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휙! 챙애애앵!
사현풍의 옆에 서서 움직이고 있지 않는 남자가 급히 신형을 날려 월영의 칼을 튕겨 내었다.
사현풍의 웃고 있는 얼굴과는 대조되는 꽤나 놀란 얼굴이다.
“사형, 사람 좀 놀래키지 마십시오.”
“네놈이 하도 가만 있길래 장난 좀 쳐 보았다.”
“그러다가 눈이라도 잃게 되면 제 탓을 할 것 아닙니까.”
“눈을 잃는 것보다 이것이 더 재미있으니 어쩌겠느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다.
사현풍은 이미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그는 생명을 걸고 장난을 치는 것과, 상대편이 고통 속에 죽어 가는 것 이외에는 이미 모든 것으로부터 흥미를 잃은 광인(狂人)에 다름 아닌 사람.
‘젠장, 미친놈 하나도 힘든데…….’
월영의 칼을 쳐 낸 남자 역시 검을 뽑은 김에 월영에게 겨눈다.
검강이 그의 칼에 머무르는 것이 그 역시도 초절정의 고수. 월영은 절망했다.
‘망할,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너무하는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살아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눈앞의 둘은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까지 치는 경지다.
그리고 월영의 심정을 알았는지, 절망이 깃든 눈을 한 월영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사현풍이 웃음을 지으며 검날을 날렸다.
휘익! 최아아악!
으드드드드득!
그나마 움직일 수 있던 월영의 오른쪽 어깨.
사현풍의 검날이 그 어깨를 뚫고 비틀어 돌려서 뼈를 어긋나게 만들고 순식간에 뽑아냈다.
“크아아아악!”
“오호, 오늘 들었던 소리 중에 가장 훌륭하구나. 이제부터 천천히 음미를 할 터이니 일단 앉아라.”
휘이익. 촤아악. 촤아악.
사현풍의 칼날이 월영의 양쪽 무릎 위를 베어 내자 피가 뿜어지며 월영의 신형이 무너진다.
이제는 양팔 모두 사용을 하기도 힘들어 다시 일어서지도 못할 터.
털썩.
무릎을 꿇은 월영은 시커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의 몸에 있는 피를 더 빠르게 흐르도록 했다.
재수 없는 날. 절망적인 날이다.
이미 눈앞이 흐릿해지고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기에 월영은 눈을 감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애당초 일류 고수가 초절정 고수 둘을 상대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것.
“이제 목구멍에 구멍을 내면 어떤 비명이 나오려나. 아니, 피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나려나? 그런데 그거 아는가? 나는 그 소리를 가장 좋아한다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현풍의 검날이 월영의 목 가운데로 날아든다.
눈을 감은 월영은 그것을 소리로 느끼고 있었다.
발버둥을 쳐도 죽을 것이라면 어차피 언제 죽는지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낫다.
굳이 자신의 목을 꿰뚫는 검날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것보다는 문득 떠오른 걱정이 월영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자신이 죽으면 앞으로 미흑천의 지회가 들어서 상인들은 또다시 돈을 빼앗기며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었다.
또한 무뢰배들로부터 지키고 있는 저 아이들은 누가 보살펴 준단 말인가.
세상에 대한 미련 따위보다는 아이들의 걱정이 먼저다.
‘녀석들, 내일 옷을 잘 말리고 나가야 할 텐데.’
월영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 아이들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 아이들이 월영 자신에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옳은 길과 바른 방향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 주었으니까.
커아아아앙!
그때 느닷없는 소리가 월영의 귓가를 파고든다.
여태 들어 본 적 없는 강력한 쇳소리가 월영의 귓가를 찢을 듯 박혀 들었다.
검과 검이 부딪힌 소리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이상한 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지나간 것도 이상한데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은 더욱 이상했다.
월영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제발 꿈에서라도 보지 말았으면 하는 광경.
별유천지의 공자가 겁도 없이 자신과 사현풍의 가운데를 막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이런 미친…… 공자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오. 여기는 공자가 있을 곳이 아니오!”
월영은 베어져 나간 무릎에서 피를 뿜어내며, 억지로 왼쪽 팔을 움직여 검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미칠 것만 같은 통증이 파고들었지만 월영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 돈만 많고 철딱서니 없는 공자가 무서운 것도 모르고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래도 죽게 할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망할 놈의 공자 놈이 죽는 것도 마음 편히 죽지 못하게 왜 나타난 것일까.
여기에 있다가는 둘 다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 때문에 죽게 될 공자가 황천길에서도 원망의 말을 뱉어 낼 것만 같다.
“으으으으…… 으아아아악.”
힘겹게 공자를 살리기 위해 일으키는 몸.
무조건 살려야 했다.
자신 때문에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월영은 소리 질렀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피가 터지도록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시오! 공자! 무조건 이곳을 뜨시오, 빨리!”
그러나 눈앞의 공자는 살며시 고개를 돌리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월영에게 향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러니 쉬고 있거라.”
“무슨…… 개소리를…….”
순간 천일영의 손에 든 검집에서 서슬 퍼런 날을 드러내며 검이 뽑혀 나왔다.
거센 빗줄기가 칼날에 베어져 나가는 모습.
예기가 빗물과 함께 공간을 가르는 듯하다.
쿠우우우우웅!
순간 천일영의 몸에서 기운이 솟아올랐다.
월영으로서도 처음 느끼는 불길하고도 강한 기운.
꺼림칙하면서 무엇인가 어두운 기운이 사방을 짓누르듯 퍼져 나간다.
월영은 자신의 온몸이 찌릿거리며 불길한 기운에 밀려 다시 한번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후 월영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쏴아아아…… 쏴아…… 투두두둑. 투둑. 툭.
월영의 몸으로 쏟아붓던 비가 멈추었다.
아니, 정확히는 천일영의 기운이 빗줄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천일영의 주변으로 10장쯤 비가 멈춘 모습을 보자 월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천일영은 무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경지에 올라서 완벽하게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휘이익. 챙챙챙.
상황이 이상하다.
사현풍과 그의 사제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신형을 날려 천일영에게 검격을 몰아붙였다.
잠시라도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기운이 빗줄기를 밀어내는 것을 본 순간 사현풍과 그의 사제는, 이번에 상대편을 죽이지 못하면 커다란 문제가 생길 것을 직감했다.
둘은 모든 기운을 폭발시키며 신형을 날렸다.
휘이이잉! 챙챙. 채채챙! 채챙!
그러나 천일영은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두 사람의 칼을 받아 냈다.
그뿐 아니라 천일영은 몸을 그 자리에 두면서도 사현풍의 칼날을 밀어내기까지 했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검만 휘둘러서 초절정 고수 두 명을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신위다.
“크윽!”
사현풍은 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자신이 비록 중원 백대 고수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무림에서 잔뼈가 굵고 최고의 고수라 할 만한 사람들의 신위를 직접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 중원이라는 세상에 이 정도의 신위를 가진 자가 있다는 말도, 직접 본 적도 없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현풍은 즉시 알아차렸다.
이곳에 중원 16대 고수보다 더 강한 은둔 고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큭, 공자. 오해가 있는 듯하오. 내 이름은 사현…… 크악!”
사현풍의 눈에 천일영의 모습이 순식간에 둘로 나뉘어 보였다.
자신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눈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생긴 착각이다.
사현풍은 자신의 눈이 왜 이런 착각을 일으켰는지 보지도, 눈치를 채지도 못했다.
촤아아악!
사현풍의 몸이 피를 뿜어내며 두 갈래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마도 사현풍은 몰랐을 것이었다.
천일영이 무명암살대의 단장으로 있을 때, 자비 없는 공격으로 모두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것을.
그래서 한때 무림맹의 무인들 사이에서 마교의 암살자 앞에서는 이름조차 말하지 말고 검부터 뽑으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사…… 살려 주시오.”
사현풍의 사제는 천일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죽음을 예감했다.
눈앞에서 사형이 죽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칼날이 번득이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 빠른 공격이었다.
“살려 달라?”
천일영의 눈이 월영에게 향했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
이를 악물고 버티며 자신의 생명의 줄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사현풍과 그의 사제가 월영을 장난감처럼 다룬 흔적들은, 살이 벌어지고 피가 흐르며 고스란히 온몸에 남아 있었다.
천일영의 눈이 사현풍의 사제에게 돌아갔다.
“싫다.”
휘익!
순간 사제의 머리 반이 날아갔다.
그리고 머리가 반만 남아 있는 기괴한 모습의 몸통이 수풀로 쓰러졌다.
그 모습은 기괴하고 끔찍했다.
아직도 몸의 감각이 살아 있는지 손을 허우적거리며 꿈틀거리는 모습은,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머리를 찾는 것 같아 보여서 소름 끼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월영은 끔찍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 월영조차 보기 힘들 지경.
그리나 천일영은 이미 죽은 자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월영아, 잠시만 기다리거라.”
“네? 그게 무슨…….”
천일영의 신형이 이십여 장 떨어진 나무숲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영문을 알 수 없던 월영의 눈이 두 번 깜박이는 사이, 천일영이 숲속에서 목덜미를 거머쥔 사람을 끌고 나온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에 핏발이 가득 서 있는 모습.
바로 초서복이었다.
“네놈에게 물어볼 것이 아주 많다.”
“끅…… 끄그극…….”
천일영은 초서복의 혈도를 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다음, 옆으로 집어 던졌다.
“조금만 참거라.”
“끄아아아아아악!”
우드드득!
사현풍의 비틀린 검날에 의해 어깨에서 송두리째 빠진 월영의 어깨뼈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맞춰진다.
그 고통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한 월영이지만, 많이 해 본 듯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뼈를 맞춰 내는 능숙한 손길에 눈물이 찔끔 나오는 정도로 참아 낼 수 있었다.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누워라.”
“네? 네에.”
아직도 어색한 느낌.
공자의 모습에 월영은 잠시 낯선 느낌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마치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스으으윽.
그리고 월영의 몸에 스며드는 기운.
월영은 온몸에 이상하고 기묘한 기운이 삽시간에 도는 것을 느끼고 눈앞이 핑 돌았다.
분명 내공 같은데 월영이 가지고 있는 기운과는 너무도 다른 기운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피가 흐르는 틈새가 막히고, 살이 아물어 가는 모습을 보자 월영은 입을 다물었다.
이 기운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후두두둑. 쏴아아아아.
월영의 얼굴을 거센 빗줄기가 다시 때려 댄다. 천일영이 기운을 거둔 탓이었다.
무공 하나 모르고 돈만 많은 철딱서니 없는 줄 알았던 공자가 이렇게나 강한 사람이었다니, 월영은 자신의 눈이 옹이구멍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진정으로 부끄러웠다.
“감사합니다, 공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직 몸이 온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같이 가지.”
천일영이 월영과 초서복을 한 팔에 하나씩 들고 천지일축공으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 순간, 월영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거친 빗줄기가 살을 파고들듯 얼굴을 때려 댔다.
그 빠르기가 얼마나 빠른지 월영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조차 벌리지 못했다.
그저 월영은 마음속으로 천일영에게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사…… 사람 살려. 공자, 조금만 천천히.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