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정강산 깊숙한 곳.
물 위에 떠 있는 수상 전각을 보며 천일영은 감탄했다.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전각은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물 위에 떠 있으니 화공(火攻)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할 것이었다.
강일택이라는 미흑천의 천주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인 듯싶었다.
“공자, 이곳은 엄청난 곳이군.”
설려온이 감탄사를 토해 내자 천일영의 양미간이 구겨졌다.
잠시 설려온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탓이다.
조금 전.
설려온은 은혜를 갚겠다는 말과 조금 전에 보여 준 무공에 대해서 캐물었다.
정확히 해남파의 무공은 아니었으니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내심 이상함을 느낀 것.
그러나 은혜도 무공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설려온은 시무룩한 얼굴로 사는 곳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졸라 대기 시작했다.
“음……. 항주에 가 있으면 내가 찾아가지.”
“정말이냐? 기다리고 있을 테니 꼭 와야 한다.”
“약속은 지킨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어라.”
“응!”
정강산에서 항주로 가는 길은 복잡하다.
관도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설려온에게 무려 반 시진 동안 길을 상세히 알려 주었건만, 설려온은 불과 20장도 가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몇 번이고 길을 다시 알려 주어도, 설려온이 길을 제대로 간 것은 딱 40장까지.
“혹시 길을 잘 헤매는 것이냐?”
“…….”
설려온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땅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짚은 모양이다.
“이 산속으로 들어온 것도 길을 잃어서인가?”
“여기가 산속이 맞는가? 나무가 없어서 들판인 줄 알았다.”
뒤에서 동아줄에 꽁꽁 묶인 송여악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자신이 말할 때는 귓등으로 안 듣더니 저 짜증 나게 잘생긴 공자가 한마디 하니 믿어 버리는 것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게…… 책을 읽으면서 길을 걷다 보니 팔 일이 지났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곳이었다.”
“책을 읽지 않고 길을 걸으면 되지 않느냐.”
“그…… 그게…… 책을 안 읽어도 똑같아서 그럴 바에는 책이라도 읽자고 생각한 거라…….”
천일영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 두면 절강성 항주는커녕 이틀 뒤에는 반대편인 호남성에 가 있을 것 같았다.
해남도에서 절강성까지 가는 길은 관도를 따라 광동성과 복건성을 따라오는 것이 편한 길이었다.
그런데 설려온은 광동성에서 복건성으로 관도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강서성으로 길을 질러온 것이었다.
어찌 보면 빠른 길이지만 관도가 아닌 산과 들을 가로질러 왔다는 것이니,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데려다줄 테니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거라.”
“싫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지만 나도 같이 가겠다.”
“위험한 곳이다.”
“상관없다.”
완강하게 버티는 설려온의 흔들림 없는 눈이 과거를 생각나게 만든다.
천일영도 저렇게 고집스러운 눈빛을 하고 이십 대를 돌파해 왔다.
설려온과 차이가 있다면 천일영은 그 고집스러움으로 한결같이 이를 악물고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뿐.
그리고 그 시절에 해남파와 인연이 닿았었다.
“나중에 원망하지 말거라. 그리고 평수찬이라고 했느냐. 너도 따라오거라.”
“네.”
천일영은 송여악의 부하 평수찬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보통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눈치가 빠르고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마음에는 들지만 믿을 수 있는지는 별개이다.
평수찬을 쓸 데가 생각났던 천일영은 시험 삼아 데리고 나섰다.
앞으로의 행동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미흑천의 본문 앞에 다섯 명의 사람이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 * *
미흑천 천주 강일택은 물 건너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아무리 살펴봐도 알 수 없는 조합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자 한 놈은 수상 장원으로 오는 길목 초입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산적 놈 중 하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남자는 내공의 흔적이 없고 얼굴만 잘생긴 것이 분명 기둥서방 같은 놈.
오히려 화려한 검을 들고 있는 미인인 여자 쪽이 일류 고수에서 절정의 고수.
또 한 명의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는데…….
“근데 왜 점소이 옷을 입고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무복도 아니고 저 옷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조합이다. 산적 하나에 기둥서방 하나, 그리고 여자 무인 둘에 점소이까지.
“사현풍을 일격에 죽인 자는 오지 않고 저런 것들이 이 미흑천 본문를 찾아내다니,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오는구나.”
“일단 사람을 내보내겠습니다.”
“귀문살(鬼門殺)을 내보내거라. 명성만큼이나 실력이 있는지 보고 싶구나. 저 정도면 눈 세 번 깜박일 사이에 처리하겠지.”
노병천은 강일택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무려 금화 열 냥에 계약을 하고 데려온 자들을 저런 잡졸을 상대로 내보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노병천도 사혈련이 자랑하는 귀문살의 실력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
쿠구구구구궁.
최아아아아.
물속 깊은 곳에서 기관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지면을 울리며 돌을 깎아 만든 40장 길이의 다리가 떠오른다.
이것이 미흑천이 자랑하는 수상 장원과 육지를 연결하는 장치.
그리고 그것을 본 천일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분명 탐이 나서 가지고 싶은 표정이다.
“공자님, 사람이 나옵니다.”
평수찬이 눈빛을 빛내며 돌다리를 건너오는 다섯의 사람을 뚫어지게 살폈다.
무공을 알지 못하는 평수찬이 뚫어지게 바라본다 하여 실력을 가늠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평수찬의 눈길은 마치 쥐를 몰아넣는 뱀처럼 모두를 핥듯이 살폈다.
“공자님, 다섯 모두 초절정 고수인 듯합니다. 특히 가장 앞에 서 있는 자를 조심하십시오. 손을 보니 양검을 사용하는 자입니다. 검집을 보니 사검(蛇劍)을 두 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왼쪽의 한 명은 몸의 형태로 보아 도(刀)를 사용하기에 적합한 자고 오른쪽의 한 명은 허리에 연검(軟劍)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렇군.”
천일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대단히 놀라고 있었다.
‘제법이다.’
사혈련에서도 유명한 귀문살의 특징을 직접 겪어 보지 않고 보이는 것만으로 전부 알아냈다.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대신 몸의 형태와 분위기, 그리고 상황을 조합하여 상대편을 특정하는 능력.
그만큼 머리가 좋고, 그에 못지않게 관찰력도 뛰어난 것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귀문살 다섯 명이 눈앞의 다섯 명을 향해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다가온다.
분명 경계조차 하지 않는 모습.
귀문살의 단주 사귀진은 검조차 뽑아 들지도 않고 다섯 명의 방문자 앞에 섰다.
그리고 위압적인 시선으로 내리 보며 한쪽 입꼬리만을 올린 채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설려온은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딱히 기운을 내뿜지도 않는데 눈조차 마주치지 못할 만큼 몸이 눌리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중원 백대 고수의 실력!’
압도적인 위압감을 느끼는 것은 설려온뿐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귀진과 귀문살의 단원들이 뿜어내는 압력에 고개가 움츠러들 지경이다.
오직 천일영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응? 이 기운은……?’
순간 사귀진의 표정이 굳어진다.
분명 눈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
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기는 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흔적이 느껴진다.
아니, 정확히는 이 남자가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하지 않고 과거를 생각나게 만드는 기운을 조금씩 흘리고 있는 것.
‘……!’
순간 사귀진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간다.
어째서 이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자신들이 비록 백대 고수 중에서 말석에 자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단원 다섯이 모두 백대 고수이기 때문에 무림에서 거칠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면.
[호…… 혹시?!]
[오랜만이구나. 귀진아, 잘 지냈느냐.]
[처…… 천마님! 정말로 천마님이십니까?]
전음을 날렸던 사귀진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분이 맞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극마의 경지일 때였는데, 지금 보니 모습이 또 바뀌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사귀진이다.
이 사람은 중원에 극마의 경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미 또 하나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바로 탈마다.
[천마님, 어째서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천마 노릇을 때려치웠다 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다.]
[때…… 때려치웠다는 말씀입니까? 하하핫……. 천하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마님, 한 분뿐일 겁니다. 또한 천마님께서 여기에 오시는 줄 알았으면 저 역시 이쪽으로 발걸음도 안 했을 것입니다.]
[나도 우연치고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나저나 미흑천 천주 강일택 저 미친놈이……. 천마님, 저놈들 제가 당장 손 좀 볼까요? 말씀만 하시면 당장 저놈들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괜찮다. 내가 처리해도 된다.]
[천마님과 칼을 맞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납니다.]
[내가 너를 알아볼진대 무슨 일이 있겠느냐. 귀진아, 항주로 오거라. 술 한잔하자. 기다리고 있으마.]
[알겠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찾아뵙겠습니다.]
[좋은 술을 준비해 놓지.]
스윽!
“저희는 물러나겠습니다. 귀인(貴人)이시여.”
한동안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싶더니 그 무서운 사귀진이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자, 천일영과 함께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귀진과 같이 있는 귀문살의 단원들도 놀라서 입을 쩍 벌린다.
과연 귀문살의 단장 사귀진의 고개를 누가 숙일 수 있게 만들겠는가.
사혈련의 천주 정도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존심 덩어리 같은 사귀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믿기지 않는 일.
휘이이잉!
천일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귀문살의 다섯이 신형을 감추었다.
그리고 신형을 날려 정강산을 빠져나가는 귀문살.
허나 사귀진은 그렇다 해도 단원들은 이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알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도 그럴 게 사귀진의 얼굴이 아직도 새파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
한참을 말없이 신형만을 날리고 있는 사귀진의 눈치를 보던 단원들이 유향설의 옆구리를 툭툭 친다.
말을 걸어 보라는 의미다.
귀문살 단원 중에서도 사귀진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유향설이라면 큰 탈 없이 물어볼 수 있을 터.
“단주, 어찌 된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까 그 사람이 누구길래 단주께서 이러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해가 안 가? 너희들, 저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그러나 사귀진의 말에 오히려 귀문살의 단원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눈을 끔벅인다.
모르니까 물어보지 알면서 물어보겠냐는 표정.
귀문살과 함께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하여 사혈련의 천주가 없는 자리에서는 욕도 하는 사귀진인데, 극존칭을 써 가면서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본 귀문살 단원들은 궁금함에 미칠 지경이었다.
“단주, 저희에게도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
“단주!”
“아니다. 너희는 모르는 게 나을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게 너희에게 이로운 일이다.”
“……!”
지금 이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 정확히 파악을 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천하제일의 무인이 십만대산이라는 감옥을 나온 것.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가.
그가 마음만 먹으면 천하를 그의 발아래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무려 무명암살대에 있을 때 일만을 넘게 죽이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게다가 극마에서 탈마로 그 경지가 더했다. 그런 괴물을 누가 당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일은 사혈련의 천주에게도 말을 하면 안 된다. 천마가 세상에 나온 것이 알려진다면 중원은 그야말로 태풍 앞의 촛불 같은 상태가 될 것이다. 천마를 두고 온갖 싸움과 모략, 그리고 회유가 벌어질 것이니 온 세상이 지옥과 같아질 터.’
그러고 보니 천마 저분은 나를 봤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지 말라는 말조차 안 한다.
사귀진 자신이 떠들고 다니지 않을 것을 믿고 있든지, 아니면 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든지.
하지만 사귀진은 고개를 저었다.
천마 저분은 원래 그런 분.
사소한 일로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만큼 커다란 그릇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게다가 사귀진은 신형을 날리며 또 하나의 결심을 했다.
하루빨리 찾아가서 뵙기로 말이다.
‘저분은 겉치레가 아니라 술 한잔 마시자고 기다린다면 진짜로 기다리는 사람이다. 조만간 정말로 찾아가야 한다. 안 그러면 진짜로 죽는다.’
사귀진의 이마에서 뺨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