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처음에는 항주에 있는 도박장이나 도적질한 무뢰배의 집을 안내해 주는 정도로 생각했던 태문탁은, 점점 산속으로 들어서는 천일영을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산적들이 기거하는 산채라도 안내해 주는 것이라면 큰 공적이 되기는 할 테지만, 과연 저 비실비실한 공자가 산채 같은 것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하는 의아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심도 잠시다.
너무 오랜 시간 숲길을 걷다 보니 다리가 아프다.
죽도록 공부만 하여 현령이 된 태문탁에게는 너무 힘든 길.
또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벌레와 눈을 찌르는 나뭇가지가 짜증스럽다.
감히 현령인 자신을 이런 이상한 곳으로 끌고 온 공자가 괘씸하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태문탁은 언제까지 이 산길이 이어질지 몰라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옆에 아름다운 소저가 있는 것도 잠시 잊고. 그러나.
“다 왔다. 잠시 기다려라.”
“다 왔다고? 아니, 그것보다 이놈 아까부터 자꾸 반말질을 하……?!”
순간 눈앞에 있던 공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콰앙!
눈앞에서 장권 한 번에 거대한 문짝이 수백 조각으로 흩어진다.
태문탁은 눈을 비볐다.
저것이 정녕 사람?
장정 수십 명이 때려 부숴도 두 시진은 걸릴 만한 문이 아닌가?
‘잠깐?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야?’
태문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속 깊은 곳의 인적 없는 곳에 난데없이 커다란 장원이 나왔다.
분명 산적들이 기거하는 산채는 아니었다.
산채라면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으로 이동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을 테니까.
이곳은 오히려 숨기에 좋은 곳이었다.
“으아아악.”
그때, 비명 소리와 함께 태문탁의 앞으로 팔다리가 반대로 돌아간 검은 무복 차림의 남자가 날아왔다.
느닷없이 날아오는 사람의 신형에 태문탁은 처음엔 놀라서 한 발 뒤로 뺐지만, 땅바닥에서 뼈가 부러져 흐느적거리는 놈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어디에선가 많이 보던 자가 아닌가.
“용모파기(容貌疤記)를 가져오너라!”
“네.”
부관이 가져온 용모파기를 넘기던 태문탁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미흑천이었다.
게다가 무려 은자가 10냥이나 걸려 있는 흑도.
“헉! 그럼 여기가 미흑천의 절강성 지회란 말이냐!”
포졸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그마치 미흑천이다.
애들이 안 자고 울고 불며 칭얼거리면 부모들이 매일같이 써먹는 그 미흑천이 맞다.
태문탁의 눈이 부서진 문을 향했다.
도대체 얼마큼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 상상이 안 갔다.
저 비실비실해 보이는 공자가 우는 애들도 한 번에 그치게 만든다는 그 미흑천의 지회를 혼자서 박살 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다.
건청이라는 점소이는 밖에서 덤벼드는 미흑천의 흑도들을 상대로 모조리 뼈를 박살 내고 있었다.
“아니……? 점소이인데 어째서……?”
그러나 태문탁이 기겁을 하며 혀를 내두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소저 때문이었다.
휘이이익! 휘잉! 촤아악. 촤아아악!
“으아아아악!”
“이 미친년은 머여? 으아아악. 내 다리!”
“내 팔! 으아아악. 양팔을 다 자르다니!”
단아하고 아름다운 얼굴 너머 번쩍이는 빛을 발하는 검이 춤을 추자, 흑도들의 팔과 다리가 인정사정없이 사방으로 잘려 나간다.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태문탁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오줌까지 쌀 뻔했다.
그러나 태문탁이 소저를 바라보며 더욱 무서웠던 것은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는 듯한 무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휘이이이잉.
순간 밖의 적을 모두 정리한 소저의 검이 오른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허공을 가른다.
그러자 검에 끈적하게 붙어 있는 피가 방울방울 검줄기를 따라 깨끗하게 날아가는 모습.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만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다.
“들고 있는 저 화려한 검이 장신구처럼 들고 다니는 겉치장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순간 소저의 표정이 변하며 이내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는다.
건물 안에 있는 흑도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
소저가 검을 혀로 핥으며 지회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태문탁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면서 본 광경 중에 가장 끔찍한 광경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자 거대한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신형이 튀어나왔다.
“꽤애애애애애애액!”
아직 소저 때문에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이 가라앉기도 전인데 정말로 몸에 안 좋다.
그러나 태문탁의 표정은 이내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방금 하늘을 날아와 자신의 앞에 처박힌 놈. 회주 석태충이다.
무려 은자 40냥짜리 초거물!
게다가 포박하기 딱 좋도록 뼈까지 잘게 부숴서 눈앞에 가져다주니 태문탁의 입꼬리가 귀 뒤에 걸릴 지경이었다.
태문탁은 정성을 다해서, 마음속 깊숙이, 모든 열과 성의를 다해서 외쳤다.
“당장 이놈들을 포박하라!”
신경을 긁는 소리를 잠시 석태충이 하기는 했지만, 그딴 거야 뭐 어떤가.
온몸으로 짜릿하게 고함을 외치니, 흥분된 기분이 온몸을 파고들어 취하게 한다.
“기뻐 보이는군.”
“허허헛, 보셨습니까.”
쑥스러운 마음에 뒤통수를 긁는 현령의 눈앞에 별유천지의 공자가 돈궤를 든 것이 보인다.
딱 봐도 금화가 들어 있을 법한 돈궤다.
“가져가도 되겠지?”
“아이고! 그럼요. 얼마든 가져가십시오. 혹시 안 챙겨 가신 것이 나오면 따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현상금 잊지 마라. 또 연락하겠다.”
말 한마디만 남기고 천일영이 모습을 감추자 태문탁은 손발이 후들거리며 떨리는 것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자신에게 반말 좀 하면 어떤가.
저런 고수 곁에 있는 소저를 탐하려고 생각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하지만 태문탁은 아찔해도 웃음이 나왔다.
무려 미흑천의 절강성 지회다.
오랫동안 속을 썩이면서도 그 꼬리조차 잡을 수 없었던 곳.
그것을 포박만 하면 되도록 자신에게 던져 주고 공까지 모두 넘겨주니 천일영은 이미 태문탁에게 귀인(貴人)이었다.
그뿐인가.
또 연락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천일영이 또 연락하겠다는 말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저놈은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잘생겼다.
망할 새끼.
* * *
오 일에 걸쳐 천일영은 하루에 하나씩 미흑천의 지회를 부수고 다녔다.
하루에 다섯 개 이상의 지회를 박살 낼 수도 있었지만 천일영은 굳이 하루에 하나씩 부수고 다녔다.
미흑천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당장 이놈들을 포박하라!”
하늘 높이 뻗어 나가는 현령의 상쾌한 목소리.
지독한 쾌감이 태문탁의 온몸을 짜릿하게 울린다.
이 맛은 한번 맛보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아편과도 같은 기분이다.
“이 정도 공적이면 괜찮은가.”
“말해서 무엇합니까. 공자님 덕에 제가 요즘 아주 살맛이 납니다.”
“그렇군. 그럼 오늘도 가지고 가도록 하지.”
“아이구. 그러믄입쇼. 들기 번거로우시면 제가 포졸들을 시켜다가 이따 집까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괜찮다.”
천일영은 다섯 번째 미흑천 회주의 포박이 끝나자 돈궤를 건청에게 넘겼다.
이제 다섯 번째 지회가 박살이 났으니 슬슬 때가 되었다.
지금부터는 미흑천이 몸을 사리고 있을 터다.
그리고 지회가 박살이 난 것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할 때이기도 했다.
“앞으로 칠 일 동안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고…… 공자님? 지금 밀어붙여야 소탕을 하지 않겠습니까?”
한창 공을 세우는 맛에 빠져 항주를 벗어나도 꿋꿋이 따라오던 현령이 바람 빠진 오줌보 같은 얼굴을 하며 천일영을 바라본다.
그러나 천일영은 대답하지 않고 웃음만 지어 보였다.
지금쯤이면 미흑천 본문에서 각 지회에 연락장을 돌렸을 것이었다.
그리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미흑천의 고수들을 불러들이고, 회주들에게 돈궤를 가지고 본문으로 들어오라고 할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어차피 지회를 부수러 가도 돈과 회주 모두 없을 것이고, 잔챙이만 지키고 있는 지회는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며칠 푹 쉬면서 다음을 준비하고 있거라.”
“네에…… 알겠습니다. 공자님의 말씀이라면 제가 따라야지요.”
말을 하면서도 태문탁의 표정은 흡사 똥을 밟은 것만 같은 표정이다.
자신이 현령인데 어째서인지 공자보다 한참을 낮은 자리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거부하기도, 거절을 하고 외면하기도 힘든 느낌.
“공자님, 고생하셨어요.”
“채홍아,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는구나. 날카로운 검에 예기가 더해지니 이제 자르지 못할 것이 없어 보인다.”
“공자님 발끝이라도 따라가면 그런 말을 해 주십시오. 그래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에헤헤헤헤.”
그러나 공자 옆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소저를 보자 태문탁은 스스로도 이해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춤을 추며, 무표정하게 사람들의 손발을 모조리 잘라 버리는 여자가 저리 곁에 붙어서 웃음을 짓는데, ‘나 따위야, 뭐.’ 하는 생각이다.
‘악귀 같은 무서운 여자를 저렇게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저 공자뿐이겠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태문탁은 급작스럽게 피곤이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소저의 모습에 가슴이 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과는 달리 저 소저와는 잘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당분간은 검을 든 여자와 만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예리한 검날을 혀로 핥는 여자다.
아주 무서워 죽겠다.
* * *
같은 시각.
“현령 따위가 지회를 부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미흑천의 천주 강일택의 노기가 온통 방 안 뒤덮자,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미흑천의 간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벼루나 술병이든, 그 무엇인가가 반드시 날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살벌한 분위기라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 꼭 있는 법.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책사이자 전국의 지회를 관리하는 노병천이 말을 꺼낸다.
“현령을 돕는 자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놈을 찾으…… 어이쿠!”
퍼억! 챙그랑.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일택이 집어 던진 술병이 날아와 노병천의 머리를 깨고 피를 튀긴다.
그 모습에 간부들은 모두 눈을 내리깔고 벌벌 떨었다.
술병이었기에 망정이지 벼루였으면 분명 노병천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었기 때문에.
“현령을 돕는 놈이 있다는 건 자명한 일이 아니냐. 그런 당연한 것 말고 이름은 무엇인지, 몇 명이나 되는 자들인지! 어디에 사는지! 그런 쓸모 있는 것들을 알아 오라는 말이다! 이 쓸모없는 것들아!”
“네!”
노병천의 희생으로 남은 간부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는 꽁지가 빠지도록 자리를 떴다.
노병천만이 쓰러진 채 혼미한 정신으로 바닥을 기고 있을 뿐.
그 모습을 본 강일택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당연한 말을 하다 머리가 깨졌다고는 하나, 간부라는 놈들이 자신보다 윗사람인 노병천을 챙기기는커녕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이 나가 버렸으니 말이다.
“화가 지나쳤다. 괜찮으냐.”
“천주님, 이 노부에게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할 말은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하는 노병천이다.
그 덕에 머리가 수십 번은 깨졌지만, 강일택은 말을 멈추지 않는 노병천을 사실 아끼고 있었다.
다른 놈들이면 벼루를 던졌을 것을 노병천이어서 딱 술병을 던질 만큼만 말이다.
“네놈의 능청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는구나. 사실은 방도가 있지 않느냐? 이제 슬슬 말해 보거라.”
“천주님, 이제는 이 노부의 속을 다 꿰고 계십니다.”
노병천은 자리에 앉아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 혼미한 정신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던 모습과는 달리, 살도 얼마 안 찢어지고 정신도 온전했다.
“사실은 천주님 허락도 없이 연락장을 돌려서 절정 이상의 고수를 모두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회주들에게 돈궤를 들고 모두 이곳으로 오라고도 하였습니다.”
“허허…… 역시 노병천이군. 잘했다.”
“천주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이냐?”
노병천의 얼굴에 근심과 기묘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노병천이 두 가지의 표정을 떠올리는 일은 강일택도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일.
그것이 의미하는 심각성이 얼마만큼인지 강일택도 모르지 않았다.
“초서복입니다.”
“초서복?”
천주 강일택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어째서 지금 그자의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