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채채챙!
“크윽!”
언월도의 길이가 계속 해남파의 여인을 괴롭힌다.
분명 검기를 두르고 있는 검인데 언월도의 간격을 메우지 못했다.
그러나 해남파의 여인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검기나 내공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보법이었다.
채채챙. 채챙. 촤자자장.
“아아앗! 크윽.”
보법이 흔들리니 상대에게 파고들지도 못하고, 또한 피하는 것도 능숙하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내공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서 산적의 도끼질에 손목이 꺾이고 있는 것.
이미 퉁퉁 부은 손목은 더 이상 칼을 잡기도 힘들 지경이고, 다리는 무리하게 힘을 주고 지탱을 하느라 근육이 폭발하는 듯하다.
‘젠장, 우리 해남파에 수치가 될 수는 없거늘.’
눈앞에서 능글능글한 웃음을 짓는 언월도를 든 남자 아니, 고깃덩어리처럼 생긴 놈이 연신 혀를 날름거리며 접근을 해 오는 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휘이익! 휘이이익!
순간 언월도가 자신의 정면으로 날아 들어오면서, 또한 뒤를 이어 도끼 열 개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분명 자신이 지친 것을 알고 한 번에 합을 맞춰 들어오는 공격.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이다.
그러나 해남파의 여인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해남파의 이름을 걸고 죽는 한이 있어도 도망을 칠 수는 없으니까.
휘이이잉. 휘익!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검을 앞세우고 몸을 앞으로 내뻗는다.
분명 검기를 두르고 있지만, 언월도와 도끼의 날이 워낙에 두꺼워 검처럼 쉽게 밀어내지 못하는 것.
그렇다면 일단 중상을 입더라도 언월도부터 처리해야 했다.
저 언월도를 든 놈이 두목이니까.
그러나.
촤아아앙!
말도 안 되는 완력에 밀려나는 신형.
해남파 여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비록 고깃덩어리처럼 보이는 흉악한 남자이지만 그 완력만큼은 진짜.
무공으로 치면 외공이라 할 만큼 강한 힘이다.
지이이이익.
이를 악물고 버티지만 밀려나는 신형이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또다시 눈앞에서 날아오는 언월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두목 놈이 자신의 검을 든 팔을 향해 언월도를 휘두른다.
아마 팔 하나쯤 자르고 볼 생각인 듯하다.
‘젠장!’
그러나 보법이 엉키고 신형이 무너져 검을 들쳐 올릴 수도 없다.
이대로라면 언월도에 팔이 잘리고 그대로 자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
투욱. 카아아아앙!
“……?”
“괜찮으냐?”
등 뒤에서 누군가가 밀려나는 힘에 쓰러지는 신형을 받쳐 주고 이내 언월도까지 튕겨 낸다.
또한, 꺼내 든 검은 어떠한가.
자신의 검도 명검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한 장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든 검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상한 빛이 감도는 것이 한눈에도 보아도 보검(寶劍)이다.
“누구……?”
“지나는 길에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들러 보았다.”
“크윽, 이것은 내 싸움이다. 신경 쓰지 말아라!”
그러나 눈앞의 공자는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싱긋 웃으며 산적들에게 검을 겨눈다.
“싸움을 빼앗을 생각은 없다. 다만 조금 지쳐 보여서 말이다.”
“나는 해남파다! 한번 뽑은 검은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절대 집어넣을 수 없다는 바로 그 해남파다. 그러니 참견하지 말아라!”
“음……. 긍지가 높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네 팔목으로는 무리일 듯싶구나. 긍지라는 것은 지킬 수 있는 자가 입에 담는 것이다. 지금의 네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
“……!”
웃으며 부드럽게 하는 말과는 달리 내용은 신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해남파의 여인은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지금의 자신은 해남파의 긍지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퉁퉁 부은 팔목과 검을 쥐기도 힘든 손을 눈앞에 두고 입만 살아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파방!
부드럽게 쏘아져 나가는 공자의 신형.
그다지 빠르지 않은 듯한데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날아가듯 춤을 추는 검결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뭐지? 이 해남파와 비슷한 검결은? 게다가 보법도 해남파의 것은 아니지만 마치 해남파와 같다!’
챙. 챙. 채챙!
부드럽게 발길을 이동하며 밟는 보법은 느린 듯하지만 분명 산적들을 하나씩 무너트리고, 날아오는 도끼를 여유 있게 피하며 또한 검을 확실하게 찔러 넣는다.
그러나 눈앞의 공자는 산적들을 죽이지 않고 다치게 만드는 정도로 끝낸다.
힘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도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저 보법을 보니 내가 쓰던 보법이 창피하여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네.’
해남파 여인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그 어디에서 보지도 못한 보법.
게다가 해남파를 의식한 듯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보법이다.
이쯤 되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저 공자는 해남파의 무공을 아는 것일까?
아니면 흉내 정도만 내는 것일까?
아니, 흉내만 내는 것이라면 저렇게 절묘하게 무공을 보이지는 못할 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눈앞의 공자는 지금 자신에게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하여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런 친절한 행동을 왜 하는 것인가.
내가 예뻐서?
챙그랑!
두목의 손에서 떨어진 언월도.
잠시 공자의 보법과 검결에 취해 있는 동안 어느새 삼십여 명이 들고 있던 도끼는 바닥을 구르고, 거대한 언월도가 배를 뒤집은 채 햇빛을 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해남파 여인을 놀라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찾아온 깨달음이다.
다음의 경지로 가기 충분할 만큼의 깨달음.
불과 반 다경 정도 공자의 무공을 보았을 뿐인데 새로운 무공의 길이 보였다.
‘잠시 동안이지만 평생 수련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 눈앞의 공자가 검을 검집에 담고 몸을 돌려 다가오며 말한다.
“이제 보여 보거라. 해남파의 긍지를.”
“마……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욱신거리는 팔목을 참으며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는 여인은 이를 악다물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분명 문파의 이름은 자신이 지켜야 했다.
허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그러나 눈앞의 공자가 다가와 팔목을 잠시 어루만진다.
언제 다가와 만지는지 눈치도 못 챌 만큼 빠른 손길.
해남파의 여인은 처음엔 불쾌한 기분에 큰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갑자기 손목의 부기가 가라앉으며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까도 말했지만 긍지라는 것은 마음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 통증이 가라앉다니! 젠장, 분하지만 고맙다.”
해남파의 여인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해남파의 무공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문파의 사람이거나, 반대로 문파의 비급을 탈취한 원수 둘 중 하나.
그러나 그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일단 눈앞에 보이는 패거리들의 처리가 먼저다.
“다시 시작해야지? 덤비거라.”
“아니…… 저놈하고 이년하고 번갈아 쌍으로 돌아가며 뭔 미친 지랄이여…….”
송여악이 눈을 끔뻑이며 황당한 눈초리를 보내는 순간, 다시 한번 해남파 여인의 손길에서 남해삼십육검이 펼쳐진다.
그러나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날카로운 공격이다.
촤아앙. 촤촹.
“으헉!”
“쿠액!”
순식간에 파고드는 신형.
조금 전에 이리저리 밀리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 같다.
그리고 연이어 계속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이내 반 다경이 안 되어 혼자 남게 된 송여악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언월도를 바꿔 쥐며 가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이년이 갑자기 왜 이래! 이제 곧 저 몸뚱이가 내 것이 될 판국이었는데!”
“몸뚱이?”
“내 것?”
송여악의 말에 천일영은 혀를 차고, 여인은 표정이 굳어지며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내 것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이나 어리지 않았다.
“이제는 가문의 긍지가 아니라 네 몸부터 지켜야 하겠구나.”
“무슨 말인지 안다. 맡겨라.”
여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산적을 연상케 하는 생김새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심지어 겁탈까지 하려는 놈이었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악인이라는 것을 깨닫자 여인의 칼에 아지랑이같이 검기가 펼쳐졌다.
“이런저런 말 말고 무릎을 꿇어라. 네년 다음은 저 곱상하게 생긴 놈이다!”
거대한 언월도가 태양 빛을 가리고 해남파 여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크고 무거운 언월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송여악 역시 보통의 산적은 아니다.
그러나 전과 같이 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차분하게 언월도의 궤적을 바라보는 해남파 여인의 검날이 허공을 향해 그림자를 거두어 내듯 빛을 발한다.
카앙. 촤아아악!
순식간에 여인의 칼날이 송여악의 언월도의 날을 잘라 버린다.
해남파 특유의 검날을 기울이는 검술이었고, 이것이야말로 해남파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공격.
“히…… 이익!”
눈앞에서 철로 만들어진 언월도가 두부처럼 잘려 나가자 송여악은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예뻐 보였던 여인이 이제는 저승사자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
그러나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사…… 살려…… 히이이이익!”
여인의 칼날이 마치 검무를 추는 것과 같이 아지랑이를 피우며 송여악의 옷을 잘게 잘라 나갔다.
살덩이는 그대로 두고 옷만 잘라 내는 것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송여악은, 창피한 마음보다 공포심에 미칠 것 같았다.
사람이 돌변했다.
적어도 송여악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차가운 눈길은 길가의 쓰레기를 보듯 송여악을 바라보았고, 마지막 남은 옷이 허공으로 날아가자 여인은 송여악의 흉측한 것을 발로 강하게 내리쳤다.
내공을 가득 담아서.
빠각. 뽀각.
“끄아아아아아악!”
송여악은 온몸으로 느꼈다.
남김없이 깨지는 것을.
그 통증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했다.
그러나 몸이 아픈 것보다도 앞으로 영원히 불구가 될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팠다.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다시는 그 더러운 물건을 보이지 말아라!”
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송여악의 뒤로 평수찬 역시 잠시 송여악이 느끼는 기분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상상을 했는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평수찬은 이미 천일영이 나설 때부터 눈짓으로 포기의 의사를 전했었다.
“초면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나. 신세를 졌다. 나는 설려온이라고 한다.”
“신세랄 것까지는 없다.”
해남파의 여인이 이름을 밝히고 이내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이 상황이 부끄럽기도 하고 눈앞의 공자가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다.
왜인지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신기한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도 뒷골이 당기며 순간 차가운 기운이 어디에선가 풍겨 온다.
키이이잉!
“꺄악!”
“감히 우리 공자님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냐.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웬 여자가 휘황찬란한 검을 반쯤 뽑아 목에 들이대고, 엄청나게 커다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얼굴을 들이댄다.
그 모습이 흡사 미친 여자.
순간 튀어나온 여인의 신형에 설려온은 심장이 떨어져 나갈 만큼 놀랐다.
“채홍아, 괜찮다. 검을 넣도록 하거라.”
“하지만 공자님!”
“반말 좀 하면 어떠하냐. 그나저나 건청은 몸이 괜찮아졌느냐?”
“아…… 그것이 아직 죽어 가고 있습니다.”
스르르릉.
설려온은 검을 집어넣는 여인을 보며 조금 전 마음속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취소했다.
‘내가 예뻐서 도와준 것은 아니구나.’
자신도 꽤나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에게 비교하면 스스로 초라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한편으로 내심 부러운 마음도 지울 수 없다.
누군가를 모신다는 것에 저리 열성적인 것을 보면 저 공자의 인품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의 해남파에서는 있기 힘든 일이기에, 부러운 마음이 살짝 질투로 바뀌어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