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으아아악.”
“커허허헉.”
“사…… 사람 살…… 쿠엑.”
천일영의 무극지검이 달빛을 집어삼키며 사방을 가른다.
검의 면에 비치는 어스름한 불빛이라도 있어야 하거늘, 작은 섬광 줄기 하나 남기지 않고 사혈련의 무인들을 날려 버리기 시작했다.
퍼벅. 퍼버벅. 퍼벅.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살이 베어지는 소리가 아닌 두들겨 맞는 소리.
천일영은 검의 면으로 사혈련 무인들의 급소를 자비 없이 파고들었다.
단순히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살에 닿는 부분은 뼈가 송두리째 부러지며 폐부에 박히는 공격.
천일영은 마치 금채홍의 마을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넋을 달래 주듯 인정사정없이 온몸의 뼈를 부러트렸다.
천일영에게 당한 사혈련의 무인들은 적어도 이삼 년은 정양을 해야 할 지경.
그러나 밤의 어두움은, 그러한 사정을 다른 무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마치 불꽃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무인들의 공격은 계속 이어지기만 했다.
헥. 헥. 헥.
그러나 달려드는 무인들의 뒤에서 숨길 수 없는 맹수와 같은 사냥개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훈련을 받아 남들은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소리를 내지만 그것을 천일영이 듣지 못할 리가 없다.
훈련을 받은 사냥개들이 소란스러운 전장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인들의 등 뒤에 숨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천일영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순간 이빨을 드러냈다.
컹컹! 컹컹!
순식간에 무인들의 등을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는 세 마리의 사냥개.
달려드는 속도가 절정의 고수라 하여도 쉽게 당해 내지 못할 만큼이다.
슈슈슈슉!
금채홍을 쫓던 사냥개보다 두 배는 될 법한 덩치다.
그 위압적인 모습과 강인한 힘이 같은 사혈련의 무인들조차 혀를 내두르고 몸을 피할 정도. 그때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사냥개들에게서 천일영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반짝.
달빛에 반사되는 금속 조각.
사냥개들의 이빨을 뽑고 그 안에 독을 주입하는 새로운 이빨을 달아 놓은 것이다.
‘어제의 개들과는 다르군. 이런 식으로 고수들을 처리해 온 것인가.’
순간 무극지검이 허공을 세차게 가른다.
휘릭. 휘이이익. 휘익! 촤아아악.
깨갱. 깨앵. 깨개갱.
검의 면이 어느새 똑바로 세워져 실낱같은 바람 소리를 남기고 사냥개의 몸통을 뼈째 반으로 도륙한다.
그러나 얼마나 예리한 공격이었는지 개들은 자신들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지는지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입을 벌리고 독을 뿜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일영은 피식하는 웃음을 남기고 다시 한번 검으로 사냥개들의 이빨을 날려 버렸다.
까강. 까앙! 투두두둑!
이빨까지 부러지며 가로와 세로로 갈라져 네 토막이 되는 사냥개들.
그 개들은 큰 덩치만큼이나 많은 피를 흩뿌리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쓸데없는 짓을…….”
천일영은 무인들의 가장 뒤에 자리한 어두운 곳을 노려보았다.
금채홍에게서 들은 탁영일.
그자가 어둠 속에 숨어서 개를 조종하는 피리를 부는 것이 보인다.
또한 탁영일은 무인들이 쓰러지는 것을 알면서도 사냥개들을 숨기기 위해 무인들을 계속 천일영에게 밀어 넣고 있었다.
‘내가 의협(義俠)과는 거리가 멀지만 저놈이 하는 짓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구나. 이류, 삼류 무인들을 밀어 넣어 사지로 내몰고 뒤에 숨어서 개들을 시켜 사람을 사냥하는 꼴이라니.’
휘이이이잉.
검을 든 팔을 내리자 천일영의 곁으로 순간 바람이 몰려들어 돌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온 바람.
그 바람은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바람이다.
천일영이 상상도 못 할 속도로 바람을 끌어들이니, 공기가 마찰을 하여 뜨겁게 달궈지는 것이었다.
손을 대면 데이고 옷에 닿으면 불이 붙을 만큼 달궈진 바람.
그 바람은 마치 천일영의 마음과도 같았다.
천마신교도, 타락한 무림맹의 일부 문파조차 쉽게 손대지 못할 만큼 추악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자.
바로 탁영일에 대한 분노다.
“빨리 끝낸다.”
휘이이이잉. 쉬아아악!
퍼펑! 퍼버벙! 퍼벅. 퍼버벙.
천일영의 발걸음이 앞으로 나서자 순간 사방으로 바람이 뻗어 나갔다.
보이지 않는 뜨거운 바람은 무림맹 무인들의 사지를 휘감으며 살을 태우고, 뼈를 부러뜨렸다.
그야말로 단 한 번에 공격에 그 자리에 있는 무인들은 모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오직 어둠 속에 신음 소리만을 남기고.
“크아아악.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무것도 없는데 왜 뼈가. 으아아악.”
“노…… 노한 것이다. 황산을 지키는 신령님이 노하신 것이야. 크흐흐흑.”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비명 소리가 얼어붙을 듯 울려 퍼진다.
대략 어림잡아도 모두 일백오십여 명.
그러나 천일영은 탁영일만은 남겨 두었다.
그자는 이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되었으니까.
“바람은 하수들이나 쓰는 것이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너희 같은 놈들을 처리하기에는 딱 제격이구나.”
탁영일에게 다가가는 천일영의 목소리가 조용히 사방으로 퍼진다.
공력(功力)을 가득 담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도망가려는 탁영일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이 위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강한 힘.
이것이 목소리로만 나오는 힘이란 말인가.
탁영일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즉시 고개를 처박고 벌벌 떨며 부르짖었다.
“대…… 대협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고명하신 분이신 줄 제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냥개도, 또한 무인들도 남아 있지 않는 탁영일은 고작 일류 고수의 실력.
그러나 천일영은 탁영일의 허리춤에 끼워져 있는 검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금액이 얼마나 할지 가늠이 안 될 만큼의 명검. 검집에 들어 있지만 그 예기(銳氣)만으로 그 기운이 느껴진다.
당연히 일류 무인이 가지고 있을 검이 아니다.
황산에서 영약을 채취한다는 이유로 막대한 자금을 받아 그것으로 그의 아버지, 사혈련의 장로 탁문일이 사 준 검일 터.
천일영의 마음이 불쾌함으로 가득 찬다.
개로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얻어 낸 검이기 때문이다.
“네놈, 그렇게도 무인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네놈은 검 한번 빼어 들지 않은 채 살려 달라는 것이냐.”
“대협님, 제가 대협님의 무공을 보았는데 어찌 감히 검을 빼어 들겠습니까.”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네놈의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다.”
천일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순간 탁영일의 눈이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작은 신형 하나.
탁영일이 사냥개를 풀어 쫓던 무인.
바로 금채홍이다.
“이제 네 차례다. 채홍아, 이 검을 빌려주마.”
“감사합니다, 대협님.”
스르르릉.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금채홍이 어제 사냥개를 죽일 때 보았던 오묘한 빛이 검에 서려 있다.
게다가 묵직하고 날이 하나도 빠지지 않은 것이 마치 새것만 같은 검.
금채홍은 이 검이 보통의 검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역시 초절정 고수가 쓰는 검은 다르구나. 감사합니다. 대협님께도 부끄럽지 않고 이 검의 위용에도 지지 않을 만큼의 실력을 내보이겠습니다.’
마음속 깊숙이 다짐을 하는 금채홍.
그러나 탁영일의 목소리가 금채홍의 다짐에 끼어든다.
“대…… 대협님, 이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저 무인과 싸워서 제가 이겨도 대협님이 계시니 저는 반드시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저 무인과 싸워서 제가 이긴다면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오호……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좋다. 저 무인과 싸워서 이긴다면 너를 살려 준다고 약속하지.”
탁영일의 눈에 호선이 그려지며, 웃음을 짓는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아무리 무공이 약하다 해도 그가 믿는 것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호리호리한 것이 마치 계집 같은 놈이 아닌가.
“높으신 무공만큼이나 그 그릇이 넓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싸우기나 하거라. 나는 채홍이가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반드시 제가 이깁니다. 이 검이 있는 한은 말입니다.”
스르르릉.
탁영일이 검을 뽑아 들자 어두운 밤에서도 마치 빛을 발하는 듯한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날카로운 검날은 옆에서 보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게 서 있다.
금룡참월하검(金龍斬月下劍).
하늘을 나는 금룡을 베어 달 아래 땅으로 떨어뜨린다는 검.
세상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검이다.
날카로운 날이 무뎌지지 않고,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자르지 못할 것이 없으며, 적의 검을 내리치면 그 검조차 잘라 버리기에 세상의 모든 무인들이 탐을 내는 천하의 명검이다.
“네가 가진 검도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이 검을 당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과연 검이 없어진 네가 나를 이길 수 있겠느냐.”
“놈! 나는 대협님이 빌려주신 검을 믿는다. 어서 덤비기나 하거라.”
“다들 그렇게 말하고 반 다경 후에는 울면서 살려 달라고 하더군.”
타타탓.
좋은 검에 대한 자신감이 실력의 자신감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이 있다.
당연히 좋은 무기를 가진 자가 더 좋은 실력을 발휘하는 일은 자명한 일.
그러나 탁영일의 경우는 그것이 과신에 가까웠다.
빠르게 금채홍에게 신형을 날리며 사혈련의 현란한 보법으로 검을 부딪치는 패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카아아아앙. 카앙.
탁영일의 검이 금채홍의 머리로 위에서 아래로 날아든다.
단순한 검이지만 막기에 부담스러운 검로다.
검을 베는 검을 사용한다면 더욱 그러할 터.
그러나 금채홍은 천일영이 빌려준 검에 대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믿음으로 그것을 막아 낸다.
연거푸 두 번에 걸친 검격을 막아 낸 금채홍.
예상한 대로 잠시 빌려 받은 검은, 날이 조금의 상함도 없이 멀쩡하다.
“네놈이 자랑하던 그 검도 별것 아니구나.”
“네놈의 검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구나. 허나 몇 번이나 버틸 수 있겠느냐!”
휘익. 카앙.
사파의 끈적한 검이 달빛을 반사하며 춤을 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금룡참월하검은 금강무괴철(金剛無壞鐵)로 만든 검이다.
상대편이 몇 번쯤 더 버티면 분명 두부를 자르듯 검이 잘려 나갈 것이다.
캉. 카캉.
그러나 탁영일의 바람과는 달리 금채홍의 소청검법(小淸劍法)이 금룡참월하검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오직 무공만을 연마한 금채홍의 우직한 검은 여자임을 잊게 만드는 무거운 검.
그러나 갖은 잡기에 속하는 방법으로 무공의 한자리를 만들려 했던 탁영일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직 아미파의 비전을 전수받지 못한 금채홍이지만, 복수의 마음이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도 한몫한다.
휘이익. 파방!
탁영일의 검을 흘려보내고 검결을 따라 몸을 돌리는 금채홍의 복호금강권(伏虎金剛拳)이 탁영일의 가슴을 찌르고 뼈를 부러트린다.
금채홍은 이미 검과 권을 동시에 사용할 만큼 안정적인 공격을 이어 갔다.
반대로 상대편의 검이 잘려 나가지 않자 탁영일은 점점 초조해지는 상황이다.
그 마음의 빈틈을 모를 리 없는 금채홍은 올곧은 눈으로 탁영일을 바라보며 또 한 번의 빈틈으로 천일영의 무극지검을 곧게 내질렀다.
그리고 탁영일은 그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막아 내지 못하고 폐부가 도려지듯 찔렸다.
피이이잉. 촤아악!
“크아아아악!”
“아픈 것이냐. 우리 부모님과 내 친구, 그리고 마을의 사람들을 죽일 때 난 비명 소리가 네 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아직 멀었다.”
“웃기는 소리다. 이제 네 검은 한계일 터. 네 목과 함께 베어 주마.”
탁영일이 갑자기 눈이 뒤집힌 듯 떨어 대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다.
아마도 몇 번의 검이 서로 마주하면 금채홍의 검날이 잘려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채홍은 멸절검법(滅絶劍法)으로 바꾸어 검결을 달리하고, 탁영일의 살점을 몇 번이고 더 잘라 냈다.
“크아아악! 왜 검이 잘려 나가지 않는 것이냐. 세상에 금룡참월하검을 당해 낼 수 있는 검이 그리 흔하지 않을 터.”
“검의 힘만 믿고 네가 수련을 게을리한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너는 그 검을 가질 자격이 없다.”
순간 금채홍의 눈에 매서운 기운이 떠오른다.
그 기운은 필시 복수와 함께 자신이 그동안 노력해 온 무공의 성취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천일영에 대한 믿음이다.
“죽어라. 네놈이 그리도 좋아하던 개새끼와 같이 황천으로 가라!”
“미친!”
금채홍의 손끝을 타고 무극지검이 난피풍검법(亂披風劍法)을 뿜어낸다.
분명 아미파의 비전 검술 중 하나.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노력해 온 금채홍에게 아미파의 스승이 일찌감치 가르친 검법이다.
순간 빠르고 날카로운 그 검이 마치 바람처럼 탁영일의 몸을 여덟 조각으로 산산조각을 낸다.
“끄아아아악.”
“네놈은 죽어서도 비명을 지르거라. 네가 죽인 사람의 수만큼!”
금채홍의 검이 아직 목 위에 붙어 있는 탁영일의 목구멍으로 찌르며 들어갔다.
그것으로 탁영일의 숨이 멎었다.
아니, 이미 잘려 나간 폐부 위에 남아 있던 혼이 잘려 나가는 듯한 모습이다.
“헉헉헉헉.”
온 힘을 쏟아 낸 금채홍이 무극지검을 짚고 서서 사지가 잘린 탁영일의 육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쏟아지듯 흘러내린다.
“이 망할 새끼야. 돈이! 영약이! 문파의 지휘가 그렇게 좋더냐! 그것이 우리 가족과 마을 사람보다 더 중요했냔 말이다! 으아아!”
무너지듯 주저앉은 금채홍이 미친 듯 눈물을 쏟아 냈다.
그러나 천일영은 알고 있었다.
금채홍의 눈물이 복수를 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했음에도 가슴속의 슬픔과 앙금이 그대로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