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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23화 (24/270)

23화

바닷가로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천일영의 옆으로 늑대가 조용하게 따라붙는다.

그 모습이 마치 새하얀 눈꽃 같은 형상이다.

“허헉, 아이고…….”

그리고 그 뒤에는 온몸이 물에 젖은 점소이 건청이 진땀을 흘리고 서 있었다.

겁에 질린 채 목욕을 시킨 탓인지 조금 전보다 한 삼 년은 늙어 보이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닐 터.

씻긴 것뿐만이 아니라 말리기도 얼마나 잘 말렸는지 늑대의 새하얀 털은 뽀송뽀송하기까지 했다.

“고생했다. 나중에 이 보답은 하도록 하지.”

“아닙니다. 얼마나 얌전한지 고생은 하나도 안 했습니다. 다만 너무 커서 힘이 많이 들었을 뿐입니다.”

건청이 허세를 잔뜩 부리며 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왜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지.

“그러고 보니 같이 온 무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 무인은 한동안 속을 게워 내다가 물만 마시고 잠이 들길래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얼마나 지쳤는지 방으로 데리고 가는 동안에도 잠이 들어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군.”

슬그머니 손가락이 올라와 머리를 긁는 천일영이다.

금채홍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다.

급히 움직이느라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수천 리 길을 천지일축공으로 끌고 다녔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곁에 있는 늑대의 눈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일영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다, 오늘이 지나기 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안 지었구나. 날카로운 예(銳)에 이리 랑(狼)을 붙여 예랑이라고 해야겠구나. 마음에 드느냐.”

“컹컹.”

“여자아이한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마치 말을 알아듣는 듯, 혹은 마음에 드는 듯 예랑이 두 번을 짓고는 머리를 다시 비빈다.

영물이라고 할 만큼 영리한 모습에 천일영은 흐뭇한 눈길로 예랑의 등을 두드렸다.

처음 예랑을 만나 치료를 해 주었을 때 몸 안을 이미 보았던 천일영은 암컷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뒤를 따를 때부터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었다.

“예랑아, 바다는 처음 보지? 같이 가자.”

며칠 간의 일정을 끝내고 보는 바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황산에 다녀온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원래는 무림맹의 영약 채집 창고를 털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묘한 인연이 닿아 둘이나 되는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마신교를 떠나고 새로 자리 잡은 땅에서 새로운 삶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어째서 또 나온 건가?”

“오늘도 여기에 계시는군요.”

객잔의 주인은 어김없이 술병들을 쌓아 두고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습한 바닷바람이 모래를 날리는데도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다.

다 마신 술병들이 모래에 반쯤 묻혀 있다.

“마지막 남은 놈이 오늘내일해서 심란하네그려 그래서 술 한잔하던 참일세.”

“한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허헛…… 술을 따라 주는 술친구라니, 좋구만. 좋아.”

천일영이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보며 객잔 주인은 싱글벙글 웃음을 멈추질 않았다.

며칠 전 목숨을 걸고 자신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 객잔 주인의 표정은 거칠 것 없고 아무런 의심도 없는 듯하다.

“저 짐승은 늑대가 아닌가?”

“맞습니다. 이름은 예랑이라고 합니다.”

“허허……. 새끼 때부터 길을 들여도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다던데 어찌 길을 들였는가?”

“길을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 아이가 저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이 녀석도 공자의 신위를 아는 게지.”

예랑을 바라보는 객잔 주인의 눈길이 신기하다는 듯 반짝인다.

자신이 따를 사람을 알아보는 짐승이 흔하지는 않을 터.

또한 이 짐승이 어떤 짐승인가.

십수 년을 자신에게 밥을 준 사람까지 물어뜯는 녀석들이다.

그런데 저리도 얌전하게 곁에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런데 이 녀석 색이 이상하네. 보통 늑대는 회색이나 갈색이 아닌가. 헌데 거의 흰색이라니,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닌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렇게 예쁜데 말입니다. 안 그러냐.”

예랑이 대답 대신 천일영의 다리에 머리를 얹고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잠이 든다.

그만큼 곁에 있는 사람을 믿고 안심하는 것이니 잠이 드는 모습.

어제 만난 사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 일이다.

객잔 주인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연다.

“내일이나 모레 떠날까 하네.”

“객잔은 이대로 두고 말입니까?”

“점소이 놈한테 물려 줄까 생각도 해 봤지만 저놈이 아직 사람 구실을 못 하는구먼. 따로 처분을 할까 하네.”

마치 도포와 같이 보이는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술을 마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신선이다.

무공을 더 이상 연마하지 않는데도, 그 무공이 쇠하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일영의 경지에서 보아도 중원에서 이름을 날렸을 법한데 이곳에서 객잔이나 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 살고 있는 것이, 비록 속세이지만 이곳이 객잔 주인에게는 선경(仙境)과 다름없던 모양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천일영에게도 새로운 삶의 싹을 틔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

“어르신, 객잔을 처분하실 거면 저한테 파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동안 사람을 잘라 온 자네가 음식이나 자르며 살 수 있겠는가?”

“객잔은 여동생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허허…… 동생이라. 나쁘지 않구먼. 그럼 그냥 줄 수는 없으니 금화 삼십 냥이 어떤가?”

“금화 삼십 냥입니까. 그러지요.”

술잔을 들어 올리던 객잔 주인의 손길이 멈추었다.

한 번을 따지지도 않고 금액에 대해 묻지도 않는 것이 이상하다.

거래라는 것이 알아볼 것 알아보고, 조금이라도 돈을 적게 들이려는 것이 사람 마음이지 않은가.

“객잔의 시세는 금화 다섯 냥쯤일세. 그런데 금화 삼십 냥을 이 노인에게 주겠는가?”

“점소이가 유수(有數)하며 마음이 올곧습니다. 또한 숙수의 솜씨도 제일이라 할 만합니다. 사람값도 포함된 것이니 비싸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허……. 사람만 자르다가 온 줄 알았더니만 내가 잘못 본 모양이네. 좋네. 내 객잔 옆에 있는 큰 공터와 뒤에 있는 산도 내주도록 하지.”

“어르신, 그렇게 주시면 시세보다 많이 싸게 주시는 겁니다. 손해를 보실 생각이십니까.”

“사람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물건 가격만 흥정하려 했다면 그리 주지 않았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내일 바로 값을 치르도록 하지요.”

“좋을 대로 하시게나. 허허허허.”

시원스레 웃고 난 객잔 주인의 얼굴에 서운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을 보낸 속세의 선경(仙境)을 떠나는 발걸음이 어찌 가볍겠는가.

아마도 객잔 주인은 영원히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었다.

남은 한 명의 친구를 죽기 전에 만나고, 돌아온다고 하지 않고 은퇴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이다.

그곳이 진짜 선경(仙境)이든, 아니면 그 어디든.

* * *

다음 날 아침.

천일영이 객잔주에게 돈을 치르고 차를 마실 때다.

금채홍이 금룡참월하검을 양손으로 안은 채 비몽사몽 잠이 덜 깬 상태로 비척거리며 객잔으로 나섰다.

“으아아아함.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네.”

“잘 잤느냐.”

“대협님!”

천일영의 모습을 보자 급히 옷매무새를 고치는 금채홍이다.

그러나 천일영이 보기에 그 꼴이 흡사 개방의 방도와 같은 모습.

헝클어진 머리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찢기고 구멍이 뚫린 옷.

게다가 핏자국까지 이리저리 얼룩이 져 있어 그 모습이 구걸을 해도 모자라지 않을 판국이다.

손에 껴안고 있는 금룡참월하검의 검집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것도 금채홍이 구질구질해 보이게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도 물론이다.

“그러고 보니 옷을 사 주기로 했었지. 나가자.”

“대협님. 정말로 사 주시는 겁니까?”

“너도 이제 우리 가족인데 그런 거지꼴로 다니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에헤헤. 그 정도로 꼴이 엉망인가요. 그냥 저렴하고 움직이기 편한 무복이면 됩니다.”

“나가자.”

시장으로 가는 길목.

금채홍과 발길을 하는데 어느 사이에 예랑이 곁에서 같이 걷고 있다.

근데 천일영의 양옆을 걷는 둘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어제의 속을 전부 게워 내는 고통에서 벗어나자, 예랑과 금채홍은 길을 걸으면서도 주변의 지형과 지리, 그리고 거리의 분위기 등을 세심하게 머리에 담으며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이 녀석 무인으로서 기본이 되어 있군. 처음 보는 곳을 빨리 파악하는 것은 고수나 생각할 법한 일인데.’

천일영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금채홍뿐 아니라 예랑까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식구가 잘 들어온 느낌.

다만 예랑은 길목에서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제법 즐기고 있는 듯하다.

“히익! 저 눈덩이 같은 짐승은 뭐랴!”

“흐미. 저 덩치가 마치 곰 같구먼. 저렇게 큰 개가 있던감?”

“무…… 무는 거 아녀? 저거, 길거리에 다녀도 되는 짐승이란 말이여!”

킁.

그러나 예랑은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마다 콧방귀를 뀐다.

가소로운 것들이 감히 나를 바라보느냐 하는 태도.

그 모습을 본 천일영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핫.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예랑과 채홍이 주단 가게 앞에 서서 문을 여는 천일영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이 옷가게는 고가의 옷을 파는 곳.

그러나 금채홍의 눈이 한번 끔벅이기도 전에 천일영이 손을 잡아채어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아이고, 대인님!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또 어떤 옷을 골라 드릴깝쇼.”

“여기 있는 이 사람에게 비단옷 세 벌하고 편한 옷 두 벌, 그리고 무복 세 벌만 골라 주게.”

“맡겨만 주십시오. 얼른 골라 오겠습니다.”

“주인, 남자 옷이 아니라 여자 옷이네.”

“네? 아…… 그러고 보니 체형이 여인이군요. 알겠습니다.”

천일영의 주문에 금채홍이 새빨개진 얼굴로 뭔가 말하려고 하자 천일영이 말을 막는다.

“아, 잊고 있었군. 주인, 속옷도 다섯 벌 부탁하지.”

“대협님! 그게 아니라!”

“뭐가 문제인 거냐.”

“남자 옷이면 됩니다. 게다가 이 옷들은 너무 비쌉니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다. 옷값은 걱정하지 말고.”

“으으으…… 대협님, 감사합니다.”

잠시 후.

“어…… 어떤가요? 이상하지 않은가요?”

“아주 예쁘구나.”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금비녀까지 꽂으니 천일영이 보기에도 그 미모가 출중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이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터다.

게다가 금비녀와 화려한 비단옷에, 아름답고 빛이 나는 금룡참월하검까지 안고 있으니 그 미모가 더하는 느낌.

돌아오는 길에 예랑이 천일영의 곁에서 슬그머니 나와 금채홍 곁에 서서 걷는다.

“하하하. 저 녀석, 채홍이 네가 예뻐지니 그 옆에서 자신이 걸으면 그 미모가 더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확실히 그 말이 맞다.

아름다운 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은 미녀의 옆에 하얀 예랑이 같이 있으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기운이 퍼져 나간다.

그러나 객잔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니? 어째서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계신 겁니까?”

“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점소이 건청이 금채홍을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어제 분명 남자 옷을 입고 있었고, 분명 남자이지 않습니까.”

“저…… 저기! 제 어디가 남자입니까. 분명 여자입니다.”

“에이, 거짓말도. 공자님이랑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는 모르지만 여장을 하려면 가슴에 뭐라도 넣었어야죠. 옷만 그렇게 입으면 뭐 합니까. 가슴이 남자 그대로인데.”

“……!”

“만두라도 가져올까요? 그거라도 넣어야 그럴싸할 것 같은데.”

스르르르릉.

금채홍의 금룡참월하검이 빛을 발하며 검집에서 뽑혀 나온다.

“점소이님? 제 어디가 어떻다고요?”

“네? 그…… 만두가? 여…… 여장이 아…… 니었습니까?”

쿠구구구궁.

금채홍의 살기가 흉흉하게 객잔을 채워 간다.

낡은 객잔의 천장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까지 날 정도.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이제서야 눈치챈 점소이.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점소이가 슬그머니 몸을 빼다가 냅다 등을 돌리고 뛰기 시작한다.

잡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나 그 뒤를 금채홍은 마치 흉신악살(凶神惡煞)과 같은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고 쫓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사…… 살려 주시오. 공자, 아니 낭자!”

객잔 뒤편에서 금채홍이 날뛰는 소리를 들으며 천일영은 예랑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우리는 밥이나 먹을까?”

“컹컹.”

두들겨 맞는 점소이 대신 숙수에게 직접 음식을 부탁하고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자니 세상이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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