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노병천의 걱정 어린 눈빛이 빠르게 상황을 연결하여 말을 이어 간다.
“초서복, 그가 요청하여 최고수 살막 다섯을 보냈습니다.”
“그랬지.”
“모두 죽었습니다.”
강일택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초절정 고수 두 명에 암기술사가 둘, 그리고 독술사가 하나였다.
의뢰를 하면 그날 모두 죽는다고 하여 당귀살(當歸殺)이라는 별칭까지 있는 자들.
그런데 그들이 당일에 모두 죽이기는커녕 전부 죽었다.
그 말은 상대편에 엄청난 무공을 가진 자가 있거나, 혹은 상당한 수를 가진 전력이 있다는 의미다.
“나가서 찾을 것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는 뜻인가?”
“맞습니다. 제가 돈궤를 회주들에게 가져오라고 한 것은 돈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돈으로 사람을 사라는 것입니다.”
“노병천! 네놈이 이 미흑천을 우습게 보는구나. 놀랄 일이기는 하나 그 정도의 일에 미흑천이 떨어야 하느냐!”
“천주님, 사현풍과 그의 사제는 중원 백대 고수에는 들지 못해도 그 이름값이 높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둘 다 단 일격에 반으로 잘려 죽었습니다.”
“……!”
초절정의 고수를 단 일격에 죽인다는 것.
강일택 스스로도 사현풍을 단 일격에 죽이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최소 다섯에서 열 초식 사이에 승기를 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단 한 수라니!
“그것이 사실인가?”
“몰래 파견한 자들이 시신의 조사를 끝냈습니다.”
“노병천이 하는 말이니 확실하겠지. 지금 당장 낭인 신분의 고수들을 고용하고 살막에 연락을 하여 사람을 데려오거라. 그리고…….”
“사혈련에는 제가 일을 의뢰하겠습니다. 귀문살(鬼門殺)을 부르겠습니다.”
“맡기겠다.”
노병천이 자리를 떠난 방 안이 어둡게 물들기 시작한다.
방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강일택이 깊은 생각에 잠겼기 때문이다.
이미 붙잡힌 회주 석태충.
그가 강일택과 미흑천의 발목을 잡는다. 석태충은 한때 강일택의 오른팔이었다.
너무 바보 같기도 하고 성정이 지나치게 흉포하여 회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석태충이 없었다면 미흑천을 세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만큼 큰 역할을 했다.
‘석태충은 미흑천의 겉과 속을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 미흑천의 가장 밑바닥까지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석태충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미흑천의 정보는 다른 간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미흑천에 관련된 모든 것.
어찌 보면 강일택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가 바로 석태충이었다.
그가 바로 미흑천의 주춧돌 역할을 했으니까.
“누구 없느냐.”
“네.”
“가서 흑천암살대 단주를 오라고 하거라.”
“알겠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초절정 고수를 일격에 죽이는 자다.
그런 그가 미흑천의 모든 것을 알고 온다면 힘든 싸움이 될 것이었다.
강일택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흑도 조직의 우두머리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강일택이 사혈련를 홀로 나올 때 유일하게 따라 나온 석태충.
자신을 믿고 유일하게 따라왔던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비록 자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찢어 버리기에 충분했기에.
강일택은 가장 독한 술을 골라서 병을 열었다.
* * *
타다다다다닷!
등져 오는 어스름한 달빛을 맞으며 이십 명의 신형이 들판을 가로지른다.
흑의와 두건으로 몸을 가린 채 말없이 항주로 달려가는 신형이 보통의 무인은 아니다.
그만큼 빠르고 잘 통솔이 되어 있다.
미흑천의 최강 전력 중 하나인 흑천암살대.
단주 방태용은 항주가 가까워질수록 경계에 더욱 날을 세웠다.
환한 달빛이 비추는 수풀을 달리고 있는 것은 발각되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
그러나 시급을 요하는 천주의 명령은,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임무를 완수하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방태용은 흑천암살대 이십 명을 데리고 가장 앞장서서, 위험을 감수하고 최단 거리로 수풀을 가로질렀다.
항주까지 이제 고작 십 리가 남았다.
그러나 항주가 가까워질수록 방태용의 마음에는 의문이 깃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주의 명령은 납득이 가지 않는 것.
‘석태충을 죽이라니. 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천주의 명령은 현령을 납치해 오는 것과 항주 현청에 잡혀 있는 미흑천의 흑도원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회주 석태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꼭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방태용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삶을 살았지만,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이번 일은 의문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에 거친 파문을 남긴다.
천주의 오른팔 같았던 석태충을 구하지 말고 죽이라는 것과 노병천이 사파에 귀문살(鬼門殺)을 요청했다는 것.
‘위험한 냄새가 너무 지나치다. 심지어 현청까지 손을 대고 현령까지 납치한다는 것은…….’
몇 가지의 이해하기 힘든 일이 겹친다.
방태용조차 처음 겪어 보는 일.
방태용은 자칫 위험함을 넘어 부하들의 전멸까지 상정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때문에 방태용은 부하들에게 다시 한번 일의 심각함을 알리기 위하여 전음을 날렸다.
평상시 임무를 수행하는 마음으로 대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
[이번 일은 특히나 위험할 것이다. 다들 긴장을 풀지 말거라.]
방태용은 전음을 보낸 후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이제 항주를 감싸고 있는 성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임무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방태용은 순간 의아함이 들었다.
부하들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정적.
부하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방태용이 달리는 것을 멈추고 즉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방태용의 눈앞에 보이는 처참한 광경.
“이것이……!”
믿기지 않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하다.
부하들이 모두 몸뚱이가 허리부터 잘려서 둘로 나눠져 쓰러져 있다.
단 일격.
그것에 이십 명의 부하가 사십 조각이 되어 널브러졌다.
방태용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모두 최고의 암살대원이고, 일류 고수에서 절정의 고수들이다.
그런데 반항은커녕 누가 죽였는지도 모른 채 순식간에 당했다.
그뿐인가.
아무리 검강(劍罡)을 쓴다 한들 흩어져 있는 이십 명을 단 한칼에 죽일 수 있는 무인이 중원에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4장에 달하는 검강을 쓰는 무인이 있었다.
부하들의 간격이 4장이었으니까.
“숨지 말고 정체를 드러내라.”
방태용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상대에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도망갈 기회조차 놓치고 죽을 것이기 때문에, 방태용은 다음을 기약하기 위하여 평정을 가장하고 태연한 표정을 쥐어 짜냈다.
“네놈이 단주인가?”
“……!”
그러나 필사의 연기도 소용없이, 염라대왕 같은 서늘한 목소리는 허망하게도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정체 모를 무인은 처음부터 등 뒤에서 자신을 살펴보고 있던 것이었다.
“몸과 기운을 보니 네놈은 암살대인가 보군.”
“놈! 그것을 어찌?!”
“암살대라면 현상금은 없겠지.”
방태용의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 끼치는 기분.
저놈이 한눈에 자신을 암살대라고 어찌 알아보는가.
자신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놈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방태용은 땅을 박차고 몸을 내뻗었다.
온몸의 신경과 감각이 비명을 지른다.
저놈은 정말로 위험한 놈이라고.
파바밧!
마지막 기회였다.
상대가 등 뒤에서 칼을 휘두르기 전에 경공을 사용하여 빠져나가면 살 수 있을 터다.
적을 등 뒤에 둔 위험한 상황이지만 방태용은 경공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방태용의 생각과는 달리 몸은 앞이 아니라 땅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분명 경공으로 땅을 박찼는데 그의 얼굴이 지면을 향했다.
“크아아아악!”
바닥에 쓰러진 방태용은 자신의 신형과 다른 위치에서 무릎 아래가 땅을 박차는 것을 보았다.
방태용이 경공을 사용함과 동시에 무릎이 통째로 잘린 것.
아직도 살아 있는 신경과 발로 이동시킨 내공 때문에 무릎 아랫부분만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으아아악! 이 망할 놈이 무슨 짓을! 이 개자식아, 죽일 거면 그냥 죽일…… 커억!”
무극지검이 방태용의 심장을 꿰뚫며 사방으로 피를 튀겼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천일영.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 조금 비틀린다.
“제법이군. 미흑천이라, 생각보다 큰 조직이구나.”
고문으로 걸레짝이 된 석태충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지만 미흑천은 알려진 것보다 규모나 무인의 질이 대단했다.
회주들과 조직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낼 줄은 예상했으나, 암살대를 운용할 정도라면 이미 그 규모가 흑도 조직을 넘어선 것.
그러나 천일영은 피식 웃음을 짓는다.
사혈련에 비하면 규모가 일 할의 반도 안 될 것이었다.
그런데 미흑천의 강일택이라는 자가 스스로 천주라고 칭하고 있다 하였다.
사혈련이 쓰는 천주와 같은 명칭이었다.
“천주라…… 이놈은 현상금이 얼마나 될까.”
천일영이 무극지검을 들어 방태용의 시신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때리자, 검에 실린 내공이 터지며 커다란 불꽃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불꽃은 방태용의 시신으로 옮겨붙고 이내 들판으로 번져 수풀과 함께 이십여 구의 시신들까지 집어삼켰다.
화르르륵!
항주의 성벽에 일렁거리는 불꽃의 흔적이 그림자라는 자국을 남긴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천일영의 발걸음이 항주 내성으로 옮겨졌다.
이제 서서히 끝을 보아야 할 시간이다.
자신과 아끼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터전에 흑도들이 돌아다니게 둘 만큼 자신은 무골호인(無骨好人)이 아니다.
싹을 잘라 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터.
뿌리까지 모조리 뽑아 버릴 것이었다.
* * *
다음 날 저녁.
연락도 두절되고 돌아오지도 않는 흑천암살대가 어찌 되었을지 눈에 그리듯 보였다.
강일택은 노병천의 걱정이 이제서야 실감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흑천암살대가 훈련받은 대로 행동했다면 지금쯤 단 한 명이라도 돌아와서 일의 상황을 보고해야 했을 터.
감당 못 할 상대를 만나면 한 사람이라도 몸을 빼내어 그것을 미흑천에 알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육신조차 남기지 못했으리라.
“노병천.”
“네, 천주님.”
“모든 문을 걸어 잠근다. 그 누가 오더라도 절대 열리지 않는 방어책을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강일택의 고심이 깊어진다.
과연 누구인가.
항주에 이 정도의 무공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는 들어 보지 못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적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에도 과연 그러한가? 아닐 것이다.
모든 정황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을 걸어 잠그고 움직이지 않는다.
놈이 찾아올 때까지.
* * *
칠 일 후.
“X부럴! 이게 도대체 뭔 일이여.”
산적 두목 송여악은 눈앞의 민둥산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깊고 울창한 산림을 자랑하던 산이었다.
10장에서 15장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여름이면 물기를 머금은 새파란 나뭇잎이 하늘의 빛을 반사하고 흙바닥의 물기를 지켜 주던 곳이었다.
‘그랬는데…….’
오 개월 전, 송여악이 산적질을 하던 산의 나무가 모두 없어졌다.
그리고 열흘 뒤 옆 산의 나무가 모두 사라졌다.
또 한 달 뒤, 앞산의 나무가 모두 증발했다.
모두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천여 그루가 넘는 나무.
이 나무들이 사라진 이후 송여악은 산적질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 같은 곳에 몸을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