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으…… 으으으…… 사…… 삼촌?”
거대한 예랑이 머리를 아래로 낮춰 혜령을 바라보고 있자, 혜령은 새파랗게 겁에 질린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삼촌 천일영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우리 혜령이가 무서운가 보구나. 이 아이는 예랑이라고 한다. 무서운 아이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사…… 삼촌, 이 멍멍이가 물면 진짜 아야 할 거 같은데요.”
그때 예랑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혜령의 품을 파고들며 냄새를 깊게 맡기 시작했다.
예랑의 예상치 못한 행동.
혜령은 더더욱 놀라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놀란 마음과 진정이 되지 않는 가슴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지면에서 발을 떼지도 못할 정도다.
“으으으…… 사…… 삼촌…… 사…… 살려 줘요.”
공포에 질린 혜령이 다시 한번 구해 달라는 간절한 말과 눈빛을 흘린다.
그러나 그때, 한동안 혜령의 냄새를 맡던 예랑이 고개를 쳐들고 느닷없이 입을 벌리자 혜령은 급기야 눈물까지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멍멍이의 입안이 한가득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날카로운 이빨이 눈앞에서 예기를 드러내는데, 아이가 참아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후릅!
“으으으으? 으허허헝!”
할짝. 할짝. 할짝.
혜령의 얼굴을 다 뒤덮을 만큼 커다란 혓바닥으로 예랑이 얼굴을 핥기 시작하자, 혜령은 예랑의 뜻밖의 행동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서 있었다.
자신의 눈물을 핥아 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무리 놀란 가슴으로 울기 시작한 혜령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안다.
그리고 이내 상황을 알아챈 혜령이 양손을 내뻗고 아등바등거리다가 이내 예랑의 콧잔등을 양손으로 어루만졌다.
큼지막한 콧잔등 위에 솟아 있는 예랑의 하얀 털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는 것도 잠시, 혜령의 작은 얼굴은 예랑의 큰 입에서 나오는 침으로 인해 이미 범벅이 된 지 오래였다.
“멍멍아, 그만해. 어푸푸. 그…… 그만해, 멍멍아.”
“컹컹.”
이미 둘이 잘 논다.
예랑은 천일영의 주변 사람들에게 결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친하게 지내려고 애쓰는 모습.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천일영은 스스로 서로가 친해질 수 있도록 그대로 두었다.
한편으로는 혜령이 눈물을 흘리자 마음이 아파 왔지만, 자신의 힘으로 친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혜령은 예랑에게 어떤 위치일까?’
예랑은 자신보다 높고 낮은 순위를 매기고 있는 게 아닐까 보이기도 했다.
금채홍은 아마 예랑에게 동료이자 친구일 것이다.
그것도 그 귀하다는 구토 친구다.
점소이는 아마 예랑이 자신보다 아래로 보는 듯하고, 단옥은 아직 예랑이 지켜보는 중이다.
그리고 천이영은 자신이 따르기로 한 주인이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 예랑 자신보다 위.
‘딱히 상관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이 될 일이지.’
그러나 천일영은 예랑의 그런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들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단지 예랑이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부하를 다루듯 한다면 화가 나기는 하겠지만, 예랑보다 높은 위치에 오르려면 당연히 그것은 그 사람이 노력해서 예랑에게 증명을 하면 될 일이다.
파지직!
한편, 예랑과 혜령이 노는 모습을 한참 즐겁게 보고 있는데, 등 위에서는 번갯불이 튀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그것은 단옥과 금채홍이 처음으로 만나면서 인사를 나누고 있던 중에 피어나는 불꽃 튀는 기운이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있지만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여인 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이 여자가 건청 오라버니를 두들겨 팬 여인이란 말이지? 근데 이 사람, 왜 이렇게 얼굴이 예쁜 거야. 이게 사람 얼굴이야? 얼굴이 조막만 한 것도 모자라서 저 큰 눈은 도대체…….’
단옥이 금채홍의 얼굴을 보자 처음으로 느낀 것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자신의 얼굴의 반쪽밖에 안 되는 얼굴에 큰 눈과 오뚝한 콧대.
그리고 얇으면서도 작은 입술.
흡사 그림에서나 볼 만한 얼굴이다.
게다가 더 화가 나는 것은 이것이 화장도 전혀 안 한 맨얼굴이라는 것.
그러나 금채홍이 보기에도 단옥이 불쾌한 것은 마찬가지다.
‘뭐지? 이 여자? 저게 사람 가슴이야? 보통 사람들 가슴의 두 배? 세 배쯤 되는 거 맞지? 근데 저렇게 가슴이 크면 징그러워야 하는데, 왜 예쁜 거지?’
금채홍이 단옥의 가슴을 보자 처음으로 느낀 것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옷으로 가려도 그 존재감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는 엄청난 가슴.
자신의 납작한 가슴과 비교되는 엄청난 크기의 솟아오른 봉우리를 보자니 기가 죽다 못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숨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더 화가 나는 것은 이것이 옷으로 가슴을 졸라맨 크기의 가슴이라는 것.
서로 불쾌했던 두 여자의 얼굴이 서서히 각각 가슴과 얼굴로 번갈아 향한다.
단옥의 눈이 금채홍의 가슴으로. 금채홍의 눈이 단옥의 얼굴로.
‘근데 이 여자…… 얼굴은 예쁜데 가슴이…….’
‘근데 이 여자…… 가슴은 큰데 얼굴이…….’
순간 두 여자의 양손이 허공에서 맞잡아지며 즐겁게 흔들고 웃는다.
심지어 깍지까지 끼고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까지 한가득이다.
“우리 친하게 지낼 수 있겠어.”
“응! 우리 절대로 친하게 지낼 수 있어.”
갑자기 까르르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친해지는 단옥과 금채홍을 보며 천일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최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 봐도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살벌한 기운을 풍기다가 갑자기 친해지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같은 여자인 예랑과 혜령이 즐겁게 노는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아무리 탈마의 경지에 올라도 세상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허나.
‘걱정할 것도 없겠지. 금채홍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인품이 올바르고 좋은 심성이다. 그것은 단옥도 마찬가지고.’
천일영은 금채홍은 물론이고 이미 단옥까지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이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길을 고집스럽게 관철해 나가는 모습을 보아 왔으니 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그냥 두어도 알아서 친해질 것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울지 마, 이놈아.”
객잔 주인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점소이와 숙수를 보자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길을 떠났다.
몇 년을 같이 지낸 사람의 마지막 말이 ‘울지 마, 이놈아.’라니, 기가 찰 법도 했지만, 평소 객잔 주인이 점소이와 숙수를 끔찍이도 챙겼던 터라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도 점소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마움 때문이었다.
단전을 잃고 죽어 가던 그를 객잔 주인이 거두어 살려 내고, 일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평생 갚지도 못할 은혜를 입었는데, 한 번을 돌아보는 법 없이 떠나 버리니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점소이, 자네 이름이 건청이었지?”
“그렇습니다.”
“잠시 따라오거라. 긴히 할 말이 있다.”
슬픔도 잠시, 새로운 주인이 된 젊은 공자가 자신을 끌고 객잔 안쪽으로 가는 것이 심상치 않다.
금채홍이라는 새로운 사람도 들어왔으니 이제 자네는 필요 없다며 자르려는 말을 하려는 것인지, 혹여 감당하기 힘든 일을 떠맡기고 공자가 객잔을 팽개쳐 버릴 것인지 건청은 불안하기만 했다.
이곳이 집인데 어디로 가라고 하려는 것일까.
이곳이 내 전부인데 어찌하려는 것인지.
“여기로 들어가거라.”
“네…… 네에…….”
그리고 건청의 걱정대로 눈앞의 공자가 빈 별채 문을 열고 자리를 잡는다.
건청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지 점점 걱정이 더해졌다.
그러나 이내 공자가 내뱉은 말은 더더욱 건청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말이다.
“가부좌를 하고 앉거라.”
“네? 갑자기 가부좌는 왜…….”
“시키는 대로 하거라. 이것도 입에 넣고 씹어라.”
“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알 수 없는 것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공자가 손에 들고 있는 이상하게 생긴 뿌리 달린 무 같은 것.
난생처음 보는 것을 내밀며 먹으라는데, 그것을 그냥 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으음……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선뜻 받아들지 못하고 망설이는 건청.
천일영은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으나 이것을 왜 먹으라는지 설명을 하면 더더욱 건청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말보다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읍읍읍! 왜 이러십니까!”
“한 시진 후면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억지로 버티는 건청의 손을 제압하고 천일영이 만년 하수오 반을 강제로 입에 집어넣자, 건청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이었다.
며칠 전 여인에게 두들겨 맞은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제는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것까지 강제로 먹어야 하는 이 상황이, 과거 무인으로 살아갈 때의 모습이 머리 한 켠에 떠오르며 자존심이 만 갈래로 찢겨 나갔다.
한때 천하를 꿈꾸며 이름을 알리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게 무슨 봉변인가.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공자!”
“이미 늦었다. 포기하거라.”
꿀꺽!
이상한 무 같은 것이 미끈거리며 목을 타고 넘어간다.
건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죽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생각은 자신의 등 뒤에서 공자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느끼며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갑자기 혈도를 짚으며 등 뒤에서 이상한 기운을 모았다가 흩어 내고, 이내 자신의 몸이 타 버릴 것만 같은 열기가 눈앞을 컴컴하게 만드는 데까지 이르자 모든 것을 전부 포기하고 깊은 한숨만 내쉬는 건청이었다.
그리고 한 시진이 지난 후.
건청은 눈을 끔벅이며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다…… 단전이 살아났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돌아온 내공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건청은 단전을 잃기 전 반 갑자, 즉 30년 치의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50년 치에서 거의 1갑자에 이르는 내공이 몸 안에 있는 것이었다.
1갑자의 내공이면 중원 백대 고수에 이름을 올리는 무인들이나 가질 만한 내공.
“이…… 이게 무슨……!”
건청의 머리는 자신의 살아난 단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건청도 한때 중원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진 절정 고수였지만, 단전을 고친다는 말은 들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이길래 폐해진 단전을 고친단 말인가.
그것도 전보다 더 크고 단단한 단전이다.
“이런 무공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대체 공자님은 누구십니까?”
“객잔 주인이다. 그새 잊었느냐? 그보다 건청아.”
“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힘 좀 쓰거라.”
천일영은 객잔을 전부 허물고 새로 다시 지을 생각이었다.
워낙에 오래된 객잔이기도 하지만, 모처럼 전 객잔 주인에게 받은 거대한 공터와 커다란 산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냥 놀게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다.
큰 대공사가 될 테니 힘을 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건청은 눈만 끔벅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