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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37화 (38/270)

37화

원래는 송여악이 집어삼켰어야 할 먹잇감이 멀리 5리 떨어진 곳부터 산적들을 발견하고 도망을 쳤다.

또한 평소 통행세를 내던 표국도 송여악이 어디 있는지 멀리서 파악하고 길을 돌았다.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

그럴 때면 송여악은 평소 자랑하던 우람한 덩치가 원망스러웠다.

몇 개월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그래도 빠지지 않은 살 역시 미웠다.

자신의 덩치는 움직이는 표식이었다.

보여도 너무 잘 보였다.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고…….”

녹림의 채주가 지정해 준 자리 중에서도 명당이라 손에 꼽히던 산이 이 지경이 되고, 송여악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조금 모여 있던 돈도 이내 녹림의 채주에게 상납금으로 나갔고, 녹림의 채주가 정해 준 이 산을 마음대로 옮기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꼬르르르르르륵.

오늘로 밥을 못 먹은 지 며칠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나무가 사라지자 생긴 일이다.

나무들이 사라진 이후 들짐승도 같이 사라져서 사냥조차 못 했다.

송여악은 급한 마음에 녹림으로 구원의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개소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긴 하룻밤 사이에 몇백 그루의 나무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긴 했다.

송여악 자신도 믿기지 않는데, 녹림이라고 믿어 줄까.

송여악은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나무가 없어진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 줄 수도 없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떤 놈이 나무를 베어 갔는지 잡히며 껍데기를 벗겨 버릴 것이다!”

배고픔에 못 이긴 송여악의 분노가 민둥산에 울려 퍼질 때, 그의 오른팔인 평수찬이 그것을 막아섰다.

“두목, 사람이 이곳으로 옵니다.”

“뭣이? 사람? 드디어 한 놈 걸리는구나!”

송여악의 눈이 찌르는 햇빛을 피해 가늘어진다.

그러자 정말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송여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게다가 걸으며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송여악의 무리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사람의 신형이 가까워지자 송여악의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보다 송여악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다가오는 사람이 젊은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두목. 젊은 여인이라고 해도 저 사람이 입은 옷은 무복이 아닙니까?”

“상관없다. 나도 칼이라면 이것이 있지 않느냐.”

송여악이 호쾌하게 언월도(偃月刀)도 오른손에 거머쥔다.

그러나 평수찬은 그것을 보고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가뜩이나 송여악의 덩치가 커서 멀리에서도 잘 보이는데, 저놈의 언월도 또한 얼마나 거대한지, 저것도 사람들이 미리 도망가는 원흉 중의 하나였다.

‘저 망할 놈의 두목 놈은 잠시 내버려 두고 저 여자,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인데…….’

평수찬의 눈길이 여인을 뚫어지게 살펴본다.

파란색 무복에 소매는 흰 물결 띠.

게다가 허리에 찬 검도 상당한 물건이다.

이 정도라면 분명 내공을 가진 무인.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두목, 아무래도 해남파 같습니다. 그냥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봐야 갓 스물을 넘긴 계집이다.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느냐. 저 계집을 보내면 우리는 또 굶어야 한다.”

배고픔이 송여악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본디 산적은 무공보다는 힘과 숫자로 도적질을 하는 집단.

산적질에 삼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동원되는 이유다.

‘그런데 무인을 건드린다?’

재수가 없다면 반각도 안 되는 시간에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송여악은 끝내 오 척 거리 앞까지 다가온 여인에게 언월도를 겨누었다.

“멈춰라.”

그런데 송여악의 멈추라는 말에 정말로 여인이 발걸음이 멈춘다.

아마도 듣는 것만큼은 제대로 하고 있기에 무의식중에 멈춘 모양.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송여악은 그 모습을 보고 한쪽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도대체 간덩이가 부은 건지, 모자란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가진 돈을 내놔라.”

또다시 여인이 송여악의 말대로 품을 주섬주섬 뒤져 돈을 꺼내 든다.

그것을 낚아채어 열어 본 송여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은자가 무려 다섯 냥이나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돈이면 삼십 명의 부하들과 두 달은 술판을 벌이며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으흐흐흐. 이 여자, 분명 모자란 것이 맞구나.’

시키는 대로 온전히 다 한다.

어쩌면 이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산적에게 걸린 것을 뒤늦게 깨닫고, 짐짓 책을 읽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송여악은 간만에 나타난 먹잇감이 덜떨어진 바보라는 사실에 하늘을 향해서 감사의 말을 올렸다.

“크하하핫! 하늘이 우리를 도왔구나. 봇짐과 검도 내놔라. 그럼 목숨을 살려 주지.”

송여악의 얼굴에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보고 있어서 단순히 미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여인의 얼굴은 숨이 멎을 만큼 절세가인이다.

게다가 피부가 얼마나 희고 고운지 송여악은 빼앗을 것 다 빼앗고 이런 짓이나 저런 짓을 할 궁리로 얼굴이 터져 나갈 만큼이나 흥분했다. 그러나.

“검?”

검이라는 말에 여인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가는 공기.

그리고 책에서 눈을 뗀 여인이 매서운 기운을 풍기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그 모습조차 얼마나 숨 막히게 아름다운지 송여악은 다시 한번 콧김을 뿜어 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송여악은 자신의 무서운 모습에도 놀라지 않고 여인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이 여자가 바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이 나간 광녀(狂女) 아닐까 싶다.

게다가 입을 떼고 하는 말은 또 어떠한가.

“여기 어디?”

눈초리는 매섭지만 주변을 둘러보며 갸우뚱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다.

분명 모자란 광녀다.

그러나 매서운 눈길로 맹한 소리를 하는 것이 자극을 더한 탓일까.

송여악뿐만 아니라 다른 산적들도 콧김을 이내 뿜어 대기 시작했다.

오직 평수찬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을 뿐이다.

후욱. 후욱. 후욱.

삼십 명의 산적들이 콧김을 뿜는데도 여인은 그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적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표정이다.

“분명히 절강성 항주로 가던 길이었는데…….”

“여긴 강서성 정강산(井岡山)이다. 이 멍청한 계집아.”

“정강산? 거짓말하지 마라. 산이라고 하는데 나무가 하나도 없지 않느냐.”

여인의 검이 허공으로 뽑혀 나온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결의와 함께. 그 모습을 본 송여악은 또다시 가슴을 쳤다.

“네년까지 안 믿는 것이냐!”

“흥, 믿을 말을 해야 믿지 않겠느냐. 생긴 것도 산적같이 생겨서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뭐…… 뭐라고?”

심장을 칼로 쑤시는 듯한 느낌과 함께 송여악의 마음에 입은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무가 없어서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신세가 된 것도 얼마나 큰 상처인데, 이 나쁜 년이 서슴없이 산적같이 생겼다는 말을 지껄인다.

산적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산적인데! 순간 송여악의 눈이 뒤집어졌다.

“이…… 이년이! 얘들아! 당장 이년의 무릎을 꿇려라!”

“예!”

삼십 명의 남자들이 모두 콧김을 뿜으며 여인에게 덤벼들었다.

타다다닷.

그러나 여인은 여유 있게 한 걸음 물러서서 산적들의 공격을 피한다.

산적들이 쓰는 무공은 내공이 없거나, 급조해서 만든 무공이었기 때문에 힘에 의존해서 싸운다.

때문에 산적들은 검과 같이 다루기 까다로운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고 도끼 같은 것을 사용했다.

파괴력은 좋지만 무거운 것과 동작이 단조로운 것이 흠이었으니 여인이 피하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챙챙챙챙.

그리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삼십 명의 산적들을 향해, 여인이 들고 있는 검에서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이 춤추듯 뻗어 나왔다.

* * *

천일영과 건청, 그리고 금채홍은 이른 아침부터 강서성 정강산(井岡山)으로 향했다.

이곳의 산맥 깊숙한 곳,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물이 모여 있는 곳에 미흑천의 본문이 있다고 했다.

석태충의 말에 의하면 물 위에 지어 놓은 수상(水上) 전각이라고 했던가.

피식.

천일영이 입꼬리가 비틀어진 채 비웃음을 지었다.

스스로 천주라고 칭하는 자가 다른 세력의 힘이 닿지 않는 정강산에 거처를 마련한 것도 소심한데, 그것도 침략이 무서워 물 위에 전각을 지어 놓다니, 천주라 칭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물 위에 전각을 지은 기술만큼은 천일영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전각을 빼앗아서 별유천지 정강산 분점을 내 볼까?’

천일영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잘만 이용하면 몇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방도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천일영의 기감을 어지럽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느껴진다.

‘희한한 일이군.’

원래라면 천일영은 그것을 무시했을 터다. 중원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흔했으니까.

그러나 여인의 기운이 천일영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걸리는 기운. 분명 천일영이 잘 아는 사람의 기운이었다.

‘그런데 해남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이지?’

잠시의 호기심이 아니다.

천일영은 분명 과거에 깊은 인연이 있었던 사람의 흔적을 느낀 것이었다.

“건청아, 채홍아. 잠시 들렀다가 갈 곳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그 어디든 같이 가겠습니다.”

“별것은 아닌 일이지만 저 산 너머에 신경 쓰이는 것이 있구나.”

말을 끝낸 천일영이 금채홍과 건청을 한 팔에 하나씩 껴안자, 건청은 어리둥절하는 표정이고 금채홍은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다.

“공자님? 설마?”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으으으으…….”

파앙!

천지일축공으로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천일영은 빠른 속도로 여인이 있는 곳을 향해 날듯이 공간을 가르며 나아갔다.

* * *

“우웨에에에엑!”

“으에에에에엑! 으아…… 이 느낌 오랜만이네.”

뒤에서 나란히 머리를 박고 구토를 하고 있는 건청과 금채홍을 두고, 주변을 둘러보던 천일영은 나무가 모두 없어진 민둥산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조금 심했던 모양이군.”

별유천지를 짓기 위해 희생된 산.

밤에 나무를 베느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훤한 낮에 보니 산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천일영은 헛기침을 두 번 하고 시선을 돌려 혼자 삼십의 남자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여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챙챙챙챙.

걱정한 대로 여인은 싸움에 밀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또한 산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산적들의 몸에 자잘한 상처는 만들어도 쓰러뜨릴 일격을 주지 못하는 것.

특히 덩치가 큰 산적이 휘두르는 언월도에 간격을 만들지 못해 여인은 애를 먹고 있었다.

“전형적인 연무장 무공이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해남파라면 비무조차 인정하지 않고 생과 사를 건 혈투를 벌이는 문파다.

그렇기에 미리 합을 맞추고 예정에 따라 검을 휘두르며 연무장 무공을 사용하는 여인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여인은 미리 합을 맞춰 연습한 검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산적의 단조로운 공격도 수가 많다는 이유로 공격보다 막기에 급급했고, 심지어 쫓기듯 싸우며 검기조차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일류 고수로서는 형편없는 실력.

“그동안 해남파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해남파와 오래전에 인연이 있다고 해도 천마신교와 무림맹이라는 관계가 있었기에, 마음속에만 품고 서로 해가 될까 연락을 하지 않은 지 오래다.

‘연무장 무공이 아니라 진짜 무공을 보여 주어야 깨달음을 얻겠군.’

뒤에서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금채홍.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지 거친 숨을 토하고 있다. 그러나.

“채홍아,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건청의 등도 좀 두드려 주고.”

“우…… 우읍, 알겠습니다. 공자님, 우읍!”

손에 뽑혀 든 무극지검.

그러나 조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에 겁 없이 무공을 휘두르며 돌아다니던 시절, 그때 인연이 생겼던 사람을 이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기에. 해남파 문주의 딸이 이곳에 있다면 그것은 바다 건너에서 분명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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