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번에는 화조주(花調酒)를 구해 왔다.”
황산의 지리를 잘 아는 금채홍을 따라 이번에야말로 구한 화조주가, 약속의 자리에서 서가흔의 넋을 달래듯 향을 피워 내며 산줄기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천일영 혼자가 아닌 금채홍과 늑대 한 마리도 같이 있다.
“너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 참으로 오래 걸렸구나. 미안하다.”
남은 또 한 병의 화조주가 열리고 천일영의 목을 타며 넘어간다.
생전의 서가흔이 가장 좋아했던 술.
어제 찾아왔을 때 화조주가 없는 것을 마음 아파했지만, 이제는 편한 마음으로 같이 친구와 술 한잔을 하니, 천일영도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시커멓게 응어리져 있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해묵은 약속일지언정 이제야 지키게 된 약속.
그러나 첫걸음이 어려울 뿐이다.
“꽃이 필 때. 나무가 푸르를 때. 단풍이 붉어질 때. 눈꽃이 필 때. 또 같이 술을 마시자.”
남은 화조주가 천일영의 목을 타고 남김없이 넘어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금채홍의 얼굴은 살짝 붉어지며 홍조가 피어났다.
죽은 친구와의 약속까지 지키는 사람이라니, 여자의 몸으로 보아도 그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마음이 자꾸 기운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모습까지 보여 주니 참 어쩔 수 없네. 이건 멋져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멋있네. 하아…….’
홍조에 물이 들어가는 금채홍의 얼굴이 햇살에 반사되어 복숭아처럼 붉어진다.
더 이상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때마침 금채홍이 마음 깊이 마음을 굳히는 순간, 대협이 말을 걸어온다.
“너는 앞으로 어쩔 것이냐. 아미파로 돌아가서 수련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느냐.”
“대협님, 저는 대협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이미 제 생명을 구해 주신 분. 이 은혜 평생을 통해 갚겠습니다.”
“나를 따른다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 않느냐?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상관없습니다. 아까 이 늑대도 따르면 내치지 않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따르겠으니 받아 주십시오.”
“내 입으로 말한 것이니 무르지 못할 것을 알고 하는 말이구나. 후회는 하지 않겠느냐.”
“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굳힌 굳센 금채홍의 눈빛이,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결심을 전하는지 천일영에게도 전해진다.
게다가 어제 탁문일의 아들 탁영일을 황천길로 보낸 후, 금채홍은 자신의 힘으로 이겼음에도 금룡참월하검을 천일영에게 바쳤다.
천일영이 그것을 비록 다시 금채홍에게 주기는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금채홍이 천일영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알았다. 지금부터 항주로 갈 것이다. 다만 좀 빨리 가야 해서 늑대와 채홍이를 한 손에 하나씩 끼고 경공술을 써야 할 것 같구나.”
“대협님, 힘들지 않겠습니까?”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천일영은 오른팔에 금채홍을, 왼팔에 늑대를 각각 끼고 땅을 박찼다.
* * *
호남성(湖南省)의 장사(長沙).
천일영은 밤사이 안휘성(安徽省)의 황산부터 이곳까지 거짓 흔적을 만들며 왔다.
같은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남궁세가(南宮世家)에도 흔적을 일부 만들었고, 오늘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제갈세가(諸葛世家))와 무당파(武當派)에도 흔적을 만들 생각이었다.
몇 군데로 나눠 흔적을 만들어 두면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일가(一家)라 할지라도 쉽게 꼬리를 잡지는 못할 터다.
세상에는 사람을 찾아내는 기술로 무림에 한자리를 만든 자들이 있었으니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세(勢)를 이루고 있었고, 그런 자들로부터 여동생과 조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니 이런 수고라도 마다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혈련의 눈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한 방책이다.
“내일이면 다시 항주로 갈 수 있겠군.”
천일영이 점소이가 챙겨 준 육포를 입에 넣으며 씹고 있는 동안, 곁에서는 금채홍과 늑대가 몸을 비틀며 토악질을 해 대고 있었다.
“우웨에에에에엑.”
“키잉. 키잉. 깨앵.”
워낙에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방향을 비틀며 흔적을 만드는 동안, 늑대와 금채홍은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견뎌 내고 울음이 터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며 안겨 왔다.
그리고 호남성 장사에 도착과 동시에 둘 다 모두 땅을 양손으로 짚고 속을 게워 내고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늑대 한 마리와 나란히 머리를 박고 속을 게워 내는 금채홍의 모습은 그야말로 보기 드문 광경.
“우욱, 욱. 정말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 힘들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에? 그게 대협님이 힘들 거라는 게 아니라 저희가 힘들 거라는 말씀이었습니까?”
“응? 그런 의미였는데 전달이 잘 안 된 모양이구나.”
“으으으…… 너무 괴롭습니다.”
“오늘까지 호북성으로 흔적을 만들어야 한다. 조금만 참거라.”
“깨갱!”
금채홍과 늑대는 또다시 천일영의 손아귀에 안긴 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 *
천일영이 항주를 떠난 지 삼 일째 되는 날.
비틀거리는 늑대와 금채홍을 안고 일월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점소이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선다.
“고…… 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납치는 안 됩니다. 게다가 저 짐승은 무엇입니까!”
“누가 납치를 했다는 것이냐. 속이 안 좋아서 하도 토악질을 했더니 지쳐서 그러는 것뿐이다.”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들쳐 업고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근데…… 이 짐승 물지는 않는 것입니까?”
“물지 안 물지 장담은 못 하겠군.”
“저기? 공자님? 저 짐승의 턱에 묻어 있는 거 피 아닙니까?”
“피 맞다. 어제 누굴 하나 물어 죽였거든. 이 사람한테 속이 풀릴 음식과 물 좀 부탁하네. 그리고 이 아이는 늑대일세. 먹을 것하고 목욕을 부탁하지. 핏자국도 씻겨 주었으면 하네.”
“고…… 공자님? 저기 공자님?”
천일영은 웃음을 참으며 별채로 들어섰다.
늑대는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었다.
이미 늑대는 금채홍과도 사이가 좋은 상태.
서로 토하며 친해진 것인지는 몰라도, 장난도 치고 이미 격이 없이 지내고 있다.
* * *
별채로 천일영이 들어서자, 바짝 긴장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월영이 고개를 숙인다.
“다녀오셨습니까.”
“수고가 많았구나. 별일은 없었느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만 물러가도 좋다.”
“네.”
정말로 금화를 한 냥이나 받았는데 이렇게 일이 끝나도 되는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월영이다.
그러나 저 공자의 말투나 행실을 보자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사람.
별채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공자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월영이 밖으로 나섰다.
행복한 가족의 한때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다녀왔다, 이영이, 혜령아.”
“어머, 오라버니 벌써 다녀오셨어요?”
언제나처럼 손이 뻗어 나와 천일영의 얼굴을 매만진다.
눈 대신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그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몸에 좋다는 약재가 있어 좀 가져왔다.”
“오라버니, 설마 약재를 구하러 다녀오신 건가요?”
천이영의 얼굴 위로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낙원촌에서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구경 한번 할 수 없는 것이 약재인 만큼, 비싸고 귀한 것을 자신 때문에 구해 왔다는 말에 덜컥 돈 걱정부터 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게도 꽤나 좋은 것을 구했구나. 이영아, 일단 가부좌를 하고 자리에 앉아 보거라.”
“약재를 먹는 데 그렇게 해야 하나요?”
“약은 약에 따라 그 사용법이 있다.”
가부좌를 하고 앉은 천이영의 손에 반으로 자른 만년 하수오가 쥐어지자, 천이영은 그 감각이 이상하고 기묘하게 느껴졌다.
응당 약재라면 말린 것일 텐데 이것은 생것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오라버니가 돈을 주고 사 왔다고 하지만 분명 자존심 때문에 그리 말한 것으로, 산속에서 며칠을 지내며 직접 약초를 캐 온 것이 분명했다.
천이영은 약초를 캐고 있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상상하자 조금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열심히 캐 온 정성을 생각하자 이 약재가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음…… 음……. 뭔가 이상한 맛이네요. 쓰면서도 단맛이 입안을 감돌고…… 무같이 아삭하기도 하고, 토란같이 물컹거리기도 하고…… 두 가지 식감이 있다니 정말로 신기하네요.”
“몸에 좋은 약재니 아마도 평범한 맛은 아니겠지.”
만년 하수오가 천이영의 오물거리는 입속으로 모두 사라지자, 천일영은 등 뒤에 손을 올리고 강제로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하여 기운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무공을 알 리 없는 천이영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천일영이 대신하여 주는 것.
그러나 천이영은 약효가 떨어지는 생약의 효능을 늘리기 위한 방법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다.
스으으윽.
배꼽 아래에서 뜨거운 열기와 함께 무언가가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 들어 천이영은 몸서리를 쳤다.
수천 마리의 뱀이 혈관을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배꼽 아래의 열이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리고 순간, 몸 전체에 수천 개의 구멍이 뚫리는 듯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음을 토해 냈다.
“오…… 오라버니!”
“약이 잘 몸 안에 스며드는 모양이구나.”
천일영은 만년 하수오의 기운이 빠짐없이 녹아들도록 천이영의 몸 안에서 태극(太極)의 이치대로 음(陰)을 몸 안으로 모으고, 양(陽)을 몸의 바깥으로 돌리며 하나의 기운으로 모았다가 두 개의 기운으로 나누기를 계속하였다.
밤과 낮이 합쳐져 하루가 만들어지듯 몸 안에서 음(陰), 양(陽)의 기운이 서로 맞돌아 태극(太極)의 순리대로 하나의 기운이 만들어지니, 천이영의 몸에서 천천히 죽었던 시신경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 몸에서 음과 양의 기운을 나누고 모으는 것은 현세에서는 오직 천일영만이 할 수 있는 신위.
“하아…….”
반 시진이 지나자 몸 안을 떠돌던 열기가 천천히 식어 가고, 천이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 숨을 토해 내었다.
몸이 수백, 수천 번이나 새로 태어나는 듯하다. 몸에서 뒤엉키며 거대한 기운이 도는 듯한 느낌과, 배꼽 아래에 무엇인가 가득 모이는 기이한 느낌에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던 터였다.
이제야 겨우 서서히 열기가 식고 시원한 바람이 흐르던 땀을 말려 갈 때, 갑자기 배꼽 아래에 모였던 기운과 온몸을 떠돌던 기운이 한 군데에서 만나 눈으로 모여들며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자 천이영은 놀라움에 눈을 번쩍 떴다.
“꺅! 오라버니!”
놀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부른 오라버니.
하지만 천이영은 오라버니의 얼굴이 보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오…… 오라버니?”
“이제 내가 보이느냐.”
“이…… 이게 어찌 된 것인가요? 오라버니가 보이다니요?”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그러나 시린 빛이 천이영의 눈을 파고들고, 오라버니의 얼굴을 그려 내자 천이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믿…… 믿어지지 않아요.”
“그동안 안 보여서 얼마나 힘들었느냐.”
33년 만에 만난 오라버니의 얼굴이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리고 혜령이 얼마큼 자라고, 어떤 얼굴일지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가능할 리 없는 마음을 말한들,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오라버니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흑, 오라버니.”
천이영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이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잔인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천이영은 혜령을 찾았다.
꿈이라면 깨기 전에 혜령의 얼굴을 꼭 보고 싶었기에.
“혜령아. 혜령아, 내 소중하고 예쁜 딸.”
“엄마, 엄마.”
혜령이 천이영의 품으로 달려든다.
이제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머리를 매만지는 엄마의 손길이 낯설었지만 그래도 기쁘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이젠 보여? 보이는 거야? 엄마?”
“보이고말고. 너무너무 예쁜 우리 딸.”
“삼촌이 보이게 해 준 거야?”
“그래, 삼촌이 엄마 눈을 고쳐 주었구나.”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고마워요, 삼촌.”
눈이 보이기 시작한 천이영은 혜령을 붙잡고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천일영은 그 모습이 기뻤지만 불편한 듯도 하여, 술 한 병을 들고 다시금 바닷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기쁘지 않을 리 없지만 천일영은 그 자리에 있기 힘들었다.
그동안 저런 행복한 가정을 몇 개나 부수며 살아왔을까.
천일영이 그동안 죽여 온 사람들의 숫자만큼 될 것이었다.
죄의 값은 치르지 못한 채, 쌓인 무게가 마음을 짓누르는 밤이었기에 천일영은 술병을 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