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객잔을 지으며 전 객잔 주인에게 구입한 산에 새로 지은 장원.
이 장원 안에서 혈향이 떠나지 않았다.
천이영이 아무리 단옥의 몸을 닦아 내도 끔찍한 피 냄새는 죽음처럼 단옥의 곁에 머물렀다.
손님방에 나란히 누운 단옥과 월영의 모습은 천이영의 억장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하다.
조금 전, 가족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장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천이영은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알기도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솟아올랐지만, 천이영은 억지로 삼키고 참아 냈다.
단옥을 안고 있는 건청도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둘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천이영으로서는, 건청도 참고 견디는데, 울음을 터트릴 수는 없는 일.
“이영아, 단옥에게 이것을 먹이거라.”
“전에 주신 것 같은 약재인가요?”
천이영이 받아 든 나무 상자에는 흙과 함께 사람처럼 생긴 생나무 뿌리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만년 삼이 무엇인지 몰랐던 천이영이 흙을 털어 내고 껍질을 벗기려 하자 천일영의 손이 급히 그것을 막아섰다.
“그냥 먹이거라. 일 할만 잘라 먹이면 된다.”
“그렇게 작은 양으로 괜찮을까요?”
“오히려 많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서 조금 넉넉히 먹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천이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도, 눈도 고쳐 준 오라버니가 하는 말 아닌가.
천이영은 만년 삼을 잘게 쪼개어 단옥의 입에 넣고 삼키게 했다.
“으으…… 으음…….”
단옥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징조였다.
또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단옥의 살갗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암기술사가 쓴 독은 학령초(鶴靈草)를 제조한 것으로, 심장과 간장, 폐부 안까지 침투하여 사람을 죽이는 독이었다.
천일영은 거의 10할의 독을 제거했지만 심장과 간장에 스며들어 있는 독은 어찌할 수 없었다.
강제로 뽑아내면 단옥은 그 자리에서 명을 다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공을 가진 무인이라면 남은 독 정도는 스스로 배출해 낼 수 있겠지만, 단옥은 남은 독 때문에 절반의 확률로 죽게 될지 살게 될지가 결정될 터다.
때문에 천일영은 만년 삼이 가지고 있는 해독의 성질을 이용하여 남아 있는 독까지 모두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입에 어서 넣거라. 늦을수록 간장에 독이 더 스며들게 된다.”
천천히 영약의 기운이 단옥의 몸 안에서 돌자, 천일영은 단옥의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기운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서히 독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독이 있던 자리엔 만년 삼의 기운이 자리를 메우고 독에 침식된 상처에 스며들며 치료하기 시작했다.
“우웩! 쿨럭!”
단옥의 입에서 아까와는 달리 검은색이 아닌 시뻘건 피가 쏟아진다.
만년 삼에 중화된 울혈들이 토해진 것이었다.
건청은 단옥의 몸을 안아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건청의 걱정과는 달리 단옥은 천천히 눈을 떴다.
“건청…… 오라버니?”
“단옥아, 정신이 들었구나!”
“네에…… 뭔가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오라버니! 건청 오라버니, 괜찮으신 건가요?”
“이 와중에 내 걱정부터 하는 것이냐…….”
건청은 행여 단옥의 몸이 부서질까 소중히 안고 천천히 누인다.
아픈 자신의 몸을 뒤로하고, 바보 같고 모자란 자신을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단옥의 마음에 건청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견디기 힘들다.
“후우…….”
건청이 입을 열려고 했다.
조금 전 죽어 가는 단옥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가.
그러나 건청은 마음을 정했으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을, 무림에서 때가 타고 명분만 앞세운 더러운 일에도 얽혔던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다.
그러나 갈피를 못 잡는 어지러운 건청의 마음에 갑자기 월영이 끼어들었다.
“단옥 소저, 정신이 드셨구려. 소저처럼 참한 사람이 잘못되었으면 마음 아팠을 사람들이 많았겠소. 참으로 다행이오.”
월영의 따뜻한 말과 눈빛.
급히 상처만 아물게 했기에 아직은 아픈 몸이지만, 자신의 몸보다 단옥을 걱정하며 따뜻한 언행을 건네는 월영이다.
서로 다친 몸에 나란히 누워서 정양을 하다 보니 동병상련의 마음이 강하게 들기라도 한 것일까.
“참으로 큰일이 날 뻔하셨소. 소저가 무사해서 나도 무척이나 기쁘오.”
진심으로 잘됐다는 표정.
단옥을 걱정하는 그 마음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
그러나 건청은 월영의 말과 표정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한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월영의 단옥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길과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월영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머리 위로 피가 몰려 눈앞이 새하얗게 보이는 건청이 자리를 박찼다.
벌떡!
건청은 단옥의 왼쪽에 앉아 있다가 오른쪽으로 재빨리 자리를 옮겨 월영과 단옥 사이를 비집고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이후 건청은 월영과 단옥의 사이를 반으로 가르고 앉자, 신기하게도 가슴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다만 월영만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이러시오. 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러나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월영을 등 뒤로 하고 건청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손을 내뻗어 단옥의 손을 낚아채듯 꼭 붙잡았다.
이제 더 이상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에.
“건청 오라버니?”
순식간에 단옥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허나 어찌 눈을 질끈 감고 각오를 굳힌 얼굴의 건청을 보고 단옥의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옥은 조금 전 자신이 삼도천(三途川)을 건널 뻔한 것도 잊고, 자신의 손을 꼭 잡은 건청의 온기를 느끼며 살짝 눈물을 지었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건청의 대답은 이미 충분했기에.
* * *
“아직도 밖에 있는 것이냐.”
“공자님.”
천일영의 물음에 금채홍이 울음을 터트릴 듯 울먹거린다.
아까 암기술사와 독술사가 독무와 함께 수십 개의 암기를 던질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금채홍이다.
그리고 친구 단옥과 월영이 피투성이가 되어 장원으로 들어섰을 때 금채홍은 기절할 듯 놀라며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고 한참을 울었다.
지금에 와서는 정신을 차리고 혹여라도 남은 잔당이 있을까 하여 밖에 나와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한심함이 장원 안에 남아서는 면목이 없어 도망쳐 나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눈물 자국이 많이 남아 있구나.”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한심합니다.”
“너무 서두르는구나. 네 나이에 지금의 경지면 차고 넘치는 실력이다.”
“흑…… 차고 넘치면 무엇을 합니까. 제 곁에 있는 사람 하나 지키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으헝헝헝.”
금채홍이 천일영의 품으로 안겨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이번 일에 꽤나 많은 충격은 받은 듯 멈추지 않는 눈물이 천일영의 옷을 적셔 갔다.
그러나 그때 밖으로 나선 건청이 울고 있는 금채홍을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건청 오라버니!”
“네가 한심하다고 할지 몰라도 나만 하겠느냐. 내 눈앞에서 단옥이 쓰러지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건청의 눈에 비장함이 떠오른다.
점소이가 아닌 오랜만에 보는 무인으로서 건청의 눈빛이다.
그 눈빛이 어떠한 것인지 모를 리가 없는 천일영이 건청의 앞을 서며 입을 열었다.
“날뛰는 것은 일단 나중이다. 지금은 이것이 어찌 된 것인지부터 알아보지.”
천일영의 말에 건청과 금채홍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잠시 후 장원의 창고.
“믿어 주시오. 내가 그런 것이 아니오. 나는 그저 전달을 한 것뿐입니다.”
초서복은 무릎을 꿇고 천일영에게 사정했다.
자신은 그저 객잔 주인들의 요청을 전달한 것뿐이라고 목청을 높이며 애원하고 매달렸다.
“이것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초서복이 자신 있게 품 안에서 꺼낸 종이에는 객잔 주인들의 명단과 은자 20냥씩 낸 기록들이 있다.
초서복은 이로써 자신은 죄가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에 자신감이 어렸다.
그러나 초서복은 마음속까지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서 있는 공자.
진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분명 이 사람에게 죄를 들키면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었다.
조금 전 젊은 공자의 무공을 보지 않았던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초절정 고수 둘을 황천길로 보냈다.
“음……. 이 문서가 사실이라고 해도 월영의 말은 네놈의 말과 전혀 다르군.”
“네? 월영이요?”
너무 무서웠기 때문인가 보다.
초서복은 멍하니 월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그 자리에 월영을 죽이라고 자신이 살수를 보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구경하러 간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월영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초서복의 말라붙은 목으로 침이 넘어갔다.
“일단 뼈부터 시작하지.”
“뼈……? 공자 잠시만…… 으악!”
우두둑. 뚜둑. 뚜두두둑. 뚝. 뚜둑.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
초서복은 비명을 질렀다.
팔은 원래 한 번만 안쪽으로 접혀야 한다.
그런데 초서복의 오른팔은 방금 천일영의 손에 의해서 열 번으로 접혔다.
눈앞에서 뼈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가는 것을 보며, 초서복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왜 팔이 아니라 뼈라고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다음은 왼쪽이다.”
“히익!…… 공자, 아니 공자님! 다 말하겠습니다.”
“시끄럽다.”
뚜두두둑. 뚜둑. 뚜두두두둑. 뚝. 뚝. 뚝.
“끄아아아아아악! 제발! 제발! 살려…… 으아아아아아악.”
양팔을 접히고 난 후, 초서복은 모든 것을 다 불었다.
무림맹으로부터 쫓기던 일.
미흑천의 존재. 미흑천이 자신에게 시킨 일.
월영과의 충돌.
천이영을 죽이려 했던 것과 별유천지로 인해 장사가 안되는 객잔을 회유한 것.
일이 끝나면 객잔 주인들의 명단을 현청에 넘기려 했다는 것과 묻지도 않은 8살 때 부모님의 돈을 훔친 일과 18살이 되던 해 사부님의 딸을 건드리려다가 죽도록 맞은 일까지.
초서복은 자신이 했던 일을 죄다 불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 으윽…… 다…… 다 말했소…… 제발…… 살려 주시오…….”
“걱정하지 말거라. 죽이지 않는다.”
“그…… 그것이 정말이오?”
“무림맹에 넘기면 돈이 들어오는데, 죽일 리가 없지 않느냐.”
초서복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무려 칠 년이나 도망을 다녔다.
무림맹은 수십 일 동안 초서복을 고문하고 처참하게 죽일 것이었다.
그만큼 초서복이 사혈련에게 넘긴 정보는 중요한 것이었고, 칠 년 동안 초서복에게 농락당한 무림맹의 증오는 컸다.
그러나 초서복의 절망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무림맹에 넘기기 전에 다리도 열 번씩 접어 줄 것이었으니까.
“내일 날이 밝으면 이놈을 무림맹의 지부에 넘기거라. 현상금이 나올 것이다.”
“네, 돈은 받은 즉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 돈은 네가 가지거라. 단옥을 보살피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공자님!”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는데 단옥까지 생각하는 배려에 건청은 침통한 표정으로 깊이 고개를 숙인다.
도대체 이 공자에게 얼마큼의 은혜를 입는 것일까.
금채홍에게 들은 바로는 오늘 단옥에게 사용한 만년 삼의 가격이 금화 이백 냥에서 삼백 냥을 호가한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먹은 만년 하수오도 적게 잡아 금화 이백오십 냥이 넘는다고 했다.
심지어 요즘같이 영약을 찾기 힘들 때에는 금화 오백 냥까지도 호가를 한다고 했던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자신들에게 그 귀중한 약재를 아낌없이 풀어 준 공자에 대해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건청은 마음 깊이 공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따라야 할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흐음…….”
그러나 건청의 마음과는 달리 천일영은 심란한 마음이 든다.
별유천지 때문에 다른 객잔들이 망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천일영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별유천지의 영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여동생을 죽이는 일에 동참까지 할 정도인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천일영은 굳은 얼굴로 초서복이 넘긴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몇 가지 방도가 떠오르기는 한데 이것들을 실천하려면 수많은 돈이 필요할 터다.
이미 객잔을 짓는 데 거의 모든 돈을 쏟아부은 천일영은 미흑천이 그동안 많은 재산을 모았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