 했습니다.”
“그거면 됐다. 나머지는 직접 물어보면 되겠구나.”
“네?”
천일영이 금채홍의 눈빛을 다시 한번 읽어 본다.
금채홍이 악귀의 마음에 혼을 섞었다면 분명 도움의 손길을 내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금채홍의 마음은 오직 마을 사람들과 부모님에 대한 슬픈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좋은 눈이다. 저 많은 무인들을 보고도 기죽지 않는구나.”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죄 없는 사람들을 수십 명이나 죽였습니다. 제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가. 혼자는 힘들 테니 조금 도와주도록 하지.”
“대협님, 제 개인적인 원한인데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가 너무 큽니다.”
“아니, 사혈련하면 생각나는 놈이 있는데, 그놈 생각만 나면 왠지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아서.”
찌지지직!
천일영이 갑자기 금채홍의 옷을 찢자, 금채홍이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다시 한번 가슴께를 가린다.
순간 방심하고 있다가 옷이 찢기자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는 했지만, 분명 납작한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 대협님?”
“어차피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피로 얼룩진 옷이 아니더냐. 나중에 한 벌 사 줄 테니 일단 이걸로 얼굴이나 가리거라.”
“아……!”
금채홍은 천일영이 왜 두건을 만들어서 머리에 쓰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공을 가진 초절정 고수의 말이니 군소리 없이 조용히 따랐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도둑질을 할 것이니 얼굴은 미리 가려 둬야지.”
“네? 도둑질?”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나?
어찌 얼굴을 가리고 도둑질을 하려는가.
순간 불순한 생각을 말하는 무인의 모습에 금채홍이 흠칫했지만, 도둑질을 하려는 의도를 묻기도 전에 천일영이 검을 빼어 든다.
파바방!
순간 금채홍의 눈앞에서 신형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자리에 바람 한 점 남기지 않고. 그리고 금채홍의 눈앞에서 갑자기 사혈련의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순간 금채홍의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저 무인은 훌륭하고도 고결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